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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충전소] 폼나네, 작은 책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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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음악 소리에 대화가 묻힐 정도다. 테이블이 대여섯 개 남짓. 그 절반가량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평범한 카페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이 공간의 3분의 1은 서점으로 꾸며져 있다. 그마저도 서가에 책들이 빼곡한 보통 서점과는 다르다. 한가한 느낌이 들 정도로 책들이 여유 있게 배치돼 있다. 요즘 인기 있는 오은 시인의 시집 『유에서 유』를 맥주잔, 병맥주 한 병과 함께 패키지로 파는 1만7000원짜리 상품 등 각종 소품도 아기자기하게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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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위트 앤 시니컬’ 내부 전경. CD·LP까지 파는 또 다른 책방 ‘프렌테’와 공간을 함께 사용한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일 오후 경의선 서울 신촌역사 건너편 대국빌딩 3층의 카페 파스텔, 그 안에 숍인숍 형태로 들어서 있는 시집 전문서점 ‘위트 앤 시니컬’의 풍경이다. 올 6월 초 문을 연 서점은 최신 문화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의 필수 방문 코스로 단숨에 떠올랐다. 시집 전문이라는 희소성, 서점 주인이 시를 ‘제대로 아는’ 젊은 시인(유희경)이라는 점, 그가 인기 있는 동료 시인들을 초청해 부지런히 여는 시 낭송회 등이 입소문을 타고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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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촌에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차려 작은 책방에 대한 관심을 부른 유희경 시인.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희경씨는 “오픈한 지 얼마 안 돼 관심이 커서 그렇겠지만 한 달 평균 1500권에서 2000권가량의 시집이 팔린다”고 밝혔다. 한 권에 7000∼8000원 하는 시집 판매로 한 달에 1500만원가량의 매출을 올린다는 얘기다. 또 “고객의 3분의 1 정도가 스스로 시를 읽을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그분들에게 우선 시집을 여러 권 골라드리고 그중에서 한 권을 선택하도록 돕는 게 내 주 업무”라고 소개했다. 선택의 폭을 좁혀줘 고르는 부담을 덜어준다는 거다. 출판사 편집 일을 그만두고 서점을 차린 이유를 묻자 “책 편집이 어차피 문화 기획과 성격이 비슷한데 시와 관련된 기획 아이디어들을 본격적으로 실행해 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차 마시며 책 고르는 ‘작은 사치’
유행 민감한 젊은 층 필수코스로

위트 앤 시니컬처럼 개성 있는 작은 서점들의 출현은 요즘 문화계 트렌드 중의 하나다. 대형 서점들과 달리 특정 주제의 책만 선별해서 판매해 ‘큐레이션 서점’으로 불린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전국의 서점 숫자는 줄어드는 추세다. 2013년 1625곳이던 서점(문구류 판매점, 북카페 제외)이 2015년 1559개로 줄었다. 반면 개성 있는 작은 서점들에 대한 관심은 뜨거워진다.

지난해 가을 구글 지도를 기반으로 전국의 특색 있는 작은 서점 위치를 표시하고 서점 정보도 제공하는 모바일 앱 ‘동네서점’을 개발한 퍼니플랜의 남창우 대표는 “사용자들의 추천을 받은 결과 처음 70개가량이던 서점 숫자가 지금은 150여 개로 늘었다”고 소개했다. 숫자가 느는 만큼 성격도 다양해지는 양상이다. 동네서점 앱의 서점 분류 카테고리는 26개나 된다. 성적 소수자를 위한 ‘퀴어 서점’,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없이 제작돼 소규모로 유통되는 독립출판물을 주로 다루는 ‘독립출판물 서점’, ‘가정식 서점’ 같은 알쏭달쏭한 범주도 있다.

책방 무사(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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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가수. JTBC ‘김제동의 톡투유’에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책방 이름은 오늘도 무사히 넘기자는 뜻. 운영할 만큼 벌자는 주의다.
오후 6시에 문을 닫는다.

지난해 가을 인디 가수 요조가 서울 북촌에 ‘책방 무사(無事)’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고 방송인 노홍철씨, 제일기획 부사장을 지낸 카피라이터 최인아씨 등 유명인들이 서점 창업 대열에 합류한 것도 그만큼 이 분야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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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작은 서점을 여는 걸까. 어떤 사람들이 작은 서점을 찾는 걸까. 유희경씨는 “경제적인 안정보다 시간적·정신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원하는 젊은 사람이 많아진 데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로 서점을 꾸미는 데 대단한 전문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어마인드(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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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잡지를 만들다 회사를 그만두고 서점을 차렸다.
서점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5층에 있다. 아는 사람만 찾는다.
사진집 등 출판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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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문을 연 서울 서교동의 ‘유어마인드’는 독립출판물 서점 1세대로 꼽힌다. 이 서점의 최근 베스트셀러는 저자가 20여 년간 이사 다닌 11개의 집 이야기를 각각의 도면과 함께 풀어낸 7000원짜리 『0, 0, 0』, 발음기호와 성조 표시까지 시도한 『경상도 사투리 학습서』 같은 독립출판물들이다. 유어마인드 대표 이로씨는 “서점 운영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지만 급격하게 수입이 늘거나 주는 일 없이 일정한 편이어서 그런 점이 성향에 맞는 사람이라면 적당한 업종”이라고 말했다.

최인아책방(최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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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제일기획 부사장.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는 카피로 유명하다.
신간·베스트셀러 코너를 두지 않고 주제별로 신·구간을 섞어 진열한다.
묻힌 양서를 발굴하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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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2호선 선릉역 부근에 ‘최인아책방’을 낸 최인아씨는 보다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최씨는 “광고회사 시절 동료 선후배들의 기념일을 챙길 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심정으로 각각 다른 책을 선물했을 정도로 책에 대해 애착이 있었다”며 “앞으로 책방을 책에 관한 한 영향력 있고 믿을 만한 스피커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철든책방(노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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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짜리 낡은 주택을 개조해 서점을 차렸다. 직원 없이 혼자 운영할 생각이다.
책 주문도 직접 한다. 서점 오픈 과정을 책으로도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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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해방촌 낡은 주택을 개조해 ‘철든책방’을 낸 노홍철씨는 얼마 전 지상파 라디오 프로 진행을 맡은 게 계기가 돼 서점 운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주말에 방송되는 고전 낭독 코너를 준비하다가 자연스럽게 ‘명작 소설’에 재미를 붙였다는 얘기다. 마침 출판사 문학동네가 발 빠르게 노씨에게 접근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인기 작품들을 서점에 배치했다. 김제동·손미나씨 등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은 책, 노씨가 평소 관심 있던 독립출판물도 갖췄다. 다만 철든책방은 노씨 스케줄이 없는 주말에만 문을 연다.

위트 앤 시니컬 유희경씨는 “감각적이면서 상업적이지 않고, 유니크하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책을 찾는 사람들 역시 작은 서점 확산의 한 축”이라고 진단했다. 특이하거나 사소한 책에 끌리는 사람들이 일정한 구매력을 갖춘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결과 그에 호응하는 작은 서점들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자신이 읽은 책의 목록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려는 젊은 세대의 세태 또한 동력이 됐다.

유어마인드 이로씨는 “작은 서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는 사람 중 상당수는 서점을 창업하거나 책을 직접 쓸 가능성이 있는 잠재 인력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만 1000명에서 1500명가량은 되는 것 같다”고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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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앞다퉈 생기고 있지만 작은 서점의 경제적 손익계산서가 밝지만은 않다. 상대적으로 자본이 든든해 보이는 최인아·노홍철씨는 사정이 다를 수 있겠지만 현상 유지하기도 빠듯한 작은 서점이 많다고 한다. 위트 앤 시니컬도 마찬가지. 유희경씨는 “제반 비용을 빼고 나면 월말 정산 결과가 허탈할 정도”라고 했다. 많이 생기기도 하지만 문 닫는 곳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유어마인드 이로씨도 “ 잡지 기고나 외부 문화행사를 기획해 별도의 수익을 얻지 못하면 서점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 유희경씨가 “ 작은 서점 유행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불투명하다”고 전망하는 이유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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