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 리포트] 뉴욕 쿠바인과의 대화-쿠바혁명은 왜 실패했을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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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고통 느껴… 지혜롭게 몰락한 쿠바에 아직 희망은 있다!

쿠바가 반 세기 동안 숭상했던 ‘혁명’의 수치스러운 패배다. 혁명은 무엇인가? 이제는 누구도 답할 수 없다. 맹목적으로 달리다가 자멸한 상황. 이것이 아바나- 뉴요커들이 기억하는 ‘쿠바’다. 이들은 여전히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 ‘혁명’의 그림자를 뽑아내기 위한 싸움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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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아바나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모니카가 열세 살 난 아들 세바스찬과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뉴욕은 이야기의 재래시장 같다.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말을 걸어보라. 운만 좋다면 지극히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꼬맹이의 입에서 ‘쎈’ 사연을 술술 들을 수 있다.(사진작가 브랜던 스탠턴이 이 방법으로 불후의 베스트셀러 <휴먼즈 오브 뉴욕>을 출간했다) 길을 떠날 때 삶은 이야기가 된다.

“지식인들은 혁명의 진실 말하지 않았다”

토박이 뉴요커는 고국을 떠나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혹은 그 후예들이다. 그러니 스토리가 없고 배기겠는가? 길을 떠나기까지의 이야기, 떠난 후 고생한 이야기, 다시 떠나고 싶은 이야기가 팔딱팔딱 살아 있다.

몇 달 전 <월간중앙>으로부터 뉴욕에 사는 쿠바인을 인터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은 “재미있겠다”였다. 좋은 신호다. 글을 쓰든 이야기를 듣든 일단 흥이 나야 생생해진다.

쿠바가 세계에서 왕따당한 후 그 간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뉴욕에서 쿠바인만큼 고립무원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버텨온 사람들은 없다. 이 현장에는 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렇지만 인터뷰 질문을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걱정이 앞섰다.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듣는 이가 잘 들어야 한다. 헌데 내가 쿠바에 너무 무식했다. 작년 말 오바마가 쿠바를 테러 블랙리스트에서 제외시켰고, 그제야 잊히다시피 했던 쿠바가 다시 ‘핫’해졌다.

덩달아 쿠바 관련 검색어도 튀어 올랐다. 쿠바 관광, 쿠바 음식, 쿠바 담배…. 나 역시 쿠바인들의 애환을 ‘쿠바 인생’이라는 검색어 결과 수준에서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접점이 전혀 없는 삶과 삶을 솔직하게 연결하기. 이것은 성실한 ‘리스너’가 최종 관문에서 맞닥뜨리는 미션이다. 이에 비하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미션이 아니다. 기억을 둘러싼 진가(眞假) 논쟁이나 이분법적인 판단은 대부분 시간이 만들어내는 착시효과다. 시간은 흐른다.

쿠바인들이 떠난 고국은 변했고, 그들이 도착한 뉴욕은 호황과 불황을 반복했으며, 그들을 얽어맸던 혁명이라는 가치도 유통기한이 지났다. 그들의 ‘쿠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시간은 멈춘다. 그때 그 시절 쿠바인들의 심신을 강타했던 ‘쿠바’의 흔적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어긋난 시간 감각 때문에 혼선이 생긴다. 미 대선 샌더스 후보에게서 피델 카스트로의 슬로건을 겹쳐 들으면서 분노하는 쿠바인은 ‘꼴통 보수’인가? 향수병에 걸린 쿠바인이 묘사하는 쿠바는 ‘미화되고’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이름표’는 이미 죽은 언어다. 생생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을 듣는 것은 별을 보는 것과 닮았다. 몇 광년 떨어진 곳에서 별이 반짝 하고 한 번 빛나면 우리는 그 빛을 몇 년 후에야 보게 된다. 이때 빛이란 눈앞의 1초 현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진 않아도 몇 년 동안 애써서 우주 공간을 가로지른 입자의 운동도 포함된다. 기억도 그렇다. 모든 기억에는 ‘과거’에서 ‘오늘’에 도달하기까지의 독특한 운동이 있다.

그렇다면 날것의 기억에는 주체도, 세대도, 국적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저기’에서 ‘여기’로 떠밀려오는 사이, 그 길 위에서 ‘누군가’가 통과했던 사건의 강도만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 강도를 함께 체험하고 공감했는가. 이것이 좋은 리스너의 덕목일 것이다.


뉴욕과 쿠바는 정신적으로 극과 극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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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의 쿠바 대사관. 지난해 미국과 쿠바의 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미국 거주 쿠바인들의 상흔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이 인터뷰의 초점은 ‘길’을 더듬는 데에 있다. 지금 여기 뉴욕에서 쿠바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뉴욕의 시선에서 쿠바를 평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뉴욕에서 고생한 쿠바인들을 동정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쿠바에서 뉴욕까지, 그 사이의 여정을 따라가 보겠다는 것이다. 이 길은 고생스럽다.

뉴욕과 쿠바는 정신적으로 극과 극의 장소다. 쿠바가 공산주의를 여전히 고집한다면, 뉴욕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극대화한다. 쿠바가 배고픔 속에서도 자기 문화를 지켜왔다면, 뉴욕은 소비문화만 빼고 모든 문화를 해체한다.

쿠바가 ‘악의 축’의 그라운드 센터라면, 뉴욕은 ‘악의 축’에 희생당한 그라운드 제로다. 쿠바에서 뉴욕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이 이분법을 자기 식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쿠바에서 떠나는 뉴욕행. 이것은 쿠바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혁명’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는 모험이다. 어떤 길이 가능하냐고? 한 번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총 네 명이다. 뉴욕에 산다는 것 빼고는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국가 지원금으로 살아가는 70대 할머니, 백화점에서 광고물을 제작하는 40대 싱글맘, 커뮤니티 대학에서 중남미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유치원 선생님으로 성실히 살고 있는 전직 화가.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이야기를 시작하자 네 명의 동선이 겹쳐졌다. 이 사람들 모두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왔다. 게다가 아바나를 떠난 시기도 1990년대였다.

잠깐만 시대 배경을 훑어보자. 1990년대에 아바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40년간 쿠바인들과 애증의 관계를 맺었던 ‘혁명 이념’이 뇌사상태에 빠지게 된다. 혁명이고 나발이고, 일단 정권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 최소한의 마지노선도 무너진 것이다. 이 몰락의 신호는 소련의 해체였다.

90년대 전에도 쿠바 경제는 자주 휘청거렸지만, 소련의 전폭적인 원조로 간신히 맥을 이었다. 그런 보급처가 갑자기 망해버렸다.

“소련 붕괴로 원조가 없어지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쿠바는 소련을 모델로 한 조립식 주택을 건설해왔지만 거기에는 시멘트 제조에 따른 석유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했고, 석유는 부족했던 것이죠.”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 재인용) 쿠바의 경제 토대가 완전히 몰락했다. 그 순간,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했던 50년대의 구호가 다 빈 깡통이었음이 천하에 드러났다.

다른 동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 몰락은 아바나에 치명적이었다. 아바나는 이전부터 문제가 많은 도시였다. 예술가와 사상가가 가장 집약된 동네였지만, 독재 정부의 권력 아래에서 표현은 참 쉽게 억압되었다.

또, 쉽게 배고파지는 도시였다. 자발적으로 농작물을 키울 수 있고 물물교환을 할 수 있었던 시골과는 달리, 아바나의 시장은 정부에서 물자가 끊어지는 순간 곧바로 낭떠러지였다. 시골에 물자를 빼앗아 오거나 값비싼 해외 블랙마켓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 명의 쿠바인이 길을 떠나 ‘아바나-뉴요커’가 되었다.


반 세기 동안 숭상했던 ‘혁명’의 수치스러운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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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쿠바에 살던 시절의 소녀 모니카. 사진작가 치놀로페(Chinolope)가 찍어준 사진이다. / 2. 필자와 인터뷰 중인 레나. 뒤쪽 벽에는 쿠바에서 찍은 가족들 사진이 붙어 있다.

1990년, 아바나, 뉴욕. 이 동선이 그리는 지도는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쿠바의 모습이다. 그리고 쿠바가 반 세기 동안 숭상했던 ‘혁명’의 수치스러운 패배다. 혁명은 무엇인가? 이제는 누구도 답할 수 없다.

그것이 과연 존재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해서 질문하지 않은 채 맹목적으로 달리다가 자멸한 상황. 이것이 아바나-뉴요커들이 기억하는 (잊어버릴 수도 없는) ‘쿠바’다. 이들에게 쿠바에서 뉴욕으로 가는 길은 자기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 ‘혁명’의 그림자를 뽑아내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첫 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레나였다. 레나는 렉싱턴 에비뉴의 공공 요양원 아파트에 사는 70대 노인이다. 거동도 불편하고, 영어도 잘 안 된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평범한 남미 할머니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등등 온갖 철학책과 역사책을 섭렵한 좌파 이론가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레나는 ‘희망과 좋은 의도로 가득 찼던’ 청소년이었다. 즉, 그의 인생은 쿠바 혁명과 생장소멸(生長消滅)의 궤적을 정확히 함께 밟고 있다. 이야기는 1990년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나는 대지주의 딸이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가족들은 모두 혁명에 동조했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모두 몰수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 그 당시 레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레나는 혁명군에 지원했고, 거기서 평생의 친구를 만난다.(레나는 끝까지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레나나 그 친구나 마음만 급했을 뿐 혁명이 도대체 뭔지 몰랐다고 한다. “그 친구는 정말 웃겼지. 그 전까지는 말을 타본 적이 없었어요. 치마를 입고 있더라고. 스커트 양쪽으로는 온갖 초콜릿과 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그래 놓고 혁명을 하겠다니! 철부지였어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간이 모험이었네요.” 그 후 레나는 고등학교 역사교사가 되었고, 친구는 공산당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

둘 다 의욕적으로 혁명 정부를 돕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상황은 변했다. 몇 년 전, 레나가 쿠바에 가서 만난 친구의 모습은 끔찍했다.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이었어요. 비쩍 마르고, 병들고, 비참했죠.” 그리고 인터뷰를 하던 바로 그 주, 친구는 쿠바에서 운명을 다했다.

이런 드라마틱한 대비가 레나가 이야기를 푸는 방식이다. 그의 기억은 추처럼 영광스러운 이상과 경악스러운 현실을 불안정하게 오간다. 레나는 모든 인간은 지성적으로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파시즘과 레닌에 대해 비판적으로 가르치자 정부는 5년 만에 그녀를 해고했다. 골수 혁명분자였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돈도 벌어오지 않았으면서 이혼 후에는 재산을 몽땅 가져가더니 아이들을 키우는 건 그녀에게 다 맡겼다. 그 후부터는 미혼모 백수로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야 했다.(그 와중에도 혁명의 신념은 포기할 수 없어서 배가 곯을지언정 불법 시장은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 다 내려놓고 뉴욕에 왔더니, 자신처럼 미혼모가 된 딸을 위해 손자를 또 돌봐야 한다. 레나에게는 삶이 괴롭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삶은 너무나 괴로워. 이렇게나 공부를 많이 했는데,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손자를 키운 게 전부지.”

그러나 이런 고립은 레나 스스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상황이 바뀌더라도 레나는 지식인이라는 자기 역할을 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계속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혁명은 옳았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을까? 지식인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은, 아무도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것이 레나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성토하고 있는 메시지다. 미혼모 지식인으로서, 평생 누구와도 속 시원하게 소통했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는 것. 이 고립감이 레나의 76년 삶에 처절하게 박혀 있다. 쿠바 혁명을 완전히 포기하고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온 후에도 고독은 멈추지 않았다.

“마이애미에 있을 때, 나는 내 사고방식 때문에 늘 소통 불능이라는 압박을 느꼈어요. 나는 언제나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 있었죠. 쿠바에 있었을 땐 공산당 윗선으로 승진할 수도 있었지만 난 언제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어요. 나 자신과 인간적인 감정에 떳떳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마이애미 사람들은 날 공산당원이라고 생각하더군요. (…) 이것이 나의 고독이에요. 난 정말로 내가 추방당했다고 느껴요.”

혁명은 다시 준비되어야 한다. 혁명이야말로 ‘인간 공동의 선’이라는 생각을 레나는 끝까지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 ‘진실’을 말할 것인가? 뉴욕에서 레나는 영어 못하는 쿠바 할머니일 뿐이다. 쿠바인조차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들어달라고 구걸하는 것이 ‘혁명’일 수는 없을 터인데, 반혁명의 상징인 미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생계까지 유지하다니 이건 모순의 극치다. 이제는 신경증과 우울증까지 왔다. 40년 전에 알았던 이웃이 지금은 아바나의 정신병동에 있다고 말하는 레나의 목소리에서 불안함이 비친다.

그래서일까. 최근 레나는 쿠바에서 썼던 자신과 가족의 메모를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쿠바에서 뉴욕으로 정말로 ‘오기 위해’. 역사학자 레나는 오늘도 말없이 사료를 정리한다.


모니카의 길, 진실은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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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니카는 아들 세바스찬과 살며 백화점에서 스페인어로 광고 문구를 만드는 일을 한다. / 2. 레나의 대학 졸업장 위에 손자 세바스찬이 적은 편지가 붙어 있다. 대학 졸업 후 자신이 한 일이 손자를 키운 것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배치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인터뷰 대상자는 모니카다. 모니카는 열세 살 아들 세바스찬과 함께 나타났다. 백화점에서 스페인어로 광고 문구를 만드는 일을 한다는데, 풍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기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보통이 아니다.

모니카는 레나의 딸이다. 1993년에 레나보다 먼저 아바나를 떠났다. 당시 그녀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 전에도 떠나라면야 떠날 수 있었지만 “가구, 아파트, 가족사, 내 주변 모든 것이 의미 있었던 장소”를 떠나는 게 싫어서 계속 쿠바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마이애미로 홀로 건너왔다. 그때는 철이 많이 없었단다. “그때 나는 아직 엄마의 딸이었거든요.” 그러나 엄마와 떨어져 있었던 몇 년의 시간은 그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모니카는 미국 문화에 적응하기로 결심했고, 1997년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건너왔다. 거기서 아이가 생겼다. 남편은 없었다. 뉴욕의 미혼모로서 살아남기 위해 모니카는 더 강해져야 했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배운 사람’의 태도를 버려야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모니카는 레나가 주장하는 ‘정의로운 진실’은 원래부터 없거나, 아예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생활만 믿는다. 그리고 생활은 지구상 어느 국가에 살든 다 똑같다! 이런 단호한 결론은 쿠바에서 24년, 미국에서 24년을 힘껏 살아본 자만이 내릴 수 있다.

뉴욕에서는 생존하기 위해 노예처럼 노동해야 하지만, 아바나에서는 소련에 지원받을 때조차 일주일에 고작 3㎏의 쌀, 5개의 계란, 토마토소스 반병만 가지고 생존해야 했다. 뉴욕은 인정(人情) 없이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하지만, 카스트로 정권도 정치 노선을 안 따른다는 이유로 수많은 가족을 해체시켰다.

뉴욕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자제들은 떵떵거리고 살지만, 아바나의 행운아들도 고위 관직에 있는 친척에게 기생해서 살아간다. 자, 어느 쪽이 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럴 때는 ‘정의로움’이라는 척도를 아예 들이대서는 안 된다. 정의는 현실 속에서 세팅되는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뉴욕은 쿠바보다 낫다. 뉴욕 생활은 최소한 정직하다. 이상을 설정하지도 않고, 현실과 이상이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동의하지 않았다. 모니카가 쿠바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뉴욕 자본주의의 ‘환상의 덫’에 면역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 뉴욕에서, 나는 원칙을 위해 가격을 치러요. 음식이 아니고요. 원칙은 누구나 누려야만 하는 거예요. 난 쿠바에 있을 때에도 우리 할아버지가 정부 관계자라고 해서 어떤 이익도 얻지 않았어요. 오늘날 유럽이 ‘사회주의적으로’ 누리고 있는 이익과 올바른 생각은 과거가 대가를 대신 치른 거예요. 식민지와 노예의 현실 말이에요.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때 정직하지 않아요. 유럽의 사회주의는 아주 부정직한 방식으로 성공했어요. 정치는 원래 더럽죠. 이건 내가 혁명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잘 알아요.”

모니카가 뉴욕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과 남자친구다. 이 둘이 모니카의 ‘뉴욕 생활’을 지탱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가족의 삼각형. 이런 점에서, 모니카는 미국 문화에 확실히 적응했다.

쿠바의 대혁명가도 모니카의 가족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체 게바라의 아들을 내가 알거든. 걔가 자기 아버지보고 개자식이라고 했어요. 왜인지 알아요?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편지 한 통 안 쓴 거야. 아무리 대단한 혁명가라도 아무 소용없어. 옆 사람한테 잘하고 봐야지!”


예술이 있는 한 삶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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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린 그림 앞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 그녀는 쿠바 시절에도 갤러리에서 화가 겸 큐레이터로 일했다.

모니카보다 더 유연한 사람들도 있다. 에르네스트와 엘리자베스다. 이 둘은 아바나 출신의 예술가다. 에르네스트는 미학사를 전공한 연구자였고, 엘리자베스는 갤러리에서 화가 겸 큐레이터로 일했었다. 이 둘은 쿠바 시절을 행복하게 기억하고 있다. 쿠바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쿠바로 넘나드는 이동에도 별 거부감이 없다.

이 힘은 무엇일까? 에르네스트의 경우에는 공부였다. 그는 도서관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쿠바에서 대학교 연구원으로 일했는데, 근무 환경이 자신에게 딱 맞춤형(?)이었다고 했다.

“쿠바에서는 아무도 일을 안 해요. 원래는 그러면 안 되는데, 나 같은 공부벌레는 그 덕을 톡톡히 보지.” 일은 없고, 월급은 (조금이나마) 나오고, 일하는 장소는 도서관이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환경이 있을까? 직장에서 원 없이 읽고 썼다고 한다. 쿠바는 그에게 내면을 채운 시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쿠바의 힘이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챙겨주는 가족과 친구 속에 있을 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아바나는 물자가 고갈될수록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사는 시골은 안전하단다.

“쿠바에 살인은 거의 없어요. 범죄 자체가 별로 없죠. 안전하다고 느낄 거예요.” 쿠바의 인간관계는 엘리자베스의 작품 모티브다. 그것도 모자라 매년 여름마다 쿠바로 여행을 가서 스스로를 ‘충전하고’ 온다.


완전한 몰락 뒤에 희망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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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에르네스토. 미술작품을 굉장히 좋아한다. 쿠바로 돌아가지 않고 뉴욕에 눌러앉게 된 것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이야말로 처음부터 ‘혁명’에 가장 멀리 있었던 사람들이 아닐까. 이 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도 아니고, 생존도 아니다. 바로 재미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체제와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인가. 뉴욕에 오는 길도 그리 힘겹지 않았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왔다. 아트 에이전시가 에르네스트의 칼럼과 엘리자베스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정식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쿠바에서는 이 초대장이 있어야 합법적으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현재 에르네스트는 미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었고, 엘리자베스는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쿠바의 현 상황에 무슨 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엘리자베스는 왜 정치적인 의견을 가져야 하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나는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 전혀 신경 안 써요. 많은 사람이 그에게 화를 내고, 그가 사임하지 않는 이상 쿠바에 절대 안 돌아가겠다고 해요. 하지만 분노가 문제를 해결하진 않아요. 피델이 곧 내 나라인 건 아니니까요. (…) 쿠바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변화는 갑자기 오지 않아요. 한 스텝씩 오는 거예요. 지금도 정부는 무능하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잘 보살피며 살고 있어요.”

그렇다면 예술혼으로 모든 위기를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거짓말이다. 에르네스트와 엘리자베스는 공통적으로 혁명 기간 동안 배고픈 기억이 없다. 엘리자베스의 고향은 시골이었기 때문에 음식이 풍부했다.

에르네스트도 친지 몇 명이 공무원이어서 생활에 큰 위기는 없었다. 그렇다. 얼마나 배고팠느냐에 따라서 혁명에 대한 기억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누구의 기억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의 목마름이 가장 정당했다고, 그 누가 평가할 자격이 있을까.

이 네 명의 선택은 어찌 보면 옳았다. 1990년대에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은 막을 내렸고,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은 수많은 쿠바인들이 아예 떠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졌다. 이들은 타이타닉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구명 선에 올라탄 셈이다.

그런데 배는 정말 침몰했을까? 요시다 타로는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라는 책에서 쿠바가 2000년대 들어서 ‘지혜롭게’ 몰락하고 있다고 극찬한다. 물자도 에너지도 극히 제한되자, 쿠바는 사회 시스템을 검소하게 바꾸기 시작했다.

생존에서 공생으로! 효과는 있었다. 친환경 건축 소재가 개발되었고, 농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종자도 개발했으며, 쿠바식 에너지 절약 프로젝트는 유엔에서 상도 받았다. 한편, 자본도 슬슬 유입되기 시작했다. 라울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으면서는 자본화가 훨씬 더 빨라졌다.

8개월간 쿠바에 머물렀던 백영옥 시인도 “더 이상 자본주의의 유입과 흐름을 피할 수는 없다”고 결론내렸다.(<월간중앙> 2015년 2월호, ‘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 이 상극하는 두 가지 흐름은 어떻게 합쳐질까. 아무도 모른다. 쿠바는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완벽한 몰락, 그리고 찾아오는 변신.

아바나-뉴요커 4인방의 이야기는 1990년대 ‘쿠바 혁명’의 그림자에서 각자 빠져나온 여정이다. 그러나 이들은 2000년대 이후의 쿠바를 모른다. 고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들의 경험은 오늘날의 쿠바, 서울, 그 외의 많은 곳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무의미해지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블랙홀은 언제든지 다른 이름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함정은 “내 길은 내가 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까먹게 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명분에 기대면 전 생애가 보장될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때 이 4인방의 인생을 떠올려보자. 무엇을 상상하든 간에, ‘혁명’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한 채 나 역시 내년 여름에 길을 떠나보려고 한다. 뉴욕에서 쿠바로, 역행(!)의 여정이다. 그곳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안의 말을 비우고, 또다시 이야기 고수들을 만날 준비를 한다.

글 김해완 뉴욕 통신원 godhks1210@gmail.com - 고등학교 재학 중 학교를 나와 공부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서 생활하면서 읽고, 쓰고, 같이 사는 법을 익혔다. 가방끈은 짧지만 공부복은 많다.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하게 ‘세계의 수도’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배움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는 중이다. 쓴 책으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그린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북드라 망), <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작은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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