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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로봇 입고 성큼성큼…하반신 마비 20년 만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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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병욱(42·지체장애 1급)씨는 로봇에 올라타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신수동 서강대 체육관에서다. 1997년 뺑소니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완전마비된 지 20년 만이다. 김씨는 “척수 장애인의 바람은 두 다리로 곧게 서서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선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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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욱씨가 지난 3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 체육관에서 로봇 ‘워크온’을 착용하고 훈련하고 있다. 김씨는 뺑소니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지 20년 만에 입는 로봇 덕분에 두 다리로 서서 걸었다. [사진 SG메카트로닉스팀]

김씨에게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가 이날 몸에 착용한 ‘입는 로봇’ 덕분이다. 로봇개발업체 SG메카트로닉스와 공경철 서강대 기계공학과 교수 연구팀, 신촌세브란스재활병원의 나동욱 교수팀이 함께 개발했다. 김씨는 이날 실제로 로봇을 몸에 꼭 맞게 착용했다. 그런 다음 특수 목발(클러치)에 있는 단추를 눌러 가슴 앞에 달린 모니터의 ‘일어서기’ 모드를 선택했다. 그러자 “지잉” 하는 소리가 났다. 김씨가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양팔로 짚은 특수 목발 덕분이다. 목발을 이용해 한발 한발 뗄 수 있었다. 지그재그로 장애물을 통과하기도 했고, 징검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땐 “히얍” 하고 기합을 넣기도 했다. 서고, 걷고, 건너는 데 소요된 시간은 9분50여 초. 이 시간 동안 그의 몸은 장애를 딛고 자유로웠다.

국내 의료 로봇 어디까지 왔나
지그재그 걷고 징검다리도 건너

지난해 국내에서 김씨처럼 하반신 마비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1만2274명. 이들이 매년 부담하는 진료비는 835억원이다. 만일 김씨처럼 많은 사람이 로봇의 혜택을 본다면 누구든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김씨는 “처음 로봇에 올라서 로봇에 의지해 움직이려니 무서웠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어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첫걸음을 뗄 때만 해도 걷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3주 로봇과 호흡을 맞춘 뒤에는 일반인처럼 걸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씨가 이날 걷게 되기까지 6개월간 로봇을 조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는 “로봇으로 서서 운동하면서 소화기관과 관절 등 기능이 좋아졌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보조공학이 빠르게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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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 마비 장애인의 희망을 이뤄주기 위해 국내에선 약 10개 연구팀이 로봇 보조 보행훈련치료를 연구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공경철 교수 연구팀의 기술력은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송원경 국립재활원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은 “하반신 완전마비 장애인을 위한 로봇을 가장 먼저 상용화한 이스라엘·미국의 리워크나 미국 국적의 후발 주자 엑소의 기술보다 SG메카트로닉스팀의 기술력이 앞선다. 국내에도 곧 리워크의 제품을 들여올 예정인데, 해외 기술이 들어오면 국내 기술도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리워크나 엑소의 로봇은 판매가가 1억원 정도다.

SG메카트로닉스팀이 개발한 로봇은 대회 참가를 위해 특수 제작됐다. 다음달 8일 스위스에서 열리는 ‘사이배슬론(Cybathlon)’ 대회다. 사이배슬론은 인조인간을 뜻하는 사이보그(cyborg)와 경기를 뜻하는 라틴어 애슬론(athlon)의 합성어다. 장애인을 위한 보조공학 분야의 기술을 겨룬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 등의 주최로 올해 처음 열리는 이 대회는 ▶뇌-기계 인터페이스 ▶전기 자극 자전거 경주 ▶기능성 휠체어 ▶의족 ▶의수 ▶입는 로봇(엑소스켈레톤) 등 6개 종목으로 구성된다. 이 중 입는 로봇 종목에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SG메카트로닉스팀이 참가한다.

김씨가 입은 로봇을 상용화하려면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 20kg이나 되는 무게다. 상용화하려면 로봇의 경량화가 뒤따라야 한다. 안전성 검증도 필요하다. 이 로봇은 완전마비 장애인용으로 개발됐지만 일부 수정을 거치면 부분마비 장애인도 탈 수 있다. 공경철 교수는 “부분마비 장애인을 위한 로봇은 기술이 아예 달라 따로 개발된 상태다. 완전마비 장애인용 로봇과 다르게 착용감을 최대한 없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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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이미 세계 상위권이지만 실제 장애인이나 환자에게 적용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높다. 대한재활의학회는 2009년과 2014년 로봇 보조 보행훈련치료와 관련해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 신의료기술 평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기존 치료와 다르지 않다는 이유로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현재 치료용 로봇으로 재활훈련을 받으면 재활보행수가가 1만원에서 1만5000원 정도 지급된다. 물리치료사에게서 재활치료를 받을 때 나오는 치료수가와 같다. 로봇을 도입하는 데 많은 돈이 드는 병원은 차라리 치료사를 고용하는 게 낫다. 이 때문에 로봇을 두고 ‘그림의 떡’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나동욱 교수는 “앉아서만 생활하던 장애인이 일어나 움직이게 되면 뼈와 관절이 튼튼해지고 심장·콩팥·폐 기능이 좋아진다. 그러나 더 좋은 기술이 개발돼 제품이 나오더라도 환자가 실제로 치료받을 수 있으려면 수가 인정 등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영지 기자 vivi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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