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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적신 책 한 권] 헌책방서 우연히 본 알래스카, 16세 소년은 짐을 꾸려 떠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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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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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바람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70쪽, 1만2800원

1999년은 나에게 혼란스러운 해였다. 공부를 위해 외국을 떠돈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모국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머물고 있는 일본에서 연구를 계속해야 하느냐 고민이 깊었다. 당시는 어디에 살든 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냐는 것이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지도교수와 큰 프로젝트를 열정적으로 할 때였고 그 연구의 과정이 재미있어 물리학자인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30대를 보내고 40을 맞이하는 입장에서 흔들리는 마음도 있었다.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고 가족이 있었다. 세상의 삶과 마음속에 품은 학문이라는 삶이 평행선으로 존재했다. 그 즈음 일본인 친구가 “리상 이 책을 한번 읽어봐” 하면서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였다. 얼음처럼 투명한 그의 글에서 정갈한 박물관의 마루바닥에서 나는 니스냄새와 같은 진실함을 느꼈다.

이 책 가운데 ‘쉬스마레프 마을’ 글을 읽으면서 견고한 돌멩이 같은 얼음 알갱이를 무심코 씹었을 때 머릿속에서 튀는 불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충격은 호시노 미치오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고 있는 동네 형 같은 느낌이 들었고, 세상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호시노는 사진도 잘 찍고 글도 훌륭하게 잘 쓰지만 무엇보다도 멋진 사람이었다. 16살 소년이 도쿄 간다의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서양 원서를 본다는 대목은 멋지다. 운명이었을까?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 ‘알래스카 사진집’ 속 ‘쉬스마레프’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가슴을 뒤흔들어 놓는다. 주소도 없는 베링 해 위에 떠있는 그 마을을 그는 왜 가고 싶어했을까? 그 이유는 가슴 시리게 간단했다. ‘찾아가보고 싶어서’.

그는 그가 선택한 운명대로 알래스카 사진 속 마을에 정착했다. 14년이 지난 후 자신을 알래스카로 이끌었던 사진집의 저자 조지 모블리를 우연히 호텔에서 만난다. 그는 그가 동경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 사진기자였었다. 호시노가 손때가 묻어 책장마다 모서리가 새카맣게 변한, 간다 헌책방에서 구입한 ‘알래스카 사진집’을 조지에게 내 민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집의 저자가 호시노에게 질문을 한다. “혹시 지금 삶을 후회하나요?” 그는 그의 사진집을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좀더 많은 시간과 방황을 했겠지만 결국은 알래스카에 왔을 것이란 대답을 한다.

우리는 이렇듯 현실이라는 번잡한 세상 속에서 살기도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곳 소중한 꿈 속에 살기도 한다. 이 고독한 평행 우주를 어떤 식으로 오가든 상관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 속에서 느끼고 감동하며 열정적으로 보내는 진실되고 소중한 시간들이 아닐까? 그 소중함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마주하냐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다. 왜냐하면 단 한번만 주어지는 본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호시노는 알래스카에서 촬영 중 불곰의 습격으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있다. 그는 지금도 눈 쌓인 벌판 위에 텐트를 치고 알래스카의 바람을 찍고 있지 않을까?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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