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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즐기는 게 문화” 봉산탈춤 덩실덩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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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8 면

한글박물관에서는 봉산탈춤을 체험했다.

아름지기 한옥에서 거문고·기타 앙상블의 연주를 감상하는 각국 대표들.

지금 세계는 한류 열풍이 뜨겁다. 드라마와 영화에 이어 K팝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만으로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모두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과 게임 같은 대중문화에서 우리보다 한발먼저 세계를 제패한 일본은 수세기 전부터 자국 문화를 알려왔다. 그 결과로 일본 문화가 미술과 무용 등 고급예술 분야에서도 영감의 원천으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내셔널 아이덴티티가 담긴 문화는 외국인들에게 아직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러 매년 세계의 문화인들이 한국에 모여든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 연구원(CICI·이사장 최정화)이 2010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문화소통포럼(Culture Communication Forum·CCF)이다. 올해는 17개국 19명의 문화계 대표들이 4일과 5일 이틀간 한국 문화의 정수를 체험했다. 6일에는 ‘문화 소통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연결!’을 주제로 하는 토론회를 했고 저녁에는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300여 명이 참가한 ‘문화 소통의 밤’이 이어졌다.


세계 문화계를 좌지우지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서울 어디서 어떤 문화를 체험하고 어떤 영감을 얻었을까. 이틀간의 탐방 현장에 중앙SUNDAY S매거진이 함께 했다.

가구박물관 관람은 한복을 갖춰 입고 진행됐다.

아름지기에서 한옥의 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아름지기에서 퓨전 한식을 맛보는 대표들.

4일 오전 11시 50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전통 한옥을 모던하게 꾸며놓은 공간속으로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들어섰다. 백발의 백인부터 레게머리 흑인까지,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CCF2016에 참가하는 각국 대표들이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이 무거운 방식이 아니라 컨템포러리하게 소개되길 원한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가실 거라 믿는다”는 아름지기 신연균 이사장의 덕담과 함께 투어가 시작됐다.


소나무 결을 그대로 살린 한옥의 구조와 디자인 가구, 전시된 한복을 둘러보며 대표들은 한국 전통의 모던한 매력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미국의 재즈 뮤지션 팀 스트롱은 방 한켠에 세워놓은 두루마기 빛깔에 마음을 뺏긴 듯했다. “조용한 옥색 빛깔이지만 미묘하게 톤의 변화를 줬네요. 빨간 매듭으로 포인트를 준 감각도 무척 세련됐어요.”


장영석 사무국장이 “한옥은 바깥 풍경을 즐기는 멋”이라며 벽면 같았던 ‘히든 윈도우’를 열어젖히자 탄성이 터졌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길 건너 펼쳐진 경복궁 담벼락 풍경에 프랑스 슈베르니성의 성주 샤를 앙투완 비브레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국에 현대적 빌딩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곳이 있네요.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과 현대적인 디자인이 결합한 공간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공간 투어 후 퓨전 한식 메뉴로 짠 오찬이 나왔다. CCF 조직위원장 디디에 벨투와의 “위하여” 선창 이후 토마토두부샐러드, 버섯불고기구이, 북어포더덕무침 등이 서빙됐다. 한국인 입양아 출신으로 프랑스 유명 레스토랑 셰프인 피에르 상 보이예는 주방이 궁금해 내내 엉덩이를 들썩였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유기농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이 딱 엄마 손맛이에요. 젊은 셰프들이 어떻게 이런 솜씨를 내나요. 처음 먹어보는 맛도 있어 재료도 궁금하고요.”


자신의 레스토랑에서도 된장·고추장 등 한식 재료를 즐겨 쓴다는 그는 식전주로 나온 오미자 와인에 매료돼 버렸다. “오미자는 한국에서만 나는 열매라 한국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서 좋아하거든요. 프랑스에 수입이 안 돼 한국에 올 때마다 사가서 젤리나 디저트를 만들죠. 프랑스 셰프들은 새로운 식재료에 늘 관심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늘 추천하고 있어요. 수입할 길이 어서 뚫렸으면 좋겠네요.”

각국 대표들은 탈춤 체험을 무척 즐거워 했다.

바리스터 폴 바셋 .

“현악기면서 리듬 악기 역할하는 거문고 인상적” 식사 후에는 거문고 연주자 박희정과 기타리스트 권정구의 앙상블 연주가 이어졌다. 창작곡과 거문고 산조, 아리랑까지 총 3곡이 연주됐다. “뉴질랜드 로토루아 호수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곡”이란 소개에 뉴질랜드 뮤지션 타마 와이파라는 사뭇 감동한 눈치다. 팀 스트롱은 “현악기면서 리듬악기 역할을 하는 거문고가 인상적이다. 두 사람이 교감해서 만드는 구조 속에 자유와 여백이 느껴지는 것도 유니크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싱가포르의 공연예술센터인 에스플러네이드의 CEO 벤슨 푸아는 “심플하지만 세심하게 디자인된 한옥 공간에서의 연주가 미학적으로 뛰어났다”며 “많이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직접 체험하고 느끼게 하는 방식이 좋았다”고 했다. “문화는 저 위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귀한 손님 접대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함께 즐기는 문화가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의 말마따나 각국 대표들이 가장 즐긴 건 체험 프로그램이었다. 5일 오후 용산구 한글박물관에서 한글의 창제 원리 등에 관한 해설을 얌전히 듣고 있던 대표들은 스크린에서 봉산 탈춤 영상이 흐르자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해설사가 “잠시 후 배워 볼 것”이라고 귀띔하자 “위 아 레디!”를 외치며 워크숍 장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얼씨구” “잘한다” 등 시연자의 추임새가 입에 잘 붙지 않는 듯 어설프게 따라하던 대표들은 막상 한삼을 팔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너나없이 춤꾼으로 거듭났다.


외국인들이 과연 제대로 따라 할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조교들이 팔동작부터 발디딤새, 회전과 추임새까지 차례차례 보여주자 “둥둥둥산아 둥기둥기 둥산아”하는 자진모리 장단이 어느새 몸에 붙었다. 한삼 자락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 보니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말레이시아 전통무용가인 로즈난 라만도 상기된 표정이었다. “무용가 입장에서 춤 동작은 중국과 비슷해요. 하지만 춤 안에 관계성을 담는 것이 매우 독특합니다. 춤을 추다 옆 사람과 인사하고 서로 웃음을 교환하는 것이 굉장히 생동감 있게 느껴졌고,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됐어요.”


한국 전통미를 대표하는 명소로 떠오른 성북동 가구박물관 방문도 이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듯했다. 입장 전 최정화 CICI 이사장이 “모두 한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가자”고 제안하니 대표들은 일제히 “오 예!”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각자 신체 사이즈에 맞춰 세심하게 준비된 궁중복식 스타일의 우아한 한복을 덧입으니 격조 있는 한옥공간에 썩 어울렸다. 인도네시아의 의상 디자이너 하리 다르소노는 “태권도나 살사춤도 출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타이트해서 움직이기 어려운 자국 전통의상에 비해 한복은 품이 넉넉하고 움직임이 자유로워 실용적인 현대 의복으로도 개량 가능할 것 같다는 얘기다. 터키 무용가 베이한 머피와 일본의 저널리스트 요시다 준꼬는 “공주가 된 기분”이라며 입을 모은 뒤 정원 여기저기서 인증샷 삼매경에 빠졌다. 강병인 캘리그래퍼가 일일이 한글로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은 한지부채도 썩 잘어울렸다.


전시실에서 다양한 고가구를 매개로 한국인 생활문화가 소개되자 대표들은 ‘차경(借景)’의 개념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안채 제일 깊숙한 방에 들어가 방석에 앉아 창문을 여니 남산타워를 비롯해 서울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여기 앉아 있으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서울 풍경 전체를 소유하는 셈”이라는 해설사의 말에 다들 공감을 표현했다. 유명 바리스타인 호주의 폴 바셋도 그 풍경에 홀딱 반한 얼굴이었다. “한국에 사업차 여러 차례 왔지만 문화 체험은 처음이거든요. 옛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들려주니 재미있네요. 새로운 영감을 듬뿍 받아갑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표들은 북장사 괘불의 규모에 감탄했다.

신라 금관을 둘러보는 대표들.

경천사지십층석탑

폴 바셋 “한국 문화 체험은 처음, 새로운 영감 듬뿍 받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신라 금관을 시작으로 고려, 고려 불상과 특별전시중인 초대형 고려불화 ‘북장사 괘불’ 등을 둘러봤다.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선임연구원 베스 맥킬롭은 길이 13m에 달하는 불화의 규모에 적잖이 놀란 눈치다. “이런 규모의 대형 불화가 잘 보이도록 위치와 시야도 잘 잡았고 보존상태도 아주 좋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살짝 미소띤 반가사유상의 얼굴도 화제가 됐다. “일본에서는 미소 띤 불상을 보지 못했다”는 요시다 준꼬는 “한국에서는 불교에 자비와 용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멀리서 보면 고뇌하는 듯 보여도 가까이서 보면 대부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살짝 찌그러진 조선 달항아리에도 관심을 보였다. “백자는 일본에도 많지만 아방가르드한 형태와 예쁜 곡선이 일본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문화 교류가 잦았잖아요. 하지만 일본에선 실용성과 안정감을 중시해 이런 모양의 기물은 만들지 않거든요. 이렇게 서로 다른 점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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