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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흐드러진 메밀꽃 피어나는 웃음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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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을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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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는 9월 말까지 흐드러진 메밀꽃을 볼 수 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에서 묘사한 것처럼 하얀 소금을 산허리에 뿌려놓은 듯하다.

이맘때 강원도 평창은 다소곳하다. 메밀꽃이 가장 눈부시던 날은 지났고, 화려한 단풍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이 무렵. 그러니까 절정과 절정의 사이에 있는 지금, 평창의 산천은 아늑하고 차분하다. 하여 이맘때의 평창은 풍경을 벗삼아 산책과 레포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더 가을이 깊어지기 전에 가볼 곳은 평창군 봉평면이다. 늦여름, 그러니까 지난달 말부터 봉평 일대에는 솜이불을 깔아놓은 듯이 메밀꽃이 흐드러졌다. 국내 최대의 메밀 생산지는 제주도이지만 봉평은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덕분에 ‘메밀의 고장’으로 불린다. 이효석(1907~42)이 소설을 쓴 1930년대에는 오로지 먹기 위해 메밀을 재배했지만, 지금 봉평에서는 대부분이 메밀꽃을 보여주기 위해 메밀을 키운다. 평창군의 메밀밭 면적은 100㏊로, 이 중에서 80㏊가 봉평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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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손톱만 한 메밀꽃송이.

한국의 대표 축제로 꼽히는 ‘효석문화제’는 이미 끝났다. 그러나 메밀꽃을 감상하려는 걸음이라면 지금도 늦지 않다. 평창군청에 따르면 이달 말까지도 봉평 일대에서 소금을 뿌려놓은 듯이 반짝이는 메밀꽃밭을 만날 수 있다. 꽃 구경을 하러 간 김에 효석문화마을도 둘러보고 메밀밭에 둘러싸인 무이예술관도 들를 일이다.

봉평면은 2018년 겨울올림픽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휘닉스파크에서 모굴·에어리얼 등 9개 종목이 개최된다. 하나 휘닉스파크는 겨울 왕국이 아니다. 눈이 없는 계절에도 즐거운 곳이다. 이 계절에는 ATV(4륜 바이크)와 짚라인을 즐기고, 태기산(1261m) 자락의 숲길을 산책하기에 좋다. 리조트 안에만 머물러도 즐길 거리가 수두룩하다.

봉평면을 벗어나도 좋다. 보름쯤 뒤면 형형색색의 단풍이 내려앉을 오대산도 좋고, 오대산 자락 월정사 어귀의 전나무 숲길은 언제 걸어도 좋다. 양떼 노니는 대관령도 지척에 있다. 개중에서 평창군 미탄면의 청옥산(1256m) 자락은 바로 지금 찾아가야 하는 곳이다. 초가을에만 볼 수 있는 장관을 마주할 수 있어서다.

청옥산 꼭대기에 오르면 예부터 평창 사람이 농사짓던 땅 ‘육백마지기’가 있다. 해발 1200m 자락의 산기슭에는 거대한 무 밭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9월 한 달간 220t에 달하는 무를 수확한다. 마침 지난 1월 풍력발전기 15기가 가동을 시작해 또 다른 절경을 빚고 있다.

해마다 가을은 길지 않았다. 요즘처럼 낮에는 따사롭고 밤에는 선선한 계절은 더 더욱 얼마 남지 않았다. 아늑한 풍경이 손짓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기 좋을 때다. 평창 같은 곳으로 말이다.

슬로프엔 ATV, 산 꼭대기엔 고랭지 무 … 하루가 짧아요, 가을 평창

| 즐길 거리 많은 ‘한국의 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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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올림픽 주무대인 평창 휘닉스파크는 가을에도 즐길 거리가 다양하다. 푸른 슬로프에서 ATV를 즐기는 사람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선 요즘, 강원도 평창을 즐기는 방법은 의외로 다채롭다. 먼저 시린 바람 불기 전 메밀꽃 흐드러진 풍경을 만나야 한다. 봉평면 흥정천가에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마을이 있다. 다음에는 산을 오른다. 평창에는 차를 몰고 순식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산도 있다. 고랭지 무밭과 풍력발전기가 어우러진 풍광이 기이한 청옥산이 그러하다. 레포츠를 즐기고 싶다면 2018년 겨울올림픽의 현장으로 가면 된다. 평창의 스키 리조트에는 눈이 없는 계절에도 즐길 거리가 수두룩하다.

봉평 그리고 메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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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면을 가로지르는 흥정천. 섶다리와 돌다리가 놓여 있다.

잔치는 끝났다. 지난 2~11일 봉평면 일원에서 펼쳐진 효석문화제 이야기다. 그러나 하얗게 물든 메밀밭은 여전히 눈부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이달 말까지 유효하다.

인구 5700명에 불과한 봉평면은 소설가 이효석(1907~42)에게 철저히 기대어 살고 있다. 매해 9월, 열흘 남짓한 축제 기간에 약 50만 명이 봉평을 찾는다. 애오라지 메밀꽃을 보기 위해서다. 꽃 보러 온 김에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을 둘러보고, 어수룩한 맛이 매력인 메밀 음식을 원없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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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밤이면 메밀꽃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소설 속 공간을 차분히 감상하고 싶다면 축제가 끝난 뒤 봉평을 찾는 것이 되레 낫다. 숨이 막힐 정도로 멋들어진 풍광을 감상하기에 축제 기간은 너무 어수선하다. 이를테면 인디언 공연단과 터키인이 떠주는 아이스크림이 봉평 마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메밀은 파종 한 달 뒤 꽃을 피우고 보름 정도 벌과 나비를 맞는다. 봉평에서는 7월부터 시차를 두고 메밀을 파종한다. 하여 8월 말부터 9월 말까지 봉평의 들녘은 밤낮으로 빛난다. 효석문화제 주무대인 흥정천 주변뿐 아니라, 눈길이 잘 닿지 않는 마을 어귀에도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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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주제로 꾸민 봉평 ‘이효석 문학의 숲’.

가을에는 봉평면 일대에 조성된 효석 문화마을을 찬찬히 거닐기에 더없이 좋다. 효석 문화마을에는 작가의 생가 터와 문학관이 있다. 가을에는 ‘문학의 숲’이 매력적이다. 인적 드문 산자락에 들어서 있고 야생화와 단풍이 화려하다. 살랑살랑 계곡물 흐르는 소리도 내내 따라다닌다.

무이예술관 마당에는 다양한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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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석 문화마을 인근에 있는 무이예술관도 가볼 만하다. 예술가 4명이 2001년 폐교(옛 무이초등학교)를 활용해 꾸민 예술관이다. 학교 마당에는 조각품이, 내부에는 유화·서예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무이예술관의 주인공도 메밀이다. 예술관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메밀꽃이 살아 춤추는 듯한 유화가 눈에 띈다. 약 30년간 메밀꽃 그림에 매달리고 있다는 정연서(62) 무이예술관장의 작품이다. 정 관장은 “하얀 메밀꽃과 초록 이파리는 가장 맑고 포근한 색의 조화”라며 “메밀꽃을 한참 봐도 질리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전시관을 나와 예술관 마당에 있는 메밀밭에 들어갔다. 소금처럼 하얀 뭉텅이로만 보였던 메밀꽃이 한 송이 한 송이 눈에 들어왔다.

해발 1200m 고랭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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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자락에 있는 자작나무숲.

가을 초입에만 연출되는 또 다른 진풍경을 찾아 봉평면에서 약 55㎞를 남하해 미탄면에 들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촬영장, 백룡동굴 등 미탄면의 명소를 제쳐 두고 청옥산(1256m)에 올랐다. 산 정상부에 있는 고랭지 밭 ‘육백마지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정상까지 왕복 2차선 포장도로가 잘 나 있었다.

봉평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약 50분. 금당계곡을 지나 청옥산 자락에 들어섰다. 꼬부랑 산길을 달려 8부 능선에 닿았을 즈음, 길 오른편 자락으로 하얀 옷을 빼입은 자작나무 군락이 드러났다. 당장 차를 세우고 숲으로 들어갔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자작나무 수백 그루가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희뿌연 배경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산림청에서 10여 년 전 조성한 숲으로,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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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옥산 전망대에서 펼쳐진 장관. 능선을 따라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있다.

다시 차에 올랐다. 정상이 가까워 오니 지난 1월 가동을 시작했다는 풍력발전기가 하나 둘 보였다. 그리고 푸른 밭에서 바쁘게 일손을 놀리는 농부들이 보였다. 고도를 확인했다. 1200m. 구름 위 푸른 밭이 풍력발전기와 어우러진 장면이 기묘했다.

청옥산 정상부가 바로 육백마지기다. 백두대간의 우람한 산줄기에 어울리지 않는 완만한 구릉지대다. 육백마지기란 ‘볍씨 600말을 뿌릴 수 있는 넉넉한 땅’이라는 뜻으로, 약 30만㎡에 달한다. 예부터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고 산나물을 캐던 땅이다. 평창군 미탄면에 전해오는 ‘평창아라리’의 가사에도 육백마지기 화전민의 애환이 서려 있다. “재작년 봄철이 또다시 돌아왔는지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주기가 또 올라오네.”

상공에서 내려다 본 육백마지기 무 수확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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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뒷산, 그러니까 청옥산에 변화가 찾아온 건 1960년대부터다. 마침 비닐하우스 앞에서 만난 차용담(82)씨가 육백마지기 내력에 대해 들려줬다. “60년대에 미군이 준 양곡을 받아 감자·배추·무 농사를 시작했지요. 그때만 해도 60가구가 살았고,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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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마지기에서는 수익성 높은 작물을 재배한다. 하우스에 만개한 수국.

이제 3가구만 남은 육백마지기에서는 유기농 무와 호밀·삼채·시금치 등을 키운다. 배추가 주 작물인 강원도의 다른 고랭지 채소밭과 달리 수익성 높은 작물만 골라서 재배한다. 무 농사를 짓는 이해극(65)씨는 “육백마지기는 대관령보다 해발 고도가 400m 높아 훨씬 선선하고 토질도 좋아 극상품 채소가 잘 자란다”고 설명했다. 차용담씨와 아들 재호씨는 올해 수국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수국은 보통 6∼7월에 피지만 서늘한 육백마지기에서는 9∼11월 핀다.

푸른 슬로프에서 즐기는 레포츠

가을이 되면 스키 리조트는 레포츠 테마파크로 변신한다. 피서철도 아니고 스키 시즌도 아니어서 리조트의 온갖 즐길 거리를 여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 봉평면의 휘닉스파크에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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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닉스파크에 조성된 웰니스숲길. 해설사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이 주말에 운영된다.

이 계절 휘닉스파크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재미는 ‘걷기’다. 리조트 안에 누구든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트레일 ‘웰니스 숲길’이 있다. 모두 3코스로 이뤄져 있는데 1코스가 가장 인기다. 해발 700∼800m에 형성된 2.6㎞ 길이의 완만한 트레일로, 왕복을 해도 2시간이면 다 걸을 수 있다. 스키장 정상 몽블랑(1050m)까지 이어진 3코스(2.5㎞)는 곤돌라를 타고 정상을 오른 뒤 걸어서 내려오는 사람이 많다.

지난 6일 최호규(53) 숲해설사와 함께 1코스를 걸어봤다. 콘도 건물 뒷길로 접어들자 도심의 아담한 뒷동산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나 20분쯤 걸어 들어가니 눈앞에서 모든 인공적인 것이 싹 사라졌다. 대신 며느리밥풀꽃·물봉선·도둑놈의갈고리 등 야생화가 만발한 풍광이 드러났다. 숲길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숲 이야기를 들었다.

“웰니스 숲길은 단순히 등산을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삼림욕을 즐기며 사람과 숲의 어울림에 대해 생각해보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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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가 꺼끌꺼끌한 속새. 웰니스숲길 1코스에 속새 군락지가 있다.

낙엽송·잎갈나무 등이 우거진 침엽수 군락지에 이어 속새 군락지와 자작나무 군락지가 차례로 나타났다.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계곡은 없었지만 이따금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리조트 뒷산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 희귀한 식생이 어우러진 강원도 산골의 깊은 숲이었다.

리조트로 돌아온 뒤에는 4륜 바이크, 즉 ATV를 탔다. ATV 교육장을 다섯 바퀴 돈 뒤 인솔자를 따라 슬로프에 올랐다. 사람 키 높이까지 자란 풀을 헤치며 슬로프를 질주하는 건 설원을 활강하는 것과 또 다른 재미였다. ATV는 힘이 좋아 가파른 경사와 울퉁불퉁한 돌길도 거침없이 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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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닉스파크에서 즐기는 짚라인.

반면에 짚라인은 짧은 순간 극도의 쾌감을 선사했다. 휘닉스파크 펭귄 슬로프에 있는 짚라인 ‘플라잉짚’은 두 코스로 이뤄졌다. 330m 길이의 스카이 코스를 약 10초 만에 주파한 뒤, 암벽 등반·터널 통과 등 장애물 놀이시설을 즐긴 다음 220m 길이의 휘닉스 코스를 또 10초 만에 주파하면 마무리된다. 장비를 착용하고 안전교육을 받는 시간까지 약 30분이 소요되지만, 줄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시간은 20여 초에 불과했다. 남이 타는 걸 구경할 때는 시큰둥했지만 직접 타보니 연방 비명이 터졌다. 줄타기 놀이가 이렇게 짜릿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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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루식당 메밀국수. 된장국물에 뭉근하게 끓여내 구수하다.

●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pp.co.kr)까지는 176㎞ 거리다. 자동차로 약 2시간 30분 걸린다. 숲해설사와 함께하는 웰니스 숲길 걷기는 무료다. 주말 오전에 진행되며 전화로 예약해야 한다. ATV와 짚라인은 11월 초까지 운영되며, 매주 월요일 쉰다. ATV 1시간 3만원. 짚라인 풀 코스 2만2000원. 1588-2828. 이효석 문학의 숲 입장료 2000원, 무이예술관 입장료 3000원.
봉평면에서는 막국수를 먹어봐야 한다. 물막국수(6000원)·비빔막국수(7000원) 외에도 다채로운 메밀 요리를 내는 미가연을 추천한다. 033-335-8805. 미탄면에서는 고마루식당이 향토 음식 전문점으로 유명하다. 메밀국죽(5000원)과 손칼국수(5000원)가 별미다. 033-332-2470.

글=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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