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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정치가 쏘아올린 난장이의 작은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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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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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추석 연휴에 오래된 책들을 읽었다. 38년 전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이다. 그 시절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던 난장이네 가족의 이야기다.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 접속어 없이 단문으로 이어지는 함축미와 힘이 대단했다. “산업화 시대의 어두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뚜렷한 주제의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란 평가가 어색하지 않다.

‘최저임금≠빈곤정책’의 시대
가계소득에 더 초점 맞춰야

 소설은 “세 아이가 공장에 나가 일하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저임금 때문이다. 난장이의 아들딸이 한 시간에 100원을 벌 때 일본의 근로자는 698원, 서독의 근로자는 856원, 미국의 근로자는 1043원, 노르웨이의 근로자는 1087원을 번다”고 했다. 이들은 지옥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다 쓰러진다. 난장이는 공장 굴뚝에서 자살하고, 노조활동을 하던 큰아들은 살인을 저지른다.

 오늘은 어떨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한 시간에 100원(시간당 실질임금)을 벌 때 일본의 근로자는 132원, 독일과 미국의 근로자는 209원, 노르웨이의 근로자는 228원을 버는 세상이 됐다. 한국이 엄청난 속도로 쫓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난장이 마을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 머문다”는 유토피아에 가까워졌을까. 아닌 듯싶다. 여전히 대통령은 “헬조선이라는 잘못된 자기비하가 문제”라 하고, 야당은 “대통령이 국뽕(국가+히로뽕의 합성어)에 빠졌다”며 비난한다.

 여야 정치인들부터 ‘난쏘공’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다. 지금 누가 난장이인지도 잘 분간하지 못한다. 이미 10%의 공기업과 대기업 정규직의 평균임금은 일본을 뛰어넘었다. 난장이가 아니라 거인이다. 문제는 90%의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이다. 여전히 약한 보호와 낮은 보상의 이 시대 난장이들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방하남 노동연구원장은 “낡은 노사관계로는 풀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산업화 시대의 노사관계가 급속히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와 소사장제 확산으로 누가 고용주이고 누가 피고용인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또 한국은 로봇밀도(제조업 근로자 1만 명당 로봇수)가 437대로 세계 1위다(일본은 323대). 근로자들이 로봇과 힘든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정치권이 엉뚱한 곳으로 공을 차는 것도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급 1만원의 최저임금 공약이다. 여야는 사회정의 차원에서 더 올리지 못해 안달이다. 하지만 윤희숙 KDI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근로자 중 실제 빈곤층은 30%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미 남성 가구주 혼자 버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윤 위원은 “빈곤 완화에는 최저임금 인상보다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근로의욕을 훼손하지 않는 근로장려세제(EITC) 지원이 보다 효과적”이라 강조한다. 빈곤정책의 수단으로 최저임금보다 빈곤층의 직업훈련과 가족들의 취업 지원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더 많은 부가가치가 가계로 환류되도록 근로소득 비중을 올리는 게 맞다. 대기업이 일정하게 양보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 부가가치가 거인들보다 난장이네 가계에 보다 많이 흘러가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올해 최저임금이 7.3% 올랐지만 이 땅에 사랑과 행복이 넘쳐날지는 의문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아르바이트’ 임금은 7.4% 올랐다. 하지만 그 후폭풍으로 계약직인 기간제노동자(-1.2%), 파견노동자(-3.9%), 건설현장 인부(-1.4%)의 시간당 임금 총액은 모두 줄었다. 중소기업·자영업체들이 생존을 위해 차상위 비정규직의 임금을 깎아버린 것이다. 이제 정치권이 누가 난장이인지부터 제대로 가리고, 어느 쪽으로 공을 쏘아올릴지 고민했으면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 소설 말미에 영희가 큰오빠에게 죽여버리라는 “아버지를 난장이라 부르는 악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