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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김영란법, 생활문화 바꾸는 계기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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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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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한국인들처럼 열심히 스펙을 쌓고 밤늦게 들어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며, 그런 생활이 힘들어서 힐링이 사회적 필수품처럼 되어 있는 국민은 없다. 관료·학자·회사원·학생들 모두 너무 바쁘게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국민들이 모여 사는 한국 사회는 왜 자주 마비되고 경제는 날로 정체되어 가는가?

지금 방식으로는 선진국 어려워
경조사보다 전문 분야 축적하고
연줄 아닌 실력·전문성 경쟁해야
단기적 부정적 영향 있겠지만
잘못된 관행·문화 바꿀 계기 되면
미래 위한 건강한 입법이 될 것

 학자들의 본연은 연구하고 분석하며 사색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학자들의 삶은 이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허용치 않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캠퍼스타운에서 살며 세미나·실험·강의·연구·독서에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학자들에 비해 한국의 학자들은 대부분 서울과 도시에 몰려 살며 경조사, 저녁 회식, 각종 모임에 참석하기 바쁘다. 아마도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쉽고 본인들에게 득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부하 직원들과 앉아 정책을 분석하고 토론하며 구상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 각종 행사에 나가 축사를 해야 하고, 그 많은 지인의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고 본인의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회의의 자리를 채워야 하며 국회의원, 관련 단체인, 기자들과 수시로 저녁자리, 술자리를 가져야 한다. 이들을 따라 온갖 행사에, 국회에, 위원회에 서류를 들고 대기하고 배석해야 하는 부처 직원들도 몸이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국가의 정책을 설계하고 생산해내는 것은 사무관, 서기관들의 수준에서 나온다. 학생들은 학교가 끝난 저녁에 복잡한 버스나 전철에 시달리며 사설 학원을 찾아간다. 그렇게 교육받은 학생들의 대부분이 결국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직장에,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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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가 계속 이렇게 돌아가면 선진국이 되기는 어렵다. 한국은 해외에서 도입한 기술과 장시간 근무로 성공한 수출제조업 덕택에 지금과 같은 소득 수준을 쌓아 올렸지만 이제 그런 방식으로 쌓은 제조업 기반, 소득 기반은 우리보다 훨씬 임금 수준이 낮고 지식과 기술 수준은 비슷하며 창의력은 오히려 높은 중국의 추격에 함몰될 위기에 있다. 국내 제조업 고용자 수는 지난 20년간 이미 20% 넘게 줄었다. 제조업에서 방출돼 나온 인력은 대개 수퍼·식당·카페·부동산중개업 등 자영서비스업으로 몰려들어 이 분야는 과포화 상태다. 이들의 실질소득은 지난 20년간 하락해 왔으며 평균 3년을 못 넘기고 문을 닫는다. 컨설팅·디자인·법률·회계·금융·소프트웨어 등 지식 기반 서비스산업은 외국과의 경쟁에서 크게 열위에 놓여 있다. 과거에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생산성이 낮은 농업에서 생산성이 높은 제조업으로 인구가 대거 이동하며 소득분배도 개선되었으나 지난 20년간은 오히려 생산성이 높은 제조업에서 생산성이 낮은 영세서비스업으로 인력이 대거 이동하며 소득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선진 경제로 가기 위해 활로를 모색해야 할 곳은 첨단 제조업과 생산성이 높은 지식 기반 서비스업의 발전이다. 그러나 이들 부문의 발전은 지식과 기술 발전 없인 불가능하다. 그것도 모방적 지식과 기술이 아닌 선도적·창의적 지식이어야 한다. 선도적·창의적 지식은 많은 시간의 연구 분석·실험·사색·토론이 축적되며 자라게 된다.

 이제 우리 사회의 생활문화, 관습, 인센티브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연줄 쌓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력과 전문성 쌓기에 의해 경쟁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학연·지연·인맥에 의해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좇아 다니게 된다. 정부·학교·기업 할 것 없이 모든 직장에서 치밀한 직무 분석과 그에 기반한 엄정한 성과 평가, 인사 방식이 정착돼 나가야 한다. 명문대·고시·입사시험에 합격하면 평생 기득권의 지대나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엘리트 지식집단들이 선진국의 엘리트 지식집단과 같은 수준의 지식과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는 한국 인력의 질이 대학 졸업 이후 직장 근무 햇수가 늘수록 선진국들에 비해 점점 더 뒤처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직장에서 장시간 근무하지만 업무 강도가 낮고 본연의 일보다 다른 일로 더 바쁘며 전문인으로서의 인적 자본 축적이 잘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찬 모임, 경조사, 저녁 술자리에서 축적되는 시간보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축적되는 시간이 늘어나야 한국은 여기서 더 발전할 수 있다.

 이달 말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은 과다 접대·선물·경조사비 금지로 부정 청탁과 부패 축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시중의 논란대로 관련 업소들의 위축, 단기적 디플레 등 부정적 영향이 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 법의 시행이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 일하는 방식, 생활문화 등에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어떤 법보다 미래를 위한 건강한 입법이 될 것이다. 꼭 그렇게 되도록 사회적 캠페인이 함께 일어나 주었으면 좋겠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