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1)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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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치세(治世·훌륭한 통치) 뒤엔 난세(亂世)가 온다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은 왕조나 국왕의 교체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태조 왕건의 사후 장남 혜종(惠宗·912~945년, 943~945년 재위) 때도 그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혜종이 병을 앓자 왕규(王規)가 딴 뜻을 품었다고 한다. 품었다는 ‘딴 뜻’은 태조의 16번째 부인이 낳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를 ‘왕규의 난’이라 했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3층 및 5층 석탑. 1988년 발굴 결과 10세기에 건립된 2층 높이의 대형 사찰터가 확인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조용철 기자

?약 100년 뒤 이자겸(李資謙)은 왕규와 같은 길을 걷는다. 딸들을 각각 예종과 그의 아들 인종의 비로 들인 왕실 외척 이자겸은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 이를 보다 못한 인종은 1126년 2월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을 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모두 불타고 스스로 왕위를 이자겸에게 물려줄 뻔하는 수모를 겪는다. 인종이 먼저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벌어진 사태인데도, 그뒤 석 달 만인 1126년 5월 인종의 사주를 받은 측근 척준경에 의해 이자겸이 제거되자 왕실 사가들은 이자겸에게 모든 잘못을 씌워 ‘이자겸의 난’이라 기록했다. ??


?요와 소 형제는 각각 왕건의 차남과 3남이지만, 제3비인 충주 유씨(劉氏)의 자식으로 혜종과는 배다른 형제다. 이들의 음모를 알고도 혜종이 딸을 소에게 출가시킨 건 강력한 외가 세력을 업고 있던 이들 형제와 관계를 터 왕위를 유지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요와 소의 외가가 있던 충주는 중부 내륙의 요충지로 남부의 영남 지역, 북부의 강원도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 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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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이 병석에 눕자 왕규를 미워해 다투던 박술희는 군사 100여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정종은 박술희가 딴 뜻이 있음을 의심하여 (강화도) 갑곶에 귀양을 보냈다. 이것을 빌미로 왕규가 왕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고려사』 권88 박술희 열전) ?

혜종의 묘인 순릉. 개성시 송악면 자하동에 있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 ?정종이 박술희를 귀양 보내자, 왕규가 거짓으로 왕명을 만들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규와 박술희가 갈등을 빚자 정종이 그 틈을 이용해 박술희가 딴 뜻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낸 뒤 그를 죽인 것이다. 왕규는 혜종에게 요와 소 형제의 음모를 알렸으나 혜종은 도리어 자신의 딸을 소(광종)에게 혼인시켜 사태를 무마하려는 유화책을 펼쳤다. 이에 반발한 왕규가 혜종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왕규의 반발은 정종 세력에게 정변의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박술희와 왕규의 이탈로 세력을 잃은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배다른 동생에게 허무하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그뒤 혜종은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요컨대 혜종 때 일어난 왕실의 정변은 외척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 형제가 왕위 계승의 욕심을 드러낸 ‘왕자의 난’이었다. ? ?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내부의 권력게임이 아니었다. 고려 건국 이후 통일전쟁을 위해 왕권과 호족세력이 타협과 공존, 조화와 균형 속에 유지해온 정치질서가 이 정변을 계기로 크게 요동치게 됐다.

평양성 칠성문. 평양성의 북문이다. 성 앞에 방어용으로 작은 성(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때와 고려 태조 5년(922년) 각각 축조되었다. 1712년(숙종 38) 개축되었다.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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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 충주 두 세력의 결합을 통해 정종과 광종 형제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에 혜종과 그 후견인 역할을 한 서해 남부 나주의 혜종 외가, 한강의 수운(水運)을 관장했던 광주의 왕규와 당진(면천)출신 박술희의 몰락으로 해상세력은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왕건의 강력한 카리스마 앞에 숨죽였던 정치의 야만성이 혜종 시절 왕자의 난을 계기로 본색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정치질서의 형성과 함께 험난한 격변을 예고하게 된다.?


?고려 제3대 왕인 정종(定宗: 923∼949년, 945∼949년 재위)은 즉위한 직후 왕규와 박술희를 제거해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왕식렴(王式廉)을 공신으로 책봉한다. 공신 책봉 조서를 보면, 그 내용이 지나치다. ‘만석의 넓은 땅과 9주의 목사직’을 주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왕식렴을 치켜세우고 있다.


? ?왕규가 제거될 때, 연루자 3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박술희가 제거될 때도 그를 호위한 100여 명이 함께 제거됐을 것이다. 이같이 왕식렴 군대에 의해 수백 명이 살육당한 정변의 현장, 개경은 공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것이다. 최승로는 “혜종·정종·광종을 거치면서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료 절반이 살해됐다”(『고려사』권93 최승로 열전)고 했다. ??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 광군(光軍)이 이 탑의조성에 동원된 사실이 탑의 기단부에 기록되어 있다. 경북 예천 소재. [문화재청]

수도 개경은 정종이 왕 노릇을 하는데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정치의 무대를 바꾸는 것이 필요했다. 그 대안은 강력한 후견인 왕식렴이 있는 서경이다. 정종의 부왕 태조 왕건이 일찍부터 서경을 재건하고, 그곳을 도읍지로 삼으려 했다. 태조는 사촌동생인 왕식렴을 보내 평양을 지키게 했다. 평양 재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뒤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던 것이다. 태조는 천도는 할 수 없었지만, 국왕이 1년에 100일 이상 서경에 머무르며 왕조의 안녕을 빌 것을 희망했다. 풍수지리의 서경 길지(吉地)론이나 건국이념의 고구려 계승론 때문에 서경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현실적인 이유다. 태조는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 황주·봉주·해주·백주·염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켰다(『고려사절요』권1 태조 1년 9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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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서경을 중시한 현실적인 이유는 이곳 호족세력의 지지를 얻어 그들의 군사력으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삼한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경 길지론과 고구려 계승론도 그런 명분의 하나로 내세워진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건이 삼한통합 후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건 개경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개경이 왕건의 태생지이자 본거지라는 점도 그러했다. 후원자 왕식렴이 서경에 있었지만, 부왕의 선례로 보아 정종의 서경 천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즉위 후 곧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 ? ?서경 천도는 947년(정종 2)에 착수하는데, 그 계기는 거란의 위협이었다. 태조의 문사인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은 중국 후진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체포되었다. 거란은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알고 관리로 임용했다. 947년(정종 2) 그는 거란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장차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 정종은 그에 대비해 30만 명의 광군(光軍)을 조직하고, 그런 조직을 관리하는 전담기구로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한다. 또 같은 해(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국경지역에 대대적인 축성도 한다. 광군의 조직은 결국 호족이 지닌 군사력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종의 중앙정부는 광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서경 천도는 수도 개경 기득권층의 반발에 그쳤지만, 광군의 조직은 전국에 걸친 호족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이로 인해 서경 천도도 다시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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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의 서경 천도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원망을 불러일으킨’ 무모한 정책, 즉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이다. 명분과 취지가 훌륭해도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다.?


?고려 5대 국왕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된 광종이 일으킨 숙청의 광풍을 뚫고 어렵사리 즉위한다. 숙청의 회오리바람은 경종의 사촌이자, 혜종과 정종 아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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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23호 203년 5월 19일, 제324호 2013년 5월 26일, 제327호 2013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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