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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고정관념을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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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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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영
라이프스타일부 차장

지난달 패션잡지 보그 표지에 가수 지드래곤이 등장했다. 사진 속 지드래곤은 검정색 샤넬 재킷에 승마 모자를 쓰고 진주 목걸이를 여러 겹 둘러 클래식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냈다. 아름답게 꾸민 여성 톱 모델들 속에서도 지드래곤의 미모는 단연 빛났다. 그는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을 선보이는 국내 대표 스타다. 이날 촬영에서 지드래곤이 입은 옷은 모두 샤넬 여성 컬렉션이다. 샤넬은 남성복을 만들지 않지만, 그는 샤넬의 열혈팬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은 분홍색 트위드재킷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샤넬 패션쇼에 나타나기도 했다.

젠더리스란 성(性)의 구별이 없는, 중성적이라는 뜻이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성 정체성이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성과 여성, 그 사이를 유동적으로 오갈 수 있다는 뜻에서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로도 부른다. 1980년대 유행한 유니섹스 스타일과는 다르다. 유니섹스는 후드티, 청바지 같이 남녀가 똑같은 옷을 입는, 또는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게 된 현상이다.

젠더리스는 최근 패션·문화계의 화두다. 구찌는 최근 남성복인지 여성복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옷 몇 가지를 패션쇼 무대에 올렸다. 남자 모델이 ‘여자 옷’을 입기도 하고, 여자 옷 같은 ‘남자 옷’을 입기도 했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큼직한 분홍색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은 남성 모델, 오버사이즈 항공 점퍼를 입은 여성 모델이 런웨이를 걸었다. 수십 년 동안 각각 연 여성복과 남성복 패션쇼를 내년부터는 아예 하나로 합치기로 했다.

루이비통은 올 상반기 할리우드 배우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를 여성복 모델로 기용했다. 치마를 입고 여성 모델들과 찍은 사진, 상의를 탈의한 채 머리에 꽃을 꽂은 사진이 여름 내내 광고로 뿌려졌다. 그는 평소에도 원피스를 입고 등교하기도 한다.

패션은 남보다 앞서 트렌드를 제시하는 산업이다. 안테나를 세우고 주시하다 보니 변화하는 사회상을 발 빠르게 알아챈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리스 패션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역할을 강요당하지 않고, 성별 구분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대중의 열망을 담은 것 아닐까. 옷은 사회적으로 남녀를 구분하는 중요한 장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젠더리스에 대한 욕구는 패션에만 있지 않다. 일부 영어권 국가에서는 미스터(Mr.)나 미즈(Ms.) 대신 성별을 알 수 없는 믹스(Mx)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he)나 그녀(she) 대신 성별 구분이 없는 ‘지(xe)’라는 대명사를 만들자는 논의도 나온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일고 있다.

대량생산 시대에는 고정된 성 역할이 편리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창의성이 필요한 분야가 늘어나고,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게 절실할 때에는 맞지 않다. 젠더리스 패션처럼 성별 고정관념을 허무는 게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를 풀어나가는 시작이 될 것이다.

박 현 영
라이프스타일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