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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를 가다 | 보스니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중세 유럽으로의 낭만적 시간여행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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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곽에서 내려다 본 구 시가지 전경. 수공업으로 만든 붉은 기와 지붕이 에메랄드빛 아드리아해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1개의 국가, 2개의 문자, 3개의 종교, 4개의 언어, 5개의 민족, 6개의 공화국. 옛 유고연방은 이렇게 6개의 숫자로 설명된다. 티토 사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마저 해체되고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에 따른 종교·민족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시작된 유고 내전은 흔히 ‘보스니아 내전’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 건축물과 쪽빛 바다의 절묘한 조화 ... 지상낙원, 동화 같은 여행지 등 극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남한 국토의 절반이 조금 넘는 보스니아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비운의 땅이다. 1463년부터 400여 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이곳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 이슬람 국가가 탄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치(1878~1918) 기간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사건은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1992년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해 UN에 가입,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공식 인정받은 것도 잠시. 독립을 원치 않는 세르비아계가 무슬림과 가톨릭계를 공격하면서 보스니아는 내전에 휩싸인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보스니아 마을 공격으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1992~1995)은 NATO의 개입과 미국의 중재로 3년 9개월 만에 끝났지만 9만7000명이 사망하고 인구의 40%에 가까운 180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보스니아 내전의 격전지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모스타르(Mostar)를 방문했다. 전쟁은 끝났어도 건물 군데군데 남아 있는 총탄 자국과 폐허가 된 건물 잔해가 당시의 처참함을 알려준다. 모스타르의 성 프란치스코 주교좌 성당 주차장에서 내려 ‘스타리모스트’ 다리로 향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스타리모스트는 1566년 오스만제국 쉴레이만대제의 명을 받아 천재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건설한 길이 30m, 폭 5m, 높이 24m의 아치형 다리다. 네레트바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뉜 가톨릭계 크로아티아인과 이슬람계 보스니아인 마을을 연결해주는 이 다리는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며 교류하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11월, 다리는 폭격으로 파괴됐고 이웃이었던 두 공동체도 원수가 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전쟁이 끝난 후 이 다리는 유네스코의 후원으로 재건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강에서 건져 올린 석재 파편 1088개를 사용해 2004년 7월 복구됐다. 2005년 모스타르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 다리는 폭이 좁고 경사가 진데다 바닥에 반들반들한 자갈돌이 깔려 걷기가 쉽지 않았다.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고 다이빙을 하려고 다리 위를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들에게서 오늘날 보스니아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이 읽힌다. 다리 건너는 옛 이슬람 상가인 쿠윤질룩 거리다. 이슬람 특유의 공예품과 수예품, 탄피로 만든 기념품 등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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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의 중심부 가톨릭 마을과 이슬람 마을을 연결하는 스타리모스트 다리. 16세기에 건설돼 보스니아 내전 때 파괴됐다가 복원돼 민족 화해와 평화의 상징이 됐다.

보스니아에서 아쉬웠던 점은 일정이 지연돼 메주고리에를 가지 못한 것이었다. 모스타르에서 28km 떨어졌지만 도로 사정이 열악해 대형 버스로는 접근이 쉽지 않다고 했다.

해발 200m의 언덕에 자리잡은 인구 4300명의 작은 마을인 이곳은 1981년 6월 여섯 아이들이 마을 외곽의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한 이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수천만 명이 다녀간 세계적인 관광지다. 하지만 로마교황청은 공식적으로 이곳을 성모 발현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크로아티아: 인구 428만 명이지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7곳, 무형 문화유산 10개를 바탕으로 연간 10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관광대국이다. 국내총생산(GDP)의 20%가 관광수입. 1인당 GDP 1만 8000달러로 발칸유럽에서 슬로베니아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다.

2013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인구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다. ‘꽃보다 누나’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아시아에서는 한국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고 중국 관광객이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는 잠시 베네치아 왕국의 통치를 받기도 했으나 14세기부터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멸망할 때까지 500여년 간 아드리아해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라구사(Ragusa) 공화국의 수도였다.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는 구 시가지는 11~16세기에 쌓아올린 높이 25m, 길이 2km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에 떠있는 성채도시의 독특한 풍광 덕분에 세계 10대 성곽도시로 꼽힌다.

성벽을 따라 걷노라면 100만여 개의 수제 기와로 덮인 건물의 붉은 지붕과 넘실대는 에메랄드빛 아드리아해가 대비를 이루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중세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되는 관문은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의 조각상이 새겨진 필레 게이트다. 문을 지나면 1448년에 세워진 붉은 돔형 지붕 아래 16면체 기둥의 각 면마다 물이 흘러나오는 오노프리오 분수가 나타난다. 1448년에 세워진 이 분수는 20km 떨어진 물 저장고에서 물을 끌어와 이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 역할을 했다.

14~16세기 세관과 조폐국, 은행 등으로 사용됐던 스폰자궁전은 1층의 아케이드와 2층의 아치형 창문, 3층의 정방형 창문 등 르네상스와 후기 고딕건축 양식이 혼합된 절충형 건물로 중세 해상무역 왕국 시절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스트라둔 도로를 따라 걷노라면 천사나 어릿광대 복장을 한 거리의 예술가들이 어슬렁거리고 시간 맞춰 전통 의상을 입은 의장대가 연주를 하기도 한다. 300m가량 이어진 스트라둔 도로의 끝은 플로체 선착장이다.

11세기 세워진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 로크룸섬으로 가는 페리선부터 날렵한 쾌속선과 요트, 해안 주변을 도는 유람선 등 어디론가 떠나려는 배들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지상낙원을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오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달마티아 지방의 오레비츠에서 수상택시로 15분 쯤 가면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생가가 있다는 코르출라섬이 나타난다. 해안이 아름다운 달마티아 지방은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 나오는 점박이 강아지의 원산지다.

코르출라섬은 평균 폭 7.8km에 길이가 46.8km로 기다란 고구마처럼 생겼는데 1만6000여 명의 주민 대부분이 마르코 폴로와 관련된 관광업에 종사한다.

코르출라 사람들은 베네치아 상인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두 번 동방 여행을 한 후, 여행기를 출판해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의 출생지가 이탈리아로 돼 있는 건 당시 코르출라섬이 베네치아공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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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출라 사람들은 베네치아 상인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두 번 동방 여행을 한 후, 여행기를 출판해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기자기한 중세의 건축물, 붉은 지붕과 쪽빛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동화 같은 풍경이 두브로브니크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하다. 다른 게 있다면 두브로브니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한적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고려해 청어뼈 모양으로 거리를 배치했다는 정도다. 코르출라 성안 골목길을 ‘사고(思考)의 거리’라고 부른다.

두어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계단으로 돼 있어 길을 걸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면 굴러 떨어지기 쉬워서다. 부두에서 성의 남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1301년부터 짓기 시작해 1806년에 완공된 성 마르코성당에 이른다. 고딕양식과 르네상스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인데 파사드의 기둥 위 나체로 쪼그려 앉은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눈길을 끈다.

성당 앞 광장에서 왼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작은 종이 매달린 마르코폴로탑이 나오고, 오른쪽 골목으로 돌면 마르코 폴로 박물관과 마르코 폴로 생가, 마르코 폴로 기념품 가게 등이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경로를 표시한 중세의 지도와 그의 흉상,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동방견문록 등을 볼 수 있다.

그 후 ‘바다가 연주하는 오르간’으로 유명한 자다르에서 버스로 2시간 반, 150km 떨어진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두브로브니크, 코르출라, 스플리트 등이 인간의 손끝에서 탄생한 문화유적이었다면 이곳은 자연이 빚어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1949년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으며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너도밤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으로 이뤄진 울창한 숲과 수천 년 간 물이 흐르며 쌓인 석회암과 백운암의 자연 댐이 장관을 이루며 흰빛 비예라강과 검은 빛 크로나강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물이 계단식으로 이어진 16개의 호수와 9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비경을 이룬다.

주변 삼림까지 합하면 3만㏊가 넘는 플리트비체에는 상징동물인 갈색곰을 비롯해 늑대·여우 등 50여 종의 포유동물, 청둥오리·왜가리 등 157종의 조류, 300여 종의 나비, 1200여 종의 희귀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30여 개의 동굴에는 20여 종의 박쥐가 살고 있다. 자연경관 보존을 위해 내부의 모든 산책로, 쓰레기통, 안내 표지판 등을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로 만든 18km 길이의 인도교를 따라 걷다보면 빛의 굴절과 물에 포함된 광물에 따라 청록색·회색·하늘색·파란색으로 바뀌는 호수의 색상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하류의 마지막 호수에 떨어지는 벨리키 슬랍 폭포는 높이와 수량 면에서 으뜸이다.

떨어지는 물은 푸르른 하늘이 그대로 지상에 내려와 호수에 잠긴 듯 아름답고 78m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위용을 보고 있으면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슬로베니아: 알프스산지의 동쪽 산록에 자리잡고 있는 고산국가로 한반도의 11분의 1 크기에 200만 명이 살고 있다. 동유럽의 스위스라는 애칭이 있을 만큼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유럽에서는 핀란드·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숲으로 이뤄진 곳이다. 2004년 NATO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한 데 이어 2007년부터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2000달러로 발칸유럽 최고의 부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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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코르출라·자다르·스플리트·플리트비체를 거쳐 오파티야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크로아티아와 작별을 고하고 슬로베니아의 포스토이나 야마(동굴)에 도착했다. 200만 년에 걸쳐 형성된 카르스트 석회동굴로 길이가 21km나 된다.

전체 동굴 가운데 5.3km 구간이 일반인에게 공개돼 있다. 길이로는 세계에서 두 번 째, 관람코스로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 1986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동굴은 1818년 동네 주민이 발견했고, 1819년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1872년 동굴에 철로가 놓였고 전기가 들어온 것은 1883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노량진~제물포)가 놓인 게 1899년이니 이보다 27년이나 앞선다.

지난 200년 동안 약 3500만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동굴 내부 기온은 사시사철 영상 8~10도로 여름철에는 입구에서 수도사 스타일의 국방색 후드망토를 빌려준다. 입구에서부터 2km는 동굴열차를 타고 들어간 후 가이드를 따라 가장 경치가 좋은 구간 1km를 걸어서 관람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형형색색 석순과 종유석, 석주의 대향연이 펼쳐진다. 위대한 산, 러시아 다리, 사막의 낙타, 스파게티홀, 백색의 방, 붉은 방 등 석순과 종유석의 형태와 색상에 따라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놓았다. 100년에 1cm씩 자란다고 하니 수백만 년의 세월이 응축된 대자연의 보물창고에 들어온 느낌이다.

영국의 유명한 조각가 헨리 무어는 동굴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경이적인 자연미술관’이라며 격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압권은 넓이 50m, 길이 120m, 높이 35m로 1만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다는 출구 근처의 콘서트홀.

음향공명 효과가 뛰어나 이곳에서 토스카니니가 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20세기 초 테너의 거장 엔리코 카루소도 콘서트를 열었다고 한다. 150종의 동굴 생물 중에서 반투명한 백색 피부에 눈이 퇴화된 동굴도롱뇽 ‘올름’을 전시하고 있다.

다음은 블레드성. 수심 30m, 알프스 만년설이 흘러내려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에메랄드빛 호수와 호수 한가운데 그림처럼 떠있는 섬, 130m 높이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성(城)이 빚어내는 풍경이 말 그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지상낙원이다.

블레드호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블레드성은 101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2세가 남티롤의 주교 브릭센에게 헌정한 성이다. 나폴레옹에게 침략당하기 전까지 800년 동안 남티롤주교의 관리 아래 왕가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됐다.

건너편에는 과거 티토 유고연방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됐고 2004년부터는 일반 호텔로 개조된 ‘빌라 블레드’가 있다.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주창했던 티토 대통령이 김일성을 비롯한 비동맹그룹 지도자들을 초청했는데, 블레드의 경치에 반한 김일성이 공식 일정을 미룬 채 2주간 묵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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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나룻배 ‘플레트나’를 타고 들어가는 블레드섬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신랑은 신부를 안고 99개의 계단을 올라 결혼식장인 성당으로 들어가야 하며 식을 마친 신혼부부는 성당 내부에 드리워진 긴 밧줄을 잡아당겨 ‘행복의 종’을 울리면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일반인들은 밧줄을 당겨 세 번 만에 종을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성모마리아 승천성당이 세워진 장소는 원래 9~11세기 슬라브 거주민들이 사랑과 풍요의 신인 지바여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1142년 바로크양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1886년부터 운행된 플레트나는 당시 합스부르크가문이 블레드호수의 평화적인 분위기를 보존하기 위해 23척만 허용했고 뱃사공도 이곳 주민 중에서 경험자를 지정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23척만 운행되고 있으며 뱃사공도 그때부터 뱃사공 가문의 남자 자손들이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블레드를 둘러보고 나면 이곳이 왜 ‘세계의 동화 같은 여행지 톱 10’의 하나로 꼽혔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세원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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