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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름기행] 설문대할망이 깔고 누웠던 서귀포의 한라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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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오름기행 ⑫ 고근산

고근산 정상 분화구 둘레길에서 바라본 한라산. 제주올레 7-1코스가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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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산(孤根山)은 말하자면 서귀포의 한라산이다. 일제가 오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수많은 오름이 ‘산(山)’이 되었다지만, 고근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산으로 불렸다. 홀로 서 있다는 뜻의 이름처럼 주변을 압도하는 풍채 덕분이거니와, 서귀포 사람에게 고근산은 한라산처럼 신의 영역이었다. 서귀포항과 바투 붙어 있는 삼매봉(153m)에 서귀포 사람의 애환이 어려 있다면, 고근산에는 서귀포 사람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던 성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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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산은 크다. 둘레 4321m로 서귀포시에 있는 오름 중에서 가장 크다. 제주도에서도 6번째로 큰 오름이다. 해발고도가 396m이고 비고가 171m이니, 고근산은 크고 높은 산이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달린 한라산 남쪽 자락이 서귀포에 다다르기 전에 한 번 힘차게 용틀임을 한 것처럼 고근산은 서귀포 앞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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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환포구에서 올려다본 고근산과 한라산. 두 산의 실루엣이 어미가 아기를 품은 것처럼 겹쳐진다. 옛날의 고근산은 서귀포 사람에게 한라산처럼 신성한 산이었다.

고근산은 이름처럼 외로운 오름이지만, 한라산 자락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고근산은 제주도를 창조한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내려오는 몇 안 되는 오름이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이 치마에 흙을 날라다 쌓은 것이 한라산이고 할망이 한라산을 쌓다가 흘린 흙이 오름이 됐다지만, 개별 오름에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얽혀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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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귀포시 전경. 멀리 보이는 섬이 범섬이다.

전설에 따르면 설문대할망은 이따금 한라산 정상을 베개 삼고 쉬었다. 고근산 정상의 굼부리(분화구)에 엉덩이를 얹었고, 서귀포 앞바다 범섬에 발을 걸치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둘레가 약 700m에 이르는 고근산 굼부리는 실제로 움푹 패 있고, 범섬 해안절벽에는 동굴 2개가 나 있다. 움푹 팬 웅덩이가 할망이 엉덩이를 걸쳤던 곳이고, 해안동굴 2곳은 할망이 발가락를 끼웠던 곳이란다. 한라산에서 범섬까지 설문대할망이 누웠을 법한 자리가 서귀포 동쪽 내륙의 살오름(568m) 정상에 오르면 훤히 드러난다. 고근산에서 한라산 정상까지는 약 10㎞에 이르고, 고근산에서 범섬까지는 약 5㎞ 거리다. 한라산에서 고근산을 거쳐 범섬까지 거의 직선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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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웠을 때 발을 걸쳤다는 섬. 해안절벽에 할망이 발가락을 끼워서 생겼다는 동굴 2개가 있다.

설문대할망의 전설을 간직한 오름이어서인지 고근산 자락에는 범삼치 않은 이야기가 여럿 깃들어 있다. 우선 고근산 자락에는 무덤이 없다. 제주 오름에는 대부분 산담 두른 무덤이 들어앉아 있다. 마을 공동묘지로 쓰이는 오름도 허다하다. 그러나 고근산은 서귀포시 예래동의 군산과 더불어 예부터 ‘금장지(禁葬地)’였다. 금장지에 묘를 쓰면 오름 아래 마을에 가문이 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지금은 굼부리 아래로 내려갈 수 없지만 군부리 안쪽에서는 나침반이 작동을 멈춘다고 한다. 설문대할망의 엉덩이를 받치던 땅이니 이 정도 기운은 갖춰야 하나 보다. 고근산 남쪽 자락 ‘머흔저리’라는 너럭바위에 곡배단(哭拜壇)을 세워 국상이 나면 절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나같이 고근산의 신성한 기운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에는 고근산을 경계로 정의현과 대정현이 갈라졌다.

고근산 오르는 길. 의외로 숲이 깊어 숲길에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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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 옛날 얘기다. 지금의 고근산은 서귀포 시민의 휴양지이자 산책로다. 고근산이 들어선 자리가 서호동 1286-1번지 일대다. 지도에서 보면 서귀포 신시가지 위쪽이다. 현재 서귀포에서 가장 개발이 활발한 지역으로, 땅값도 제일 비싸다. 하루가 다르게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신도시의 주민이 소일 삼아 드나드는 뒷산이 오늘의 고근산이다.

고근산 정상의 전망은 시원하다. 북쪽을 바라보면 한라산이 눈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남쪽으로는 서귀포의 랜드마크 월드컵 경기장이 발아래 놓여 있다. 월드컵 경기장 너머로는 법환포구와 범섬이 차례로 보인다. 법환포구에서는 반대로 고근산이 한라산의 실루엣과 겹쳐져 보인다. 꼭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다. 반면에 서귀포 항구 쪽, 그러니까 서귀포 구시가지는 고근산 정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고근산 정상만큼 서귀포 전경이 잘 내다보이는 곳도 없다고 하지만, 고근산에서 구시가지는 너무 왼쪽에 치우쳐 있다. 외려 살오름 정상의 전망이 서귀포 전경을 훨씬 넓게 담아낸다.

대신 서귀포 앞바다에 나란히 떠 있는 세 개 섬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부터 섶섬, 문섬, 범섬이다. 이 세 섬에도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슴을 보고 활을 쐈는데 잘못해서 설문대할망의 엉덩이를 건들고 말았다(옥황상제의 엉덩이라는 주장도 있다). 화가 난 설문대할망이 한라산 봉우리를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서 남쪽으로 던졌는데, 봉우리가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됐다. 설문대할망이 던진 봉우리는 위쪽부터 섶섬, 문섬, 범섬으로 쪼개져 서귀포 앞바다에 박혔다고 한다. 이 세 섬을 차례로 포개면 정말로 삼각형의 봉우리 모양이 된다(산방산이 한라산의 뽑힌 봉우리라는 전설도 있다).

 섶섬은 보목포구의 제지기오름 편에서, 범섬은 예래동의 군산 편에서 각각 소개한 바 있다. 섶섬과 범섬 사이의 문섬은 스킨스쿠버의 성지로 통하는 곳이다. 섶섬·문섬과 달리 범섬은 중요한 역사적 현장이다. 1374년 최영 장군이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 목호(牧胡)의 반란을 진압한 최후의 격전지다. 언뜻 보면 외세를 물리친 승전지지만, 제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는 원나라의 직할지였던 제주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제주도에서 기르던 원나라 말 2000필을 고려에 요구한다.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를 받들었지만 제주도의 목호가 거부했다. 이에 공민왕이 최영 장군에게 목호 토벌을 명령했고, 최영 장군은 병사 2만5600명을 이끌고 제주로 내려와 목호를 섬멸했다. 여기까지가 공식 기록이다.

서귀포 신시가지에서 바라본 고근산. 지금의 고근산은 서귀포 시민의 휴식처이자 산책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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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당시 제주도는, 그러니까 탐라는 이미 100년 동안 원나라의 직할지였다. 점령지 통치관 ‘다루가치’가 직접 관할하는 원나라의 14개 국영목장 중 1곳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군과 전쟁을 치르던 시절 목호 대부분은 이미 제주 여자와 결혼을 했거나 제주 여자에게서 태어난 제주 사람이었다. 제주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나 몽골이나 요즘 말로 외부 세력이었다. 고려 정부는 몽골의 잔당을 몰아냈다고 환호했겠지만, 고려군이 죽인 사람 대부분은 사실 제주도 사람이었다.

고근산은 정상까지 탐방로가 잘 돼 있어 20분이면 정상에 오른다. 나무 계단 900개가 숲 사이로 나 있다. 오름 치고는 흔치 않게 소나무가 많고, 정상에도 삼나무ㆍ편백나무가 조림돼 있어 숲이 꽤 그윽하다. 군부리 둘레를 따라 600m 길이의 탐방로도 조성돼 있다. 굼부리를 한 바퀴 다 돌고 내려와도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제주올레 7-1코스가 고근산을 올랐다가 내려온다.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귀포칠십리축제가 자구리공원 일대에서 열린다. 사진은 자구리공원 해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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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정보=서귀포 대표 축제인 ‘서귀포칠십리축제’가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귀포시 자구리공원과 칠십리음식특화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대표 프로그램 ‘칠십리 퍼레이드’에 제주도민은 물론이고 관광객도 참여할 수 있다. 1개 팀 10명 이상이면 신청 가능. 축제 홈페이지(i70ni.com)에서 접수. 서귀포시 관광진흥과 064-760-3946.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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