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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기획 - 애완의 철학(4)] 늑돌이와 함께 춤을! "함께 길을 갈 때의 그 행복감이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많은 생명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깨달음… 그들과 특별한 유대감을 느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_빅토르 위고 “깨지지 않는 신뢰는 없다. 진실로 충직한 개의 신뢰를 제외하고는”_콘라드 로렌츠
“우리의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위대한 보물은 박물관에 모셔두기도 하지만, 산책에 데리고 나가기도 한다”_로저 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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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산책할 때 느끼는 특별한 유대감이 주는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사람과 개가 함께 있는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함께 길을 가는 모습’이라고 대답하겠다. 목줄은 채우지 않고,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변 말고 물이 흐르고 바위와 나무, 풀이 있는 길을 개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모습 말이다. 흔히 개는 밥 주는 이를 주인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개와 가장 친한 이는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닐까. 아마도 밥 주는 이와 함께 길을 가는 이는 같은 사람일 확률이 높겠지만.

어느 전문가는 가장 바람직한 개와 인간의 관계가 바로 ‘노숙자와 개’라고 했는데, 같이 먹고 같이 걸으며 꼭 붙어 자니 그렇긴 하다. 그 정도 되면 사람이 개를 일방적으로 먹이고 보살피는 게 아니라 서로 체온을 나누며 돌보는 사이가 된다. 지금처럼 인간의 ‘애완’이 되기 전, 개는 몇 십만 년 동안 사람과 함께 짐을 나르고 썰매를 끌며 사냥을 하던 오래된 동반자였다.

개와 바람직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숙자가 될 수는 없고, 사냥꾼이 되지도 못하지만 늑돌이와 산책할 때 가끔 그런 특별한 유대감을 느끼곤 하는데,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과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이다.

비록 늑돌이는 길을 걸으며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과 자주 먼 데를 바라보는 내 눈길을 이해하지 못하겠고, 나 역시 늑돌이가 맡는 냄새의 세계를 끝내 알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폭풍우 속을 함께 걸었고 사나운 개와 싸우고 덩치 큰 멧돼지를 만나 용케 살아난 전우이기도 하다.

주택단지 담벼락 뒤 어느 누구도 다니지 않는 말라버린 물길을 헤매기도 하고, 길도 없는 언덕 풀숲을 헤치며 가시에 찔리기도 했다. 계곡을 따라 숲도 지났고, 좁고 더러운 골목길도 다녔으며 은행과 우체국, 미장원에도 같이 갔다. 심지어 내부순환로 교각 위까지 언덕을 타고 올라간 적도 있다. 내 평생 늑돌이가 아니라면 해보지 못했을 경험이다.

내가 언덕을 오르며 헉헉대면 앞서가던 늑돌이는 몇 번씩 되돌아와 힘내라는 듯 나를 확인하고, 육교를 내가 천천히 오르면 층계참에서 기다려준다. 올라가든 내려가든 내가 안전해질 때까지 녀석은 나를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며 내가 평지에 비로소 발을 디디면 잘해냈다는 듯이 내게 껑충 뛰어오른다.

그러다 어느 해지는 저녁, 지친 다리를 쉬어줄 겸 너럭바위 위에 내가 몸을 누이고 하늘을 올려볼 때 늑돌이는 가만히 내 옆에 앉아 바람을 맞고 있다. 멀리 마애불을 에워싼 등불이 켜지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아마 누군가 접근하면 늑돌이는 나를 위해 크게 짖을 것이다. 그런 순간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꼭 부비부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다.


|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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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개는 말하지 않아도, 꼭 부비부비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다.

사람과 하는 산책과 개와 함께하는 산책은 무엇이 다를까? 사람과 산책하면 보통 대화를 하게 된다.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순간뿐이고 산책 내내 입을 다물기는 힘들다. 말을 안 해도 같이 걷는 사람을 의식하고 배려하게 되며, 혹 멋진 풍광을 만나면 감탄하며 감동을 나누고자 한다. 아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만큼 사람이란 존재는 자연 이상의 무게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혼자 산책하는 것은 어떤가.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혼자 산책할 때 더욱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내면에 집중하다 보니 미묘한 감정과 생각의 움직임까지 다 파악하게 되어 고요함 속에 오히려 의식은 예민해진다.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런 혼자만의 산책은 물론 나쁘지 않다.

늑돌이와 하는 산책은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산책이다. 늑돌이는 냄새에 열중하고 나는 풀과 나무에 감탄하면서 함께 걷다 개울물을 만나면 건널까 말까 같이 고민한다. 같이 물에 빠지기도 하고, 기다려주기도 한다. 혼자가 아니어서 든든하지만 말은 필요 없다. 내가 잠시 숨을 돌리려고 앉으면 늑돌이도 같이 앉고, 늑돌이가 무슨 냄새에 열중하면 나는 잠시 발을 멈춰 기다려준다.

무엇보다 늑돌이가 아니라면 가지 않을 곳을 많이 가게 되고, 보지 못했을 것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최근 까마귀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물가의 환상덩굴이 다른 수초들을 다 이기고 퍼져나가는 것도 목격하게 되었다. 줄기에 가시가 달린 이 풀은 외래종인데, 물과 모래톱에 잘 어울리는 다른 수초들을 깡그리 사라지게 만들 만큼 위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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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교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잃어버린 순수한 친교에의 갈망이 깃들어 있다.

봄이면 오리가 새끼들을 거느리고 헤엄치다 가을이 되면 그 새끼들이 모두 튼실한 오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물가의 백로와 왜가리는 언제나 물가를 따라 날아다닌다는 것도 알았다.

봄과 여름에는 비가 한번 내릴 때마다 얼마나 많은 풀이 쑥쑥 자라는지 모른다. 세상은 크고 멋진 갑목(甲木)들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 세상을 이루어주는 것은 돌멩이 틈에서도 자라는 연약한 듯 끈질긴 저 을목(乙木)들이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을목에 기대어 또 수많은 벌레가 살아간다. 음지에는 어떤 벌레들이 많이 사는지도 알게 되었고(썩은 낙엽을 들치면 볼 수 있는 동글납작한 벌레다), 비가 온 뒤 개울가 산책로에는 소금쟁이가 땅에 고인 물 위를 썰매 타는 것도 보았다.

방금 죽은 비둘기의 시체에 개미가 비둘기의 눈가에 제일 먼저 들러붙는 것을 늑돌이와 함께 앉아 한참 구경했고(단순히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 경이롭게 보인다), 몇 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쥐도 보았다. 나무에서 매미가 전자음을 내며 떨어질 때 나는 고장 난 장난감 헬리콥터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지난해 초봄, 아무도 없는 백사실 계곡을 늑돌이와 함께 걷다가 늑돌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풀숲 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다. 토낀가? 토끼라면 이렇게 느리게 움직일 리가 없다.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던 늑돌이가 갑자기 총알처럼 풀숲을 향해 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줄에 걸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늑돌이를 위해 나는 풀숲 가까운 길로 걸어가 보았다. 그러자 작은 새 예닐곱 마리가 뒤뚱거리며 경사면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문득 ‘까투리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과연 까투리가 맞았다. 봄에 예닐곱 마리씩 무리지어 다닌다는 설명도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한 번도 까투리를 본 적 없는 내가 어떻게 알아봤을까? 집단무의식이 작동한 걸까, 아니면 사람의 의식은 배우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 맞는 걸까?

| 그림 같은 풍경 속에 개와 함께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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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돌이가 아니었으면 물가와 풀숲을 다니며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늦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계곡은 산수화 그 자체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대지가 숨결을 토해낸 듯 대기는 아지랑이로 가득 찬다. 옅은 회색과 갈색으로 잠긴 계곡과 언덕은 청전 이상범의 그림 그대로다. 늑돌이와 나는 그림 속에 들어와 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가지는 겨울과 마찬가지인데, 어딘가 다르다. 겨울 동안 만날 마른 가지를 붙잡고 오르던 언덕에서 어느 날 가지가 부드럽게 휘는 것을 깨달았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복숭아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봄날 계곡의 작은 시내에는 물이 아니라 꽃잎이 흘러간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늑돌이는 오리를 쫓느라 바쁘다. 그 봄날 나와 늑돌이는 그 계곡을 돌고 돌아 길도 아닌 길을 찾아 헤매다 내려왔다. 암, 본래 무릉도원에서는 헤매는 게 제격이지!

그러나 내가 진실로 뼛속 깊이 아름다움을 느낀 계절은 겨울이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라고 하는 날, 눈은 두꺼운 빙판이 되어 걸음조차 쉽지 않은 늦은 오후 늑돌이와 함께 나갔다. 나는 두둑하게 껴입었지만 늑돌이는 제 털에만 의지한 채 기꺼이 따라 나선다. 이런 날씨에 오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숨도 쉬지 않고 멈춰버린 듯하다. 시간이 사라지고 공간도 입체감을 잃는 것 같다. 지는 해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비칠 때 늑돌이와 나는 세상에 단 둘이 있는 것 같다. 얇은 평면 같은 그림 속에 늑돌이와 나만 입체감을 지닌 존재로 움직이는 것 같다. 영화 속 화면이 멈추고 주인공만 움직일 때와 비슷하다고 할까.

보름달이 뜨는 밤 계곡에 오르면 계곡은 은은한 조명이 비친 무대로 변한다. 소나무 가지 위에 걸린 보름달이 크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산에서 앵두도 따먹고 살구와 풋감이 떨어진 길도 숱하게 지났다. 어릴 때 보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채송화와 맨드라미, 나팔꽃도 보고, 비 오면 나타나는 무당개구리와 여름날의 송장메뚜기도 이젠 친숙해졌다.

폭풍이 오던 날, 늑돌이와 나는 홍지문 아래 개천가로 내려가 오간수다리를 지났다. 비 오고 바람 불 때 이곳은 더욱 아름답다. 홍지문의 옛 성벽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고, 성벽 아래로 흐르는 물가에는 나무들이 바람에 가지를 머리카락처럼 휘날린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시 구절이 절로 나온다. 사람의 마음이 우주를 창조한다는 말이 맞는다면, 이런 멋진 바람과 나무를 창조한 그 마음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이런 날씨에 개를 데리고 나오는 사람은 물론 없다. 물가가 모두 우리 차지여서 늑돌이와 나는 더욱 신이 난다. 바람에 날아가는 우산을 쫓기도 하고, 젖은 얼굴로 서로 바라본다. 웃음이 절로 난다. 누런 물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그 많던 오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늑돌이는 한결 짙어진 흙과 풀 냄새를 맡다가 산책로 가까이까지 차오른 물을 보며 “컹! 컹!” 짖어본다.

| 첫 외출은 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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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한 지 1년이 지나자 늑돌이는 다른 개와 같이 냄새 맡고 나란히 앉기도 했다.

바람도 비도 잦아들면 세상은 제색(霽色)의 신선함으로 윤이 나기 시작하고, 어디선가 오리들이 날아와 얼마 남지 않은 모래톱과 물가의 풀숲에 자리를 잡는다. 왜가리와 쇠백로가 물에 잠긴 산책로까지 올라와 있다가 늑돌이가 뛰어가니 날아올라 성벽 위와 나뭇가지 위에 우아하게 내려앉는다. 왜가리는 심사정의 그림 속 새처럼 아름답다.

늑돌이가 산책로를 따라 난간삼아 박아둔 바위 위에 올라가 아래를 보며 자꾸 짖기에 내려다봤더니 바위 아래 폭 파인 곳에 넓적부리 황새를 닮은 새가 비에 젖은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다. 오래전 만든 이 산책로는 그래도 이런 바위가 있는데, 요즘 만든 산책로는 위는 풀 한 포기 용납하지 않는 우레탄을 깔고 아래는 물가까지 그냥 시멘트로 깔끔하게 막아놓았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늑돌이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렇게 물가와 풀숲을 다니며 자세하게 관찰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무와 풀, 벌레와 새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겠지만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사람만 사는 줄 알았다가 사람보다 더 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발견한다. 문득 어린 시절엔 이 세계와 가까웠다는 게 떠오른다.

늑돌이와 산책하면서 내 눈은 세 개가 된 것 같다. 내게 이런 산책은 근사한 ‘보너스’지만 개에게 산책은 호흡과 같은 거라고 한다. 흔히 산책을 운동으로 생각하지만 산책의 진짜 목적은 새로운 냄새를 맡고 다른 사람과 개들에게 익숙해지는 것이다.

또 다른 흔한 오해가 개가 오줌을 누는 것이 영역 표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의 오줌은 ‘언어’에 가깝다. 다른 개가 오줌 눈 곳을 냄새 맡고 어떤 개들이 지나갔는지 다 알게 되고, 자신의 오줌도 묻힘으로써 그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산책은 많이 움직이고 멀리 가는 게 능사가 아니라 냄새를 충분히 맡고 오줌을 누며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 달쯤 되어 드디어 바깥세상으로 나서는 날, 늑돌이는 난생 처음 목줄을 걸고 집을 나와 집 앞 작은 도로에 섰다. 늑돌이는 곧 거리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좁은 길에도 차가 다닌다. 늑돌이는 환한 전조등을 켜고 달려드는 차에 놀랐는지, 아니면 다른 개와 고양이의 냄새를 한꺼번에 맡은 자극 때문인지 갑자기 길 한가운데 똥을 누는 게 아닌가! 개가 바깥에서 똥을 눈다는 것은 알았지만, 늑돌이는 집에서 잘 누어왔으니 바깥에서는 안 눌 줄 알았다. 똥 치울 준비도 하지 않고 나선 초행길이라 얼마나 당황했던지.

똥과 함께 시작한 우리의 산책은 집 앞 공원을 거쳐 나날이 조금 더 먼 곳으로 나아갔고, 다른 개들도 하나둘씩 만나기 시작했다. 처음 조심스레 산책길에 나서던 시절, 하루는 작은 암컷 한 마리와 그 주인아저씨를 만났다. 다른 개와 친해질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에 인사를 나누기 위해 다가가는데 그 작은 암컷(물론 늑돌이보다 한참 나이가 많다)이 늑돌이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늑돌이는 냅다 달려 세검정천변의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나도 서툴긴 마찬가지여서 늑돌이의 돌발 질주에 목줄을 놓쳤고 하마터면 늑돌이는 냇가로 떨어질 뻔했다. 그런데도 그 개 주인은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화가 났지만, 놓친 목줄을 잡느라 항의할 여유도 없었다.

그 개는 그 뒤 다시 만났는데, 그 녀석이 늑돌이를 만만하게 봤는지 또 덤벼들었다. 이번에도 그 아저씨는 자기 개를 전혀 통제하려고도 않고 늑돌이가 놀라 뒷걸음질 치는 꼴이 만족스러운 듯 빙글거리고 있었다. 사실 개가 다른 개를 보고 짖거나 으르렁대는 것은 무서워서 그런 것이지만, 이 암컷의 경우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기 개가 늑돌이를 공격하는 것이 기특하다는 듯 보고 웃는 그 아저씨가 더 못마땅했다.

‘이 사람은 집에 돌아가 식구들에게 자기 개가 몸집도 큰 수놈을 겁먹게 했다고 자랑할 테지. 아마 자식이 다른 애를 패고 들어와도 잘했다고 칭찬할 작자야.’

그깟 개들의 기 싸움이 뭐라고 이런 악의적인 상상까지 하게 되는지, 참 어처구니가 없다. 다른 개와 처음 만난 기억이 이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인지 늑돌이는 한동안 다른 개가 나타나면 바짝 경계하며 같이 짖게 되었다.

물론 우호적인 만남도 있다. 산책한 지 1년이 지나자 다른 개가 짖어도 못 본체하고 지나갈 줄 알게 되었고, 다른 개가 얌전하게 접근하면 같이 냄새 맡고 나란히 앉기도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듯 개 한 마리가 제대로 크는 데도 온 동네의 개가 다 행복하고 버릇이 좋아야 한다.

| 멧돼지와 맞닥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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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에는 늑돌이와 아무도 없는 계곡에 올랐다가 사진과 비슷한 크기의 멧돼지를 만나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처음에 늑돌이와 주로 가던 곳은 동네에 있는 백사실계곡이다. 추사 김정희의 여름별장 터가 있는 그 계곡은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시원하고 별장 터에 오르면 언제나 바람이 일어 옛사람의 풍수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봄과 여름 휴일에는 사람들이 모일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동네 사람의 통행로(세검정에서 부암동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자 산책로다. 그러나 사람이 없을 때 올라가면 좀 으스스하다. 인적 드문 계곡을 오르는 건 언제나 무섭다. 그런데도 발 길은 계곡을 향한다. 오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싶어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봄, 아무도 없는 계곡에 올라갔다가 왼쪽 능선을 따라 늑돌이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언덕 아래 풀숲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누가 큰 개를 풀어 놓았나 보다’고 생각했다. 가끔 별장 터에 개를 풀어놓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기척은 없이 동물의 움직임만 들린다.

나는 제어할 주인도 없는 큰 개가 올라오면 곤란하겠다 싶어 발걸음을 좀 빨리 했다. 언덕을 올라온 큰 개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발자국 떼기 무섭게 왼쪽 언덕에서 쏜살같이 올라온 멧돼지가 내 뒤를 지나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갔다. 뒤를 돌아본 나는 그 멧돼지의 엄청난 덩치와 속도에 놀랐지만 다행히 멧돼지는 사라졌다. 다행히 짖지 않았던 늑돌이와 나는 부리나케 계곡을 내려와 계곡 입구에 있는 절 현통사 뒤편에 당도해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날 이후 백사실계곡에 갈 때면 언제나 긴장이 되곤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마침 햇살이 좋은 휴일 오후 용기를 내어 계곡에 올랐다. 모처럼 봄볕이 비치는 날이라 계곡에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좀 한적한 곳으로 가고 싶어 이번엔 오른쪽 언덕을 택해 올라갔다. 그 길을 따라가면 막다른 길이 나오고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면 주택가가 나오는데, 철조망이 쳐져 있다. 아마 멧돼지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

언젠가 그 철조망의 개구멍을 발견하고 기어서 나간 경험이 있는데, 이날은 계곡에 오를 때 이미 멧돼지를 또 만날 것 같은 기분이어서 철조망까지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되돌아가자 싶어 나오는데, 내가 못 본 길을 발견했다.(길은 아니지만 걸어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큰 공터에 역시 주택가와 철조망이 보였다. 공터에는 햇살이 환히 비치고 주택가 너머 큰길에 차가 다니는 소리가 생생하다.

‘이렇게 밝고 차 소리가 나는 곳이라면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겠지.’

| 죽음이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다

늑돌이와 나는 나무 사이로 낙엽이 수북이 쌓인 경사면을 내려갔다. 그렇게 공터 어귀에 다다라 확 트인 공터가 눈에 들어오는데, 저쪽 큰 나무 아래에 멧돼지가 나무둥치에 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아차! 싶어 몸을 돌리는데 늑돌이와 눈이 마추졌다. 늑돌이는 내 눈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짖지도 않고 나를 따랐다. 멧돼지를 만나면 지그재그로 도망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 다리로 언덕을 어떻게 지그재그로 뛰어올라가나?

낙엽 밟는 소리에 멧돼지가 우리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나는 멧돼지가 우리를 알아봤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을 멧돼지 역시 알아차렸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과정이 무한 반복할 수 있을 정도로 멧돼지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훤히 알았다. 이것도 소통이라고 해야 하나? 자연에서 포식자와 희생자 사이에는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어떤 식으로 동의가 이루어지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저항도 하지 않으며 무심한 듯 발걸음만 빠르게 올라갔다.

‘저렇게 큰 멧돼지에 받히면 중상 내지 사망이겠지. 멧돼지가 공터를 가로질러 올 때까지 2초가 걸릴까, 3초가 걸릴까?’

어차피 승산이 없다. 내 등을 강타할 충격파를 떠올리며 다만 내게 어떤 악의나 공격성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기 바랐다. 멧돼지는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몇 번 발을 구르더니 곧 다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돼지가 나를 발견하고 뛰기까지 불과 몇 초 동안 멧돼지와 내가 ‘마음을 나누고’, 내가 마음을 가다듬고, 늑돌이와 눈빛을 교환할 정도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한순간 뛰는 소리가 멈췄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덕을 다 올라오고 나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뒤돌아 보지 말라’는 금기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북적대던 계곡 통행로에 다다르자 거짓말처럼 사람이 하나도 안 보였다. 그새 해가 지면서 계곡은 그늘에 잠기는 중이었다. 계곡을 올라가 부암동으로 빠질까 하다가 언제라도 그 멧돼지를 또 만날 것 같아 이번에는 예감을 무시하지 않고 현통사 앞으로 내려갔다. 절 입구 층계에 앉아 우리는 한참 앉아 있었다.

죽음이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는 사실과 그 급박한 순간 내 마음 저 아래는 놀랍게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와 늑돌이, 멧돼지는 그 계곡에서 모두 한마음 한통속이었다. 우리 셋은 각자 최선을 다했음을 알았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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