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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야 진짜인 송로버섯, 더울 때 식탁에 올린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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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쉐린 별 3개 딴 스타 셰프 가니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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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는 “미쉐린 별을 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이 되는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5층의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는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유지하고 있는 파리 ‘피에르 가니에르’의 레스토랑이다. 가니에르(66) 셰프가 줄곧 주방을 지키진 않지만 정기적으로 내한해 레시피를 점검하고 주방 인력을 재교육한다. 연 2회는 꼭 갈라 디너를 마련해 직접 손님을 맞는다. 지난달 21~24일에도 가니에르의 갈라 런치&디너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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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트러플 슬라이스가 가미된 시금치 퓨레와 수란 그라탕(왼쪽)과 바삭하게 구운 렌틸 칩(chip).

2009년 ‘피에르 가니에르’가 서울에 문을 연 이후 갈라 디너를 처음 선보였을 때는 1인당 100만에 육박하는 고가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번 갈라는 좀 다른 이유로 여러 미식가들 입에 오르내렸다. 바로 한여름의 트러플 코스다. 송로버섯이라고도 하는 트러플은 최근 청와대의 여당 지도부 오찬 때 논란이 됐던 호화 식재료인데, 강한 풍미 때문에 슬라이스 가루로 만들어 향신료처럼 쓴다. 이번 갈라에선 웰컴 디쉬(식당 측에서 환영의 의미로 제공하는 한입 요리)인 ‘트러플 크로크 무슈’를 시작으로 오르되브르(전채)와 메인, 디저트 등 총 5가지 코스메뉴에 모두 호주산 블랙트러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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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피에르 가니에르의 디저트를 트러플 코스에 맞춰 냈다. 트러플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헤이즐넛 쿠키 크럼블. ② 사잘게 자른 샐러리악과 제주산랑구스틴(딱새우), 판체타(이탈리아식 베이컨)와 함께 트러플 슬라이스를 곁들인 전복 요리. ③ 러플 초콜릿, 머랭과 트러플 크림, 트러플 다쿠아즈 위에 트러플 크림을 얹고 그 위에 양송이 버섯을 놓은 프티 푸(커피·차 등과 함께 나오는 과자들).

이번 갈라에서 1인당 제공한 트러플 양은 약 50g 정도로 전체 식재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4분의 1이나 됐다고 한다. 그런데 화제가 된 건 트러플의 양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여름, 그리고 호주산이라는 점이 주목을 받았다. 트러플은 겨울에 최상품이 나오기에 파인 다이닝에서는 보통 겨울에 트러플을 주재료로 한 요리를 내놓는다. 그런데 가니에르는 왜 한여름에, 그것도 최고라고 알려진 프랑스산도 아닌 호주산을 내놓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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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디쉬로 내놓은 트러플 크로크 무슈. 이번 코스요리에 쓰인 블랙 트러플은 전량 호주산으로 남반구인 호주에선 여름에 최상품이 나온다.

의문을 안고 지난달 22일 점심시간 직전 레스토랑을 찾았다. 백발의 셰프는 주방과 홀을 오가며 연신 분주한 모습이었다. 주방에선 한치 오차 없는 손놀림을 요구하며 흰색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홀 손님들을 만나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연신 사진 촬영에 응해줬다.

-왜 한여름에 트러플 풀코스를 계획했나.

“이번에 사용한 건 호주산이다.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지금이 겨울이라 최상의 상품이 나온다. 프랑스산에 못지 않은 최상의 질에 만족했다. 아예 트러플만으로만 코스를 하면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았다.”

-어떤 특별한 경험을 말하는가.

“우리의 목표는 감정(emotion)을 불어넣는 거다. 일종의 쇼라고 할까. 식당을 떠날 때 손님들에게 남는 것은 오직 기억(memories)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시간을 멈춘 채 가족이나 파트너와 친밀감을 느끼는 것. 그 감정, 노스탤지어가 음식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당신이 음식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다니.

“음식은 그 경험에 기여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떤 남자가 어린 딸과 함께 왔는데, 떠나면서 ‘딸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했다’고 인사를 해왔다. 부녀간에 잊지 못할 시간을 만들었다고. 내 일이란 게 그렇게 관계 속에 부드러움, 감정, 고요함을 불어넣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 생생한 기억이 영원히 남듯이. 예컨대 트러플이 어떤 휴머니티로 전달되느냐가 중요하다. 접시에 표현된 트러플이 환상적으로 맛있는 느낌과 감각을 가져다준다면 더 특별하지 않겠나.”

-모든 메뉴에 트러플을 넣으면 자칫 물릴 수 있지 않을까.

“(뒤적여 공책을 꺼내 보여주며) 나는 일생을 레시피를 쓰는 데 바쳤다. 많은 시간을 새 메뉴를 상상하는 데 쓴다. 요리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고요해지는 것, 그리고 현재 위치한 지역과 나의 팀과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다. 나는 주방 사람들과 이 재료를 통해 어떤 질감을, 어떤 영혼을 전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또 이곳의 식재료를 존중한다. 그래서 이번 메뉴에도 트러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재료가 한국산이다.”

실제로 이번 코스엔 제주산 돼지와 랑구스틴(딱새우), 꿩 등 모든 재료가 국산으로 쓰였다. 가니에르는 오미자·멍게·키조개·꽃게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재료도 자주 활용한다. “새 메뉴를 기획할 때 한국산 식재료를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0년간 요리사로서 또 미쉐린 스타로서 이런 성과를 이룬 비결이 뭔가.

“내 일에 정직하려고, 집중하려고 했다. 내게 이 일은 더 강해지거나 더 커지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언가를 할 때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을 위해서다. 기자로서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 역시 내 일을 사랑하고, 내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 물론 이것도 비즈니스니까 쉽지 않다. 핵심은 손님들과 진실한 관계를 쌓는 것이다.”

실제 가니에르에겐 부산에서 매달 두세차례 KTX를 타고 올라와 식사하는 손님, 매 시즌 바뀌는 메뉴를 예약하는 가족 등 열성 팬이 상당하다. 이번 트러플코스 때도 아낌없이 즐겼다는 서승범(카레이서)씨는 “정교하게 계산된 음식이 한편의 오케스트라 같다. 편안하면서도 한치 오차 없는 서비스는 완벽한 팀워크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얘기하고 투자한다.

“음식은 당신에 대한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음식을 둘러싼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음식 질에 신경 안 쓰고 그냥 먹는 것은 문화적인 재앙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지를 잊었다. 시간을 들이고 나누는 법을. 무언가를 먹을 땐 시간을 들여야 한다. 컴퓨터 앞에서 허겁지겁 먹는 것은 재난이다. 먹는 시간은 너 자신을 위한 시간이고, 감정을 나누고 토론을 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인데.”

-올 11월에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이 나온다.

“빅뉴스다. 좋은 점은 식당 간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란 것. 나쁜 점 역시 경쟁이 치열해질 거란 사실이다. 나는 미쉐린 가이드 팬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게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세계를 여행하며 요리를 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들을 위해, 별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내 선을 지키고, 나 자신이 되는 게(stay to myself) 가장 중요하다. 한국인 셰프 중에도 별 한 개, 두 개 받는 이가 나올 것이다. 어떤 레스토랑은 그걸로 보상을 받겠지만, 일부는 뛰어난데도 운 없이 간과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지금 별을 따고 5~6년 뒤에 추락할 수도 있다. 별이 있든 없든 다시 네 일을 재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너 자신을 위해 일해야 한다. 재능이 있다 해도 일해야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일한다는 것은 집중하는 것, 너 자신으로 남는 것이다. 내가 별을 땄을 땐 인터넷도 없었고, 명성은 시간과 함께 쌓여갔다. 지금은 클릭 한번이면 다 알려진다. 너무 빠르다. 서른살은 연약하고 젊다. 재능은 있다 해도 그 단계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쉽지 않다. 요즘 셰프는 배우이자 가수 같은 존재다. 이젠 쇼비즈니스다. 중요한 것은 휴머니티를 잃지 않고 일에 쏟아붓는 것이다. 팀과 함께 에너지와 열정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게 음식으로 손님에게 전달되니까.”

글=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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