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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참모 천씨 형제, 장제스 군권 장악 일등공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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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8면

1 1928년 2월 2일, 중앙군사위원 위유런(于右任·앞줄 왼쪽 여섯째) 등 국민당 원로들의 추대로 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한 장제스(앞줄 왼쪽 여덟째). 둘째 줄 왼쪽 셋째가 천커푸.

자질 갖춘 통치자에게 강력한 힘을 안겨주는 사람은 명참모 소리를 들었다. 천커푸(陳果夫·진과부)와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명참모였다. 감찰위원 자격으로 국민당 중앙 조직부를 장악한 천커푸는 반공인사들을 장시(江西)·저장(浙江)·윈난(雲南)·상하이(上海)의 지구당에 파견했다. “공산당과 결별할 날이 멀지 않았다. 반공을 준비해라.” 공산당원이 많은 지역은 책임자를 광저우(廣州)로 불렀다. 직접 설득에 나섰다. 효과가 있었다.


여론은 장제스에게 불리했다. 장제스는 광저우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천리푸를 불렀다. “광저우는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 상하이로 가겠다.” 부두로 향하는 장제스의 승용차에 천리푸도 동승했다. 창 밖만 내다보던 천리푸가 침묵을 깼다. “상하이가 아니면 대사를 이룰 수 없나요?” 장제스가 반문했다. “나는 너무 젊다. 원로들에게 어린애 취급 당한다. 고견이 있으면 말해봐라.”


천리푸는 차분했다. “광저우를 떠날 이유가 없다. 왜 현실을 피하려고 하는가? 국민정부에서 가장 막강한 제1군 3개 사단이 교장의 수중에 있다. 나머지 7개 군은 별게 아니다. 현재 교장은 광저우 위수사령관까지 겸하고 있다. 지금은 평화시대가 아니다. 난세에는 군을 장악한 자가 천하에 군림한다.”


장제스는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를 의식했다. “누가 뭐래도 정부 주석은 그 사람이다.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 안달을 한다. 맞설 방법이 없다.” 천리푸는 동의하지 않았다. “주석은 서생 기질이 강한 사람이다. 여자 앞이라면 모를까, 간이 콩알만 하고 우유부단하다. 소련 고문들도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소련인들은 우리의 북벌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와있다. 현재 북벌군을 지휘할 사람이 교장 외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주석이 교장을 내치려는 계획에 동의할 리가 없다.”


듣고만 있던 장제스가 공산당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천리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공산당원들은 목소리가 크고 선동에 능하다. 총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는 타협을 할 줄 모른다. 정치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다. 다루기 쉽다.”


차가 부두에 닿았다. 장제스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천리푸는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그 날을 잊지 못했다. “음산한 날씨였다. 창밖에 보슬비가 내렸다. 교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동도 안 했다. 교장은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공관으로 돌아가자며 기지개를 폈다. 침묵을 깬 시원한 몸놀림이 혁명의 분수령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제스가 천리푸에게 한마디 했다. “네 스물일곱 번째 생일은 내가 차려주마.”


교장공관으로 돌아온 장제스는 2층으로 직행했다. 밑에서 기다리던 천리푸는 식은 땀이 났다. “새 군복에 권총을 찬 교장이 계단을 내려왔다. 눈에 살기가 있었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교장이 광저우를 떠나거나 남을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그날 상하이로 갔다면, 눈에 살기가 번득거리지 않았다면, 1926년 이후의 중국 역사책은 다시 써야 한다.”


천씨 형제는 군사정변을 준비했다. 우선 공산당에 불리한 소문을 퍼뜨렸다. “공산당이 폭동을 준비 중이다. 국민정부를 무너뜨리고 농민과 노동자 정부를 세우려 한다.”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도 모함했다. “공산당에 입당했다. 군권을 쥐고 있는 장제스 제거 공작에 착수했다. 황푸군관학교 교비를 횡령한 부패분자로 몰 계획이다.” 천리푸의 이름도 빠지지 않았다. “장제스와 천리푸가 잠적했다. 목적지는 소련이다.” “천커푸와 천리푸는 공산당 비밀당원이다. 국민정부의 공산주의 선포가 멀지 않았다.” 사유재산을 몰수한다는 소식도 순식간에 퍼졌다. 광저우 시민들은 뭐가 맞는지 판단이 불가능했다.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2 1928년 5월, 국민당 제1군이 베이징 인근 바오딩(保定)을 점령하자 북양정부는 경악했다. 천리푸(왼쪽 둘째)도 북벌군 총사령부 특별당부 상무위원 자격으로 참전했다. 1928년 5월 28일, 바오딩. [사진 김명호 제공]

1927년 4월 2일, 천커푸는 국민당 원로들을 내세워 공산당 탄핵안을 제출했다. 일주일 후에는 원로 우츠후이(吳稚暉·오치휘) 등과 연명으로 공산당을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4월 12일 장제스가 공산당 숙청(淸黨)을 이유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우한(武漢)은 왕징웨이와 공산당 세력이 강했다. 표어가 난무했다. “장제스 타도” “구렁이 장징장(張靜江·장정강)을 몰아내자” “천커푸와 천리푸를 내쫓아라”


정변에 성공한 장제스는 일보 후퇴했다. 하야 성명을 내고 상하이로 떠났다. 천씨 형제는 장제스의 화려한 복귀를 준비했다. 상하이에 중앙구락부(中央俱樂部)을 발족시킨 후 장제스 옹립 세력을 규합했다. 1927년 12월,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장제스는 일단 거절했다. 새해가 되자 원로들이 상하이까지 와서 장제스를 독촉했다.


국민당 군정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조직부장을 겸했다. 부부장에 천커푸를 임명했다. 천씨 형제는 국민당 개조에 나섰다.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들을 내쫓고 당의 면모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중앙선전부장 대리 마오쩌둥도 장제스의 측근으로 교체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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