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 사회공감 얻어야 한다|금창태<편집국장 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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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젊은 세대를 흔히 저항의 세대라 부른다. 저항이란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저항 속에는 개혁의 뜨거운 의지가 숨어 있다.
현실의 모순과 비리를 바로 잡으려는 젊은 세대의 가없는 에너지는 정체된 사회를 전진시키고 혼탁한 현실에 맑은 피를 수혈하기도 한다.
서구에서, 동구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도 우리는 젊은 세대가 주역이 돼 사회에 큰 변모를 일으킨 역사를 볼 수 있다.
68년 소르본 대학교 낭테르 분교에서 교육개혁을 둘러싸고 발단했던 프랑스의 학생운동은 마침내 5월 혁명으로 번져 프랑스 역사의 흐름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버클리 대학에서 흑인민권문제로 시작된 미국의 학생저항운동은 폭력적인 반전시위로 확대되면서 68년 사우드캐롤라이나 대학에서 5명의 학생이, 그리고 70년 켄트 대학에서 4명의학생이 진압경찰의 총에 사살되는 유혈사태로 번졌다.
서독에서는『대학의 개혁은 사회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SDS(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의 저항운동이 68년 슈프링거 신문사 습격방화, 74년 베를린 고등법원장 피살사건, 77년 경제인 연합회장 납치살해사건과 같은 과격양상을 띠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일본에서는 50년대 전학련의 반미운동과 60년대 동경대의학부 인턴 제 폐지요구를 위시한 학생운동이 동경대 총장연금 폭행사건, 야스다 강당 점거방화, 방위 청 습격, 간다 해방 구 선언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때 전국대학의 58%가 수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소요의 와중으로 빠져들었다.
그런가 하면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학생운동은 민주화와 자유회복을 위한 영웅적 저항으로 기록되고 있다.
학생운동의 요인과 양상은 정치·경제·사회적 특성에 따라 이렇듯 나라마다 다양하고 진폭도 넓다.
그 과정도 합리적이고 긍정적 차원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례도 많다.
학생들의 미숙한 감성과 한계적 지식, 그리고 제어하기 힘든 열정 때문에 운동의 양상이 반문명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과격성을 극복하지 못할 때 기성세대로부터 반국가적·반사회적인 것으로 매도당해 강력한 억제의 대상이 되고 만다.
60년대 전세계를 휩쓸다시피 했던 학생운동의 역사를 돌아봐도 폭력에 의존하는 학생들의 이른바「미니 레벌류션」(mini revolution)은 조건반사처럼 즉각 집권층의「맥시 리프레션」(maxi repression)을 불러왔다.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과격해지면 거기에 대응해서 강한 억압이 가해졌고 탄압이 강해지면 학생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과격학생들의 동조세력은 점점 이탈하고 소수로 남게 된 핵심세력은 좌절감과 초조감에 더욱 분노하고 과격해지며 때로는 순교자적인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분신자살도 그러한 유형의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학생운동이 이처럼 반전되는 모순의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달성은 어렵게 된다. 운동의 목표와 주장을 합리적으로 설정하고 일반시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폈을 때만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미국의「유진 파워」에서 볼 수 있다.
버클리와 켄트 대학의 비극을 고비로 미국의 학생들 사이에는 최루탄 연막 속을 헤치며 애꿎은 경찰에 돌을 던지고 폭염의 아스팔트 위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를 가져오느냐를 냉정히 반추해 보는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지루한 월남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반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한「유진·매카디」상원의원을 지원하는 운동에 나섰다.
뉴햄프셔의「매카디」선거대책본부에 구름처럼 모여든 반전 파 학생들은 유권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초미니스커트의 여학생은 스커트 길이를 늘렸고 히피 풍의 남학생들은 더부룩한 머리와 수염을 말끔히 깎고 넥타이까지 맨 정장차림으로 선거운동에 나섰다.
이 젊은 대학생들의 헌신적이고 예기치 않은 지원으로「매카디」의원은 비록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뉴햄프셔에서 예상외의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학생들의 이러한 합법적 반전운동은 70년 11월의 중간선거에서 비둘기파 의원들을 대거 진출시킨「뉴콩콩그레스」(신 의회)운동으로 이어졌다.
폭력시외와 공공건물점거·방화 등 파괴적으로 치닫던 학생운동이 그 열정을 평화적 방향으로 돌린 것이다. 결국 이런 젊은이들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어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무분별한 목적을 내걸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일본과 서독의 과격파 학생들은 뚜렷한 유산도 남기지 못한 채 국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고립화 된 끝에 자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72년 아사마 산장을 점거하고 필사의 항거를 하다 무장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붕괴한 일본 연합적군파의 최후가 그것이다. 그후 적군파 잔당들은 요도 호를 납치, 국외로 탈출했는가 하면 그중 일부는 72년 5월 텔아비브 국제공항에서 승객들에게 수류탄과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소동을 벌이다 모두 사살되는 비운을 당했다. 감방에서 자살로 종말을 맞이한 서독의 극좌파 지도자「바더」와「마인호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사회가 새로운 통합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필요한 동기와 자극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전개시킬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사회로부터 신뢰와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서독과 일본의 학생운동이 주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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