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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업 속으로

오늘의 논점 - 강남역 살인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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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중앙일보 <2016년 5월 23일 30면>
정신질환자 관리 사각지대가 강남역 참극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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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R코드로 보는 관계기사 <중앙일보>

지난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피살사건에 대해 경찰은 22일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규정했다. 여성혐오에 따른 증오범죄라는 일부 지적도 있었지만 서울지방경찰청이 프로파일러 5명을 투입해 조사한 결과 김씨의 조현병(정신분열증)이 범죄 이유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씨는 이미 2003~2007년 피해망상 증세를 보였으며 2008년 조현병 진단을 받은 뒤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19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치료를 중단한 채 거리를 방황하다 증세가 악화되면서 이런 비극으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사건은 범죄 가능성이 있는 일부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준다. 정신질환자는 국가와 사회가 치료해 주고 관리해 사회 복귀를 도와야 할 대상이다. 치료받는 정신질환자는 결코 위험하지 않으며 범죄율이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낮다는 보건의료 통계는 이 같은 관리체계의 강화가 왜 필요한지를 잘 말해 준다.

이런 어이없는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면 정신질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고 있는지, 거리를 배회하며 증세가 악화한 사람은 없는지 제대로 관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현재 224개에 이르는 지방자치단체 건강증진센터에서 정신질환자들이 입원·치료·퇴원할 때 본인 동의서를 받아 실시하고 있는 사례 관리를 더욱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건강증진센터에 전담 직원을 배치해 업무에 몰입하게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의학적으로 고위험군으로 판단되는 환자에 대해서는 집중 전담제도 등 더욱 촘촘하고 치밀한 관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명령제를 더욱 엄격하고 실효성 있게 적용할 필요도 있다. 물론 인권침해 소지를 없애기 위해 투명하게 절차를 진행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위험 행동의 가능성이 크거나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에는 당국이 더욱 과감하게 개입하는 쪽으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정신질환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는 일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들을 사회가 백안시하면 치료나 관리 받는 것을 꺼리게 되고 이럴 경우 증세가 더욱 악화돼 극단적인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 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껴안아야 더욱 안전한 사회가 이뤄질 수 있다.

남녀 화장실을 분리하고 우범지역 환경을 개선하는 등 범죄 예방을 위한 사회 환경 조성도 절실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방치해 온 이런 문제점들을 적극 개선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야말로 억울한 희생자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일일 것이다.

한겨레 <2016년 5월 24일 31면>
여성차별의 위험한 변종 ‘여성혐오’, 제동 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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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R코드로 보는 관계기사 <한겨레>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23살의 평범한 여성이 모르는 남성에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살해당한 뒤 나온 추모 문구의 하나다. 분노와 공포로 공감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응축됐다. 어떤 여성이든 ‘그런 일은 나와는 상관없어’라고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 앞에서, 여성들이 소리를 모아 ‘여성혐오’를 고발하고 나섰다. 이번 사건을 뭐라 부르든, 그런 폭발적 반응은 여성혐오라는 병증의 심각성을 웅변하는 것이다.

분노와 공포는 당연하다. 지금의 여성혐오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의 위험한 변종이다.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익 향상이 중요하다는 담론은 상식이 됐지만 정작 사람들의 인식과 실제 여성들의 현실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있었다. 20·30대 여성들은 그 괴리를 실감할 터이다. 아들과 딸을 차별해 교육하지 않는 부모 세대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가부장적 억압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자란 젊은 세대의 여성들은 사회에 진출하면서 여전한 차별의 현실에 분노하게 된다.

현실의 이런저런 차별보다 더 두려운 것은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난 여성혐오다. 20·30대 여성들이 가부장적 질서와 성차별을 더는 당연한 일로 용인하지 않게 된 데 반해, 같은 세대 남성들의 양성평등 인식은 그 앞 세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 문화적 지체에 더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사회의 압력과 그로 인한 남성들의 분노와 열패감이 엉뚱하게 여성에게 전가된다. 군 가산점 논쟁이나 온갖 여성 비하 표현이 그런 예다. 보호 대상으로 여겨 무시하고 차별하던 기존의 여성차별이, 공격과 경쟁의 대상으로 삼아 적대하고 경멸하는 여성혐오로 변질된 것이다. 혐오가 공격성을 띠면 위험하다. 많은 여성이 이번 사건에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여성혐오의 공격성이 실제 폭력으로 현실화하기 시작했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이겠다. 이는 남녀 갈등 따위로 치부할 문제가 이미 아니다.

살인사건을 계기로 격발된 여성들의 항의는 여성운동 조직이나 전문가들 주도가 아니라 관심의 공유를 통해 스스로 각성한 일반 여성 대중의 자발적 분노 표출이란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 힘은 그만큼 커졌다. 침묵해온 정치권을 비롯해 온 사회가 지혜를 모아 응답해야 할 때다.

자신보다 약자 노린 묻지마 범죄 vs 달라진 여성 위상에 분노 표출

가재울고 2학년 신문활용 수업
‘사설 속으로’ 놓고 100분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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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서울 가재울고교 2학년 6반에서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사건을 놓고 토론수업이 이뤄졌다. 이날 교재는 중앙일보·한겨레 사설이었으며, 토론의 쟁점은 이번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소행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여성혐오 범죄인지였다. [사진 신인섭 기자]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구 가재울고 2학년 6반 학급 책상 위엔 교과서 대신 신문이 펼쳐져 있다. 2013년부터 중앙일보와 한겨레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사설 속으로’ 지면이 이날 수업 교재다. 지난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의 원인에 대한 두 신문사의 사설이 지면엔 비교돼 있다.

이날 수업은 오후 1시부터 2시50분까지 블록타임 수업(2교시 연강)으로 진행됐다. 수업을 이끈 조연희 국어교사는 “우리 사회는 시사 이슈를 이념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해석하는 경향이 강해 청소년에게 시사를 가르치는 것을 외면해 왔다”며 “중앙일보와 한겨레의 공동기획인 ‘사설 속으로’는 하나의 이슈에 대한 다각적인 해석을 교육할 수 있는 최적의 토론 자료”라고 말했다.

토론 주제는 ‘강남역 살인사건의 원인은 무엇인가’였다. 중앙일보의 사설은 조현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저지른 ‘묻지마 범죄’라고 규정했다. 반면에 한겨레 사설은 ‘여혐 사건’으로 바라봤다. 조연희 교사는 “같은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분석이 제시될 수 있다”며 “다른 기사와 자료를 찾아 좀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선택해 보라”고 말했다.

교실은 이내 떠들썩해졌다. 다섯 모둠으로 나눠 앉은 학생들은 “여혐이 무슨 뜻이야”라고 묻기도 하고, “한겨레 사설에서 왜 ‘군 가산점제’를 언급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서로 질문했다. 모둠 안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학생이 설명해 주는 식이다. 교사는 모둠 사이를 돌아다니다 학생끼리 해결이 안 되는 궁금증이 있을 때 개념만 간단히 설명해 줬다. 조 교사는 “교사가 개인적인 견해를 내비치면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멈추고 교사의 의견을 따라가려고 한다”며 “교사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게 시사 토론 수업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내용에 대한 이해를 마치자 각 사설의 논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한겨레 사설대로 여성혐오 범죄라면 오히려 여성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을 찾아가 무차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냥 자신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 같아” “이 사람의 직업이 뭐야? 정신병 여부보다 이 사람의 낮은 사회적 지위가 여성혐오를 갖게 된 원인인 것 같은데….”

5교시를 마치는 종이 울리자 학생들 입에선 “뭐야, 벌써 끝났어?”라는 소리가 나왔다. 6교시가 시작되자 토론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토론은 세다(CEDA·Cross Examination Debate Association, 교차조사토론) 방식으로 이뤄졌다. 세다란 주제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가진 양측이 입론(入論·논점을 세움)과 교차조사, 반론의 과정을 거친다. 논제와 관련해 자신의 주장을 표명하는 입론이 끝나면 상대방 토론자가 입론자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내용을 검증하는 교차조사가 이뤄진다. 반론은 입론과 교차조사 과정에서 구체화된 쟁점을 정리하며 상대방 논거의 허점을 지적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단계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자리 배치도 달라졌다. 중앙일보와 한겨레 양사의 주장으로 나뉘었다. 이어 입론자와 교차조사, 반론자 순서로 3대 3 토론이 진행됐다. 나머지 학생들도 자신이 지지하는 토론자 뒷자리에 앉았다.

한겨레 쪽 입론자로 나선 한의정양은 “여성혐오는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비하, 가부장적인 고정관념을 포괄한다”며 “여전히 가부장적 사고의 틀에 갇힌 일부 남성이 양성평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의 달라진 위상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곧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또 “이 남성은 평소 여성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 살인의 직접적 원인이므로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한 한겨레 사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 쪽 입론자인 안준형군은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여성이었던 것은 혐오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신체적·물리적 약자였기 때문”이라며 “조현병을 앓고 있는 정신이상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고 받아쳤다. 이어 안군은 “살인을 저지른 김씨가 숨어 있던 화장실에 여성이 아닌 어린이나 노인 등 또 다른 유형의 약자가 들어왔더라도 그는 공격성을 표출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여성을 죽였다고 여성혐오로 몰아가는 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맞섰다.

학생들은 교차조사와 반론을 펼치기에 앞서 1분 또는 30초씩 팀별 전략을 수립했다. 머리를 맞대고 짧은 시간 동안 상대방 주장의 약점을 파고들 만한 질문거리를 찾고, 예상되는 질문에 반박 논거도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의견을 나눴다.

중앙일보 쪽 교차조사를 맡은 곽수진양이 “단순히 여성혐오 범죄라고 본다면 이 사람을 ‘여성을 싫어하는 정상인 남성’으로 봐야 한다는 건데, 이 범죄를 일반 남성도 저지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한겨레 쪽 반론자인 이민영양은 “살인자 김씨가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무시당했다며 분노를 표출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남성이 무시하는 것보다 여성의 행동에 더 크게 분노했다는 것은 이 남성의 인식 속에 여성에 대한 무시와 불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이런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교육과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청객 학생들도 토론에 적극 참여했다. 상대편 논리의 허점을 토론자들이 놓치고 있으면 방청석에서 포스트잇에 재빨리 질문을 적어 토론자에게 건넸다. 상대의 질문에 토론자가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할 때도 방청석에서 답변이 될 만한 자료를 적어주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토론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은 “수업이 너무 짧다”며 아쉬워했다. 신윤서양은 “토론수업이 한번 끝나면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되는 것처럼 지치지만 이상하게 머리는 맑아진다”고 말했다. 이민영양은 “교과서에 실린 토론 주제는 찬반이 명확하고 단순한데 신문에 실린 이슈는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고 입장을 정하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 교사는 “토론의 원칙은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협약은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의 정치교육학자들이 모여 “학생에게 특정 견해를 강제 주입하는 수업을 금지하고 논쟁이 되는 부분은 교육 현장에서 논쟁하도록 한다”고 합의한 내용을 말한다. 분단 경험이 있는 독일은 모든 정치사회 교육을 보이텔스바흐 협약에 입각해 진행한다. 조 교사는 “시사 이슈를 다룰 때 항상 교사의 이념 편향성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는데, 교실에서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준수하면 좀 더 자유로운 논쟁이 보장된다”고 강조했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