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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당기신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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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29면

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이 성큼 당도한 날, 아끼는 후배목사가 불쑥 찾아왔다. 대대로 목사를 배출한 훌륭한 가문의 영성과 정의감을 겸비한 젊은 목사다. 따끈한 찻잔을 마주하고 앉았는데, 뭔 일이 있는지 후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요새 무슨 일 있나?” 조금 짚이는 데가 있어 물었다. “저 목회를 그만 때려치우려고요!” 후배의 말을 더 들어보니, 사리사욕에 눈먼 성직자들과 말을 섞고 숨결을 나누는 것이 역겨워 교회를 떠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후배를 보내고 나서 착잡한 마음에 한참 동안 좁은 마당을 서성였다. 아무리 그래도 후배는 공기를 떠나 살 수 없듯, 교회를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그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가볍기를, 그 상처받은 마음이 어서 치유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와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예수는 ‘내 짐은 쉽고 가볍다’고 했다. 당신이 겪어야 했던 삶의 역경과 장애가 우리보다 적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거룩한 분노를 토해낼 일 또한 우리 시대보다 적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허약해진 것이 아닐까. 자기 앞에 닥친 장애 앞에서 도망치려고만 하니 말이다. 왜 그렇게 허약해진 것일까. 이 문명의 이기와 편리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배부르고 안락함에 길들여졌기 때문이 아닐까. 배부르고 안락함에 길들여지면 존재의 중심축을 굳건히 세우기가 어려워진다. 다시 말하면 수도자의 가장 소중한 덕목인, 깨어서 살지 못하게 된다.


그날 나는 후배와 헤어지기 전, 인도의 고전 『바가바드 기타』에 있는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과연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는지, 신이 가느다란 명주실로 잡아당기는 대로 기꺼이 따라가는지, 순리로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구절이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신이 우리를 ‘가느다란 명주실’로 잡아당긴다는 것. 그 가느다란 명주실로 신이 잡아당길 때 잡아당기는 대로 기꺼이 따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존재가 바윗덩어리처럼 무겁다면 신과 우리 사이에 이어진 가는 명주실은 끊어지고 말 것이다. 어떤 아집, 집착, 욕심에 사로잡혀 우리 존재가 무겁다면 우리는 신과 이어진 명주실이 끊어지지 않게 할 도리가 없다. 우리 존재가 깃털처럼 가벼워져야만 ‘가느다란 명주실’로 우리를 당기시는 신을 따라갈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사는 이들조차 자본의 포로가 되어 ‘나’와 ‘나의 것’을 비우려 하지 않는다. 비움에서 오는 자유의 기쁨을 맛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느다란 실로 이어진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영원한 젊음을 향유하는 길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자신을 깨우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신은 그 일을 하신다.”(마이스터 엑카르트) 그렇다. ‘가느다란 명주실로 이어진’ 신과 항상 교통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를 깨우는 일이야말로 자비로운 신의 거룩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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