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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고산자:대동여지도' (9월 8일 개봉)차승원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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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길을 찾다 차승원의 방식으로


'고산자, 대동여지도'

한 해에 두세 편씩 영화를 선보일 만큼 ‘다작 배우’였던 차승원(46)이 주 무대를 TV로 옮긴 건 2011년 즈음이다. 스타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코믹하게 비튼 드라마 ‘최고의 사랑’(MBC)으로 그해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몸을 낮추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출연작 수는 줄이되, 운신의 폭은 외려 넓혔다. 2012년과 2013년에는 일본 배우들과 함께한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로 무대에도 올랐다. 신중한 선택과 집중은 의외의 센세이션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첫 출연한 시골 살이 예능 버라이어티 ‘삼시세끼’(방영 중, tvN)에서 살뜰한 요리 솜씨를 선보이며, ‘차줌마(차승원+아줌마)’라는 별명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것.

날이 서 있던 이미지는 친근해졌고, 포털 사이트에는 연관 검색어로 ‘닭곰탕’ ‘레시피’ 따위가 당연한 듯 보이기 시작했다. 퀴어액션영화 ‘하이힐’(2014, 장진 감독)에선 여자가 되고 싶은 형사 역으로 꽤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지만, 반면 이 영화는 꽤 실망스러운 평가를 받았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더욱 두각을 드러내던 나날. 2년 만에 들려온 차승원의 영화 복귀작 ‘고산자, 대동여지도’(9월 7일 개봉, 강우석 감독, 이하 ‘고산자’) 소식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고산자’는 영화 제작사 시네마서비스 대표이기도 한 강우석 감독의 스무 번째 장편이자, 첫 사극영화. 차승원은 조선 후기 국가가 장악한 팔도 지리를 목판 지도로 만들어 만백성과 나누고자 했던 실학자 김정호(1804~1866 추정) 역을 맡았다. ‘옛 산사람(고산자·古山子)’이란 뜻의 호를 지닌 희대의 방랑자를 연기하며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는 차승원. 뭔가를 버리고 나서 더 자유로워진 삶에 대해 그는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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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원 `고산자, 대동여지도` M179커버 01 사진=전소윤(STUDIO 706)

요즘 내 좌우명이 '일희일비하지 말자'다. 예전에는 뭐 하나 하면 욕심을
참 많이 부렸는데 '이제 좀 놔줄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객관적으로 볼 줄도 알아야 하니까."

-‘고산자’ 출연 제의를 받은 후 3주 만에 수락했다고.
“영화·TV 드라마를 합해 시대극을 네 편이나 했다. 특히 사극은 배우에게 기대하는 연기의 틀이 확고해서, 그 틀을 깨는 게 위험하거든. 이미 많이 했으니, 될 수 있으면 사극에는 더 출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고산자’ 시나리오를 받았다. 사실 하루 만에 마음이 기울었다. 나에게 왜 이 시나리오를 줬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고산자’는 시대를 앞서 나간 비범한 인물의 이야기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지만 해학이 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배우 차승원의 이미지는 도시적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희극적인 요소도 있잖나. ‘고산자’는 두 가지를 다 써먹을 수 있는 영화다. 김정호는 양반 신분이 아니어서 남겨진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래서 말과 행동도 자유롭다. ‘사극이라도 촬영 현장에서 얼마든지 변주할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석 감독의 연출작에 출연한 건 처음이지만, 제작자와 배우로는 15년 지기다. 시네마서비스 제작 영화 중에는 코미디 장르가 절대적으로 많고. ‘고산자’도 마냥 진지한 영화는 아닌데.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며 겪는 고행만큼 해학을 담아야 관객이 지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강 감독님과 수도 없이 얘기했다. 희극적인 요소도 적잖이 들어갔다. 그렇다고 전작들의 분위기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아마 강 감독님도 그랬을 것이다. ‘고산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찍었으니까.”

-어떻게 달라졌나.
“예전에 강 감독님은 영화를 거의 공장에서 찍어 내듯 만들지 않았나. 그런데 ‘고산자’는 후반 작업에만 1년가량을 바쳤다. 강 감독님도 ‘전설의 주먹’(2013) 이후 공백이 길었는데, 그 이유가 나랑 비슷했던 것 같다. 스스로가, 그 속전속결로 만들었던 영화들이, 어느 순간 징글징글해진 거지. 할 때는 치열했는데, 문득 ‘내가 뭐하고 있나’ 싶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잖나. 그래서 이전 작업은 다 잊고, ‘고산자’는 다르게 접근한 것 같다. 이번 촬영 현장에서는 하나하나를 아주 꼼꼼하게 체크하더라. 본인은 치열하되 다른 사람들은 너무 버거워하지 않도록 늘 격려하셨다. 감독과 배우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제작자보다 감독으로 만나니 더 좋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대동여지도 그 자체다. 강 감독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물을 봤다고.
“난 함께 가지 못했다. ‘고산자’를 준비하면서 붓으로 한자 쓰는 법과 목각하는 법을 조금 배웠다. 배우들에게 목각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 이번 영화를 위해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들었다. 3년여에 걸쳐 완성된 대동여지도 모사본이다. 그것만 봐도 너무 정교해서 기가 다 질리더라. 김정호라는 사람을 막연히 ‘위대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새삼 압도됐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캐릭터 접근이 조심스러웠겠다.
“그런 사람이 ‘나 정말 위대한 일을 하고 있어’ 이러면 우스꽝스럽잖나.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람으로 빚어 나갔다. 지도에 대해서는 지독하지만, 그 외 부분들은 설렁설렁 살아가는 소탈한 사람. 딸내미 눈치도 좀 보고. 그 마음은 내가 잘 알지(웃음).”

-첫 촬영지가 백두산이었다고.
“백두산은 정말 대단하더라. 중국 쪽을 통해 관광객이 다니지 않는 코스로 올라갔거든. 정상에 다다르니 갑자기 천지연이 쫙 펼쳐졌다. 진짜 입이 딱 벌어지더라. 스위스 융프라우는 비교도 안 됐다. 사계절을 모두 담아야 했기에, 아홉 달 동안 마라도부터 백두산까지 이어진 로케이션 촬영 루트만 10만㎞가 넘는다. 원하는 하늘 빛깔을 포착하기 위해 새벽 4시 반에 촬영하러 가서 한두 컷 찍고 빠진 곳도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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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원 `고산자, 대동여지도` M179커버 01 사진=전소윤(STUDIO 706)

-실제 풍경에서 받은 기운이 연기하는 데도 도움됐나.
“그럼, 엄청. 공간이 사람을 현혹시킨다. 그래서 요즘은 영화 세트도 리얼하게 짓잖나. 강 감독님은 매 촬영 뭔가 새롭게 변주하면서도, 사람들이 지치지 않도록 아주 경제적으로 찍었다. 중요한 감정신은 카메라 네다섯 대를 돌렸다. 배우들을 배려한 거다. 앵글 때문에 같은 연기를 여러 번 하지 않도록.”

-연기적으로 가장 신경 쓴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 너무 좋았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판타지일지도 모를 그 순간을 표현해 내는 게 중요했다. 사명감과 회한,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고산자’는 나름 순서대로 찍었기 때문에, 수개월간 촬영하며 나도 모르게 김정호의 감정들이 체화돼 있었다. 다행히 그런 느낌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전반적으로 스스로를 다그치며 연기하지는 않았다.”

-다그치다니.
“사람의 감정이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TV 드라마 ‘최고의 사랑’ 때만 해도 매 장면을 엄청 디테일하게 준비했다.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하기도 했다. 지금은 뭐랄까, 인위적으로 애쓰면서 연기하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연기는 ‘카메라가 돌아가니까,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수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하면 안 된다.”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
“지금도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촬영장에서는 그날 일을 계획하고 가 봤자 언제나 생각대로 되진 않더라. 그냥 부딪히는 게 훨씬 더 많은 감정과 동기를 부여한다. 그렇게 해야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것들이 나오고. 만약 안 되면, 뭐 어떡하겠어. 영화를 열심히 잘 만들고 싶은 욕망은 여전하지만, ‘대단한 뭔가를 남기겠다’는 오기 같은 건 어느 순간 없어졌다.”


-배우가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픈 욕망을 포기하기는 힘들 텐데.

“요즘 내 좌우명이 ‘일희일비하지 말자’다. 예전에는 뭐 하나 하면 욕심을 참 많이 부렸는데 ‘이제 좀 놔줄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객관적으로 볼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영화도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 결과에 대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내 능력을 직시하면, 또 다른 좋은 일들이 여러 형태로 찾아올 것이다. 배우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방식이 딱 하나인 건 아니니까.”

-작품 선택 기준도 달라졌을까.
“예전에는 ‘이번에 이런 장르를 했으니까, 다음엔 이런 역할을 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런 식의 강박은 없어졌다. 영화든 TV 드라마든 보는 사람이 재미있는 게 우선이라고 본다. 그런 작품이라면 장르가 겹치는 것이 뭐 어떤가. 그리고 작품을 통해 어떤 생각을 관철시키는 건 작가나 감독의 몫이다. 배우가 거기에 휩쓸려 관객이나 시청자에게 무언가를 시사하려 드는 건 좀 아닌 듯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좋은 작품을 잘 골라야 한다.”

-차기작은.
“아직. 때 되면 어련히 정해지지 않을까. 예전부터 인간 아닌 역할이 어울린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SF 장르 같은, 현실적이지 않은 캐릭터 말이다. 여담인데, ‘고산자’ 촬영을 앞두고 고사(告祀) 자리에서 원작 소설을 쓴 박범신 작가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영화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은 노시인 적요 역에 나를 떠올렸다고. 놀랐다. 동명 영화의 주연이었던 박해일은 나와 완전히 이미지가 다른 배우니까. 나는 좀 강골의 이미지 아닌가. ‘나 같은 캐릭터일수록 나이 들면 적요처럼 젊음에 대해 집착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해 봤다. 왜, 나이 드는 걸 못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잖나.”

-실제로는 어떤가.
“나이 듦에 대한 부담은 없다. 어떤 사상을 간직하든, 어떤 운동을 하든, 여러 형태의 건강함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이 먹으려 노력할 뿐이다.”

-‘삼시세끼 고창편’ 녹화가 얼마 전에 끝났다. 이번이 마지막 시즌이라고.
“(유)해진씨도 나도 이 프로그램에 대한 애착이 크다. 이번 시즌은 녹화 내내 너무 더워서 다들 ‘정신 줄’ 놓고 지냈다. 출연자 넷이서 ‘독서 모임’이라 이름 붙인 시간이 있거든. 하루 촬영이 끝나면 캔맥주에 과자 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말도 안 되는 잡담을 나누는 거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 나는 아침 6~7시쯤 깬다. 그때 꼭 먼저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 유해진(웃음). (손)호준이랑 (남)주혁이는 다 자고. 새벽 시간에만 느껴지는 청량함이 있잖나. 내가 왠지 ‘바르게 사는 사람 같다’는 기괴한 착각에도 빠져 보고. 이제는 다 추억이지.”

-2년 동안 ‘삼시세끼’ 시리즈에 출연하며 기존의 예민한 인상이 다소 둥글둥글해진 것 같은데.
“해진씨는 나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본 사람이잖나. 둘이서 있을 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까칠해?’ 그랬더니 ‘응, 어떨 때 보면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어’라고 딱 말하더라. 나는 얼굴에 티가 많이 나거든. 예전엔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을 들들 볶았던 시절도 있었다. 더 좋게, 더 잘하고 싶으니까. 요새는 그런 일은 없다. ‘알아서 잘하겠지’ 하고 믿는다. 딱히 사람 좋아 보이고 싶은 건 아닌데, 뭐랄까, 더 무던해지고 싶다.”

-아들의 친부가 소송을 거는 등 최근 몇 년간 신변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늘 잘해 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킬 건 지키면서 살아가자’는 마음이다. 여러 사람이 싫어할 만한 행동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별한 호의를 베풀기보다 그냥 상대방이 싫어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게,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내 방식이다. 남들이 행복해야 나에게도 돌아오니까. 나만 행복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건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얘기겠지. 그렇게 되면 훌훌 털어 버리고 가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배우 일을?
“정말, 미련 없이 떠나야지. 그게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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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원 `고산자, 대동여지도` M179커버 03 사진=전소윤(STUDIO 706)

글=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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