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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가동 중단된 월성원전 주변 마을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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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대책을 요구하며 2년 넘게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월성원전홍보관 옆에서 천막농성 중인 주민들을 13일 오전에 만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같은 당 정현주 경주시의원(비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승우 기자

아이고, 말도 마소. 내 칠십 평생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요. 아직도 손이 후들후들거려요. 지진이 왔구나 싶었을 때는 넋놓고 있다가 정신 차린 뒤에 옷이랑 이불만 챙겨서 후딱 집을 나왔어요.”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주민 정임생(71) 할머니는 지난 12일 오후 집에서 저녁을 먹고 쉬던 중 깜짝 놀랐다. 전례없는 5.8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창문이 수초 동안 덜컹거리면서 집 전체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터졌나 싶어 집 밖을 나와보니 2층에 사는 주민이 “얼른 집 밖으로 나오세요”라고 소리쳤다. 당장 입을 옷과 이불만 급히 챙겨서는 2층 주민과 함께 400여m 떨어진 나산초등학교로 대피했다. 이곳에는 대피방송을 듣고 주민 수십 명이 와 있었다.

정 할머니는 13일 오전 1시쯤에서야 귀가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자는둥마는둥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인 나아리가 월성 원전과 불과 1km정도로 지척이다.

정 할머니는 “경남 창원에 사는 딸과 경북 구미에 사는 남동생이 지진 때문에 난리가 났다면서 원전은 이상 없느냐고 급히 전화가 왔다”며 “밤에 퇴근한 원전 직원들이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오후 7시44분과 8시32분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1과 5.8의 지진 여파로 월성 원전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이 마을에서 반경 1㎞가량 떨어진 곳에 월성 1·2·3·4호기와 신월성 1·2호기 등 원전 6기가 밀집해 있어서다.

지난 7월 울산 인근 동해 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해 크게 놀란 데다 1978년 이후 국내 관측 사상 최대인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하자 주민들의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은 듯했다.
월성 원전 인근 마을인 양남면 나아리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김미영(49·여)씨는 “1차 지진 때 마트 진열품이 쏟아지고 건물이 흔들거렸는데 뒤이어 더 큰 규모의 2차 지진이 왔다”며 “2차 지진 강도는 지난 7월 울산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 보다 훨씬 더 심한 것 같아서 원전이 터진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식겁했다”고 말했다.

전인식(75) 나아리시범마을추진위원장은 “4층 아파트 전체가 크게 흔들릴 정도의 지진을 생전 처음 겪는 바람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2011년)가 우리 동네에도 닥쳤구나 생각했다”며 “규모 6.5 지진에도 견딜 수 있게 내진설계가 됐다는 원전이 규모 5.8 지진에 수동 정지해 원전 주변에 사는 800여 명의 주민들이 불안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2차 지진이 발생한 뒤 약 3시간만인 12일오후 11시56분부터 1·2·3·4호기의 가동을 순차적으로 수동정지했다. 지진에 따른 안전점검을 위해 월성원전의 가동을 수동정지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월성 원전에 따르면 1·2·3·4호기는 준공년도가 각각 1983년, 1997년, 1998년, 1999년이며 가압중수로형이다. 신월성 1·2호기는 2012년, 2015년에 각각 준공됐으며 가압경수로형이다. 각 원전은 규모 6.5의 지진에 견딜 수 있게 내진설계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수원은 “지진행동 매뉴얼에 따라 위기경보를 발령해 긴급상황에 대비하고 있다”며 “월성, 한울, 고리, 한빛 등 4개 원전본부 등 전체 점검한 결과 시설 안전에는 이상 없이 정상 운전상태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설계기준 지진 분석값인 0.2g보다 작지만 자체 절차에 따라 정지기준인 0.1g을 초과한 월성 1·2·3·4호기는 추가 정밀 안전점검을 위해 수동정지했다”며 “신월성 1·2호기는 측정분석된 값이 정지기준을 초과하지 않아 정상운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월성원전 관계자는 “원자력법에 따라 방사능 누출 등 안전사고에 대비해 주거를 금지하는 중수로형 원전의 제한 구역 범위는 원전으로부터 반경 914m이며 경수로는 560m”라며 “나이리 마을은 914m 제한구역 밖에 있는데다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매뉴얼에 따라 긴급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환경단체는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며 노후 원전의 폐쇄를 촉구하고 나섰다. 경주환경운동연합 등 경주지역제시민사회단체 회원 10여 명은 이날 오전 경주시청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 사무국장은 “정부에서 한반도는 지진의 안전지대라고 주장하며 원전을 건설했는데 최근 울산 지진에 이어 어제 발생한 강력한 지진으로 그 전제가 잘못됐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라며 “현재 가동 중인 노후 원전을 시급히 폐쇄하고 신월성 1·2호기도 추가로 가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지금부터 지진에 적극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부산대 손문(지질환경학과) 교수는 “7월에 울산 앞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각에서는 더 큰 규모의 지진이 국내에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정부가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한반도의 활성단층지도 제작을 추진하는데 이는 20~30년이 걸릴 방대한 작업이다. 우리나라도 강력한 지진이 언제든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하루빨리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강승우 기자 kang.seung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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