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채병덕 장군 의문의 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한국전 개전당시 육군총참모장이던 채병덕 소장이 하동전선에서 미군부대를 안내하다 적탄에 맞아 숨졌다. 이는 6·25전란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장군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억측들이 많았다.
패전의 책임에 눌려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느니, 군인답게 책임을 질 기회를 준다는 명분아래 죽음의 최전선 한복판으로 내몰았다는 등의 얘기들이 의문과 억측을 만들어왔다.
채장군은 개전 초의 어이없는 패전의 책임을 몽땅 걸머져야 했던 단 한사람이다. 그는 그 책임에 번민하다 갔다.
그를 최전방으로 가게 한 것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50년7월23일 그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다. 경남지구편성군사령관이던 채장군은 사령관실로 쓰던 부산역전 철도호텔에서 이 친서를 이종찬 장군(당시9사단장 대령)에게 읽어보라며 내밀었다.
이장군이 대충 훑어보고 뒤에 회고담으로 남긴 친서내용은 이러했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또한 크다.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선이 무너질 것이다. 귀하는 패주중인 부대와 부산지구에 산재한 부상병들을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
장관의 글은 일선에 가기를 소망하던 패장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기는 해도 당사자에게나 보는 사람마다에 엇갈린 해석들을 하게 했다.
『패전의 책임을 혼자 몽땅 뒤집어쓰고 죽음으로써 사죄하라』 『전공을 세울 마지막 기회이니 최선을 다하라』등.
패전의 죄책에 짓눌려 있던 채장군의 심정도 착잡한 듯했다.
측근의 참모들도 『죽음을 각오한 것 같았다』와 『작전임무가 주어져 기운이 난 것 같았다』로 엇갈렸다.
당시 하동 방어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불과 10여일만에 전남북을 질풍같이 흽쓴 적6사단 주력부대가2∼3일 후면 하동마루턱까지 진출할 기세였지만 맞서 싸울 병력이라곤 분산 철수해온 패잔병밖에 없는 상태.
채장군은 24일 참모들을 이끌고 부산-마산지구 각 병원을 직접 방문, 가벼운 부상병 1개 대대를 급편하고 겨우 소총만 들려 오덕준 대령 인솔하에 진주로 보낸 뒤 이날밤 송도 셋방으로 가족을 찾아갔다.
최전선으로 간다는 그의 말은 담담했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 갓 태어난 아들을 영진이라 이름지었다.
「영광의 진격」이라는 그의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그런후 그는 지프 대신 드리쿼터편으로 진주로 향했다.
수행원은 인사참모 이상국 중령(예비역준장)등 측근장교 3∼4명.
채소장은 진주서 미제19연대장 「무어」대령과 만나 1박한 뒤 26일 새벽 하동길을 재촉했다.
이때 장군의 역할은 「무어」대령지휘로 하동방어선에 투입된 미제29연대3대대 「안내역」.
엊그제까지만 해도 총참모장이었던 현역소장이 어째서 부상병 1개 대대의 지휘관으로 전락했다가 또다시 외국지원군 1개 대대의 안내역으로 곤두박질했는지 모를 일이다.
장군은 도중에 하동 바로 남쪽 원전부근서 하루전에 출발시켰던 그의 작전참모 정래혁 중령(예비역중장 전국회의장)을 만났다.
정중령은 이때 『하동에는 벌써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현지상황을 보고했다.
채장군은 그러나 「적진을 향한 행진」을 늦추지 않았다. 미군을 데리고 하동고지의 마루턱에 오른 것은 27일 상오11시30분 전후-.
장군은 쌍안경으로 적정을 살폈다. 이때 건너편 180고지 기슭에서 미군작업복과 국군작업복을 입은 1개 중대 병력이 고지로 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적군이냐, 아군이냐』고 고함을 쳤다.
『드드득….』 바로 그 순간 채장군은 적병들의 기습사격으로 머리와 목위에 치명상을 입고 곧 숨을 거두었다.
상오11시45분. 36세 「뚱뚱보」장군의 최후였다.
6·25개전 당시의 육군총참모장이던 채소장은 북한공산군이 한강도하작전을 시작하던 6월30일 그 직을 해임당했다.
전쟁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지휘관의 전격교체로서 명백한 문책의 뜻을 담고있었다. 그나마 후임은 그때 막 도미교육을 끝내고 돌아온 정일권 소장이었다.
직책을 박탈당한 채소장은 새로운 지휘관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백의종군을 간청했다. 처음 주어진 직책은 경남지구 편성군사령관. 각 부대에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런 그에게 일선출동명령을 왜 내렸는지는 모른다.
전선사령관이 아닌 국방장관이 명령서를 써 보낸 것도 파격적이다.
그 명령서를 받고 전선에 나갔고 곧바로 전사했다.
더우기 그의 전사는 상당기간 비밀에 부쳐졌다. 참모총장마저도 전사했다는 소식이 밀리고 있는 전선의 병사들의 사기를 더없이 떨어뜨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랬지만 병사들은 뒤늦게 그의 죽음을 알았다.
그가 언제 참모총장직을 물러났는지도 모르는 병사들이다. 작전명령이 국방장관한테서 떨어졌다는 것도 이해가 안간다. 장렬한 전사였다면 공식발표를 함직한 지휘관이다. 그것이 의문과 억측의 까닭일 뿐이다. 어쨌든 채장군의 죽음은 그 무렵 대전전투에서 혼자 바추카포로 공산군탱크사냥을 하다가 포로가 된 미24사단장 「딘」소장과 함께 세계전사에 남을 진기록들이다.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