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의 맛따라기] 작품 같은 손맛 밥상…두 요리선생이 연 한식당 ‘수작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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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요리교실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음식점을 연 박소진(왼쪽)·이호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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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요리선생이 음식점 사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메뉴 개발 컨설턴트’, ’밥으로 소통하는 밥티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박소진(46)씨와 ‘음식사업 기획자’로 자기를 정의한 이호경(39)씨가 지난 8월 30일 서교동에서 한식당 ‘수작반상’(서울 마포구 월드컵로8길 19/전화 02-332-4069)을 열었다. 주택가 골목 안에 자리잡은 외딴 식당이다. 기본적으로는 밥집이지만 커피와 간식류도 팔고, 요리 연구·강좌, 방송 촬영도 하는 복합공간이다. 두 사람은 한동안 ‘호야 쿡스’라는 요리교실의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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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부치고 있는 박소진 요리사가 ‘수작반상’을 차리는 손맛 책임자이다.

‘수작반상’은 ▷근대화 이후 한국음식에 기반 ▷국물 맛과 기본에 충실한 음식 ▷농어민과 함께 하는 열두 달 제철 밥상 ▷손이 많이 가서 사라져가는 음식을 살려내는 거꾸로 가는 밥상 ▷따뜻한 마음이 그리울 때 찾는 동네 밥집을 지향으로 내세웠다. 이씨는 “손으로 그린 밥상을 상상하며, 그대로 벽에 걸어도 좋은 그림 같은 상을 차리고 싶다는 마음을 간판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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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진 요리사가 게국지에 들어갈 호박을 자르고 있다. 충청도 음식인 호박지(늙은 호박으로 담그는 김치)는 저렇게 납작하고 골이 깊은 호박으로 담근다. 그 지역에서는 저런 호박을 맷돌호박이라고 부른다.

문 연 지 나흘 된 음식점을 소개하는 건 성급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요리교실에 출입하며 관찰학습과 시식을 해봤고, 그들의 삶을 지켜봤다. 정직하고 열성적이다. 음식도 정직하고 정성스러웠다. 음식점을 해도 그러리라 믿는다. 개업 전 초대행사 음식을 먹어보고, 개업 날 다시 갔다. 믿음대로였다. 남긴 반찬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입이 편하고 착실한 맛이었다. 시류에 편승하는 맛이 아니다. 좋은 식재료로 깊은 맛을 내려고 노력한 음식이다. 이런 음식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실어 이 집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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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 코스요리의 본식 중 하나인 게국지는 내 기대하고는 많이 달랐다. 곰삭은 우거지에 능쟁이 게를 겨울 한 철 품고 있던 게국이 섞여 발효취가 코를 찌르는 음식을 기대했는데 생 채소에 꽃게장 국물을 넣고 끓였다. 그래도 잘 우린 소고기육수를 밑국물로 써서 맛은 좋았다.

메뉴판을 보니 저녁상 코스 중 ‘게국지’가 눈에 띄었다. 요리를 담당하는 박씨의 음식 근본이 평양이라는데 이상했다. 게국지는 서산·태안의 향토음식으로 알려져 있고,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그렇게 설명한다. 나도 1986년 서산에서 처음 접한 이래 여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당시 그 음식은 서산군(태안 지역을 포함해 하나의 군이었다)을 벗어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건 이북음식이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태안반도 음식이긴 하지만 뿌리는 이북 사람들이라는 얘기를 태안의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들었다. 6.25 때 황해도 피란민들이 태안에 많이 내려왔다. 개성·사리원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분들 정착 초기에 보니 태안 사람들이 게장 먹고 남은 간장을 버리더란다. 피란민들은 고향에서 해 먹던 음식이 생각나 게국을 얻어다가 우거지 찌개 끓일 때 넣어 간을 맞췄다. 그걸 본 지역 사람들도 따라 하게 됐다. 그 음식이 게국지로 자리잡았다고 하더라. 충청도식 호박지(늙은 호박으로 담그는 김치)에 게국을 부어 끓인 호박지찌개는 발전된 형태다.”

게국지는 게국·우거지의 합성어다. 게국은 게장을 먹고 남은 간장을 말한다. 요즘 먹는 꽃게 간장게장이 아니다. 능쟁이라는, 서리가 내리면 나타나 갯벌에 기어 다니는 작은 게로 담근 게장이다. 게국지는 TV에 나오듯 꽃게를 잘라 넣고 담근 김치로 찌개를 끓이는 고급음식이 아니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연명음식이었다. 30년 전 내가 처음 접한 게국지도 마을 모퉁이 납작한 시골집에서 맛을 본 것이다.

실제 태안군에는 황해도촌이 있다. 태안읍 평천리의 한 마을이다. 태안군지(2012년, 5권 292쪽)는 “황해도촌은 평섶의 동남쪽에 형성된 마을로써 한국전쟁 때 피난 온 황해도 사람들이 주로 많이 모여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음식에 대한 탐구가 이만큼 깊은 박씨는 공중파 방송 아침뉴스에 매주 2회 ‘지금이 제철’이라는 식재료 소개 코너에 2년 가까이 고정출연하고 있다. 제철 식재료에 대해 요리 아이디어나 팁을 알려주고 리포트에서 시청자에게 권하는 음식 시연도 한다. 이런 내공으로 매달 새롭게 바꿔갈 메뉴의 ‘9월 제철 밥상’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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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콩나물국·제육볶음·쌈채와 8찬으로 구성된 ‘낮밥’ 한상차림(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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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기본 상에 오징어볶음(왼쪽)이나 제육볶음을 선택할 수 있다.

▷낮밥(한상차림 8000원) 밥, 제육볶음 혹은 오징어보쌈(택일), 쌈채와 콩나물국(또는 김칫국)에 8찬(청귤물김치, 전, 뚱딴지콩범벅, 달걀찜, 제철 나물, 삼채장아찌, 고구마순김치 또는 오이소박이, 오이지 또는 고추무침) ▷낮밥 추가메뉴로 제철 생선구이, 차돌박이 된장찌개(각 7000원), 연잎밥(3000원) ▷계절 특선 요리로 여름엔 초계탕, 겨울엔 가릿국밥(각 1만2000원)이 있다.

▷저녁상(코스요리 1인 2만5000원)은 입맛다심(흑임자죽·부각)-전식차림(제철 채소튀김, 청귤소스 해산물 물회)-본식차림(육회·게국지·밥과 9찬)-입가심과 잡과편(흑미생강식혜) 순서로 나온다. ▷저녁 단품 안주는 간재미회무침(2만5000원), 돼지갈비강정(2만원), 닭튀김(1만8000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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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국인 콩나물국은 평범해 보이지만 맛이 놀랍다. ‘국물 맛과 기본에 충실한 음식’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개업 날 ‘낮밥’을 먹으러 갔더니 8찬 중 전·뚱딴지콩범벅은 이미 동나고 대타가 나왔다. 뜻밖에도 손님이 많았다. 좌석의 2배가 넘는 손님이 점심 2시간 사이에 몰렸다고 한다. 내가 선택도 안 했는데 제육볶음 한상차림이 나왔다. 9월의 국인 콩나물국을 한 술 뜨고선 놀랐다. 부드럽고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게 국 한 대접이면 밥 한 사발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치국물과 집간장으로 낸 맛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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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은 묵은지, 소고기볶음고추장, 단무지로 구성한 쌈채 한 접시. 배추 줄기 속속들이 맛이 든 묵은지에서 과일 향이 스쳤다. 단무지는 색소나 설탕 대신 치자로 색을 내고 유자로 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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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채는 다른 음식점과 다르게 짧고 얇고 넓적하게 채쳐서 무쳤다. 식감이 색다르다.

쌈채 접시엔 씻은 묵은지와 고추장, 단무지가 차려있다. 단무지라니….먹기 전에 속으로 ‘애걔’했다. 하마터면 정말 소리를 낼 뻔했다. 헌데 그럴 일이 아니었다. 종가의 맏며느리처럼 실하고 우아한 음식이었다. 묵은지는 상큼한 과일 향이 돌았다. 고추장은 소고기를 다져 넣고 볶았다. 단무지는 치자로 물들이고 유자를 섞어 맛을 냈다. 실제 가늘게 채 친 유자껍질이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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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막 같은 껍질 벗기기가 성가셔 가정에서 잘 해먹지 않는 고구마순으로 김치를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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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물김치는 국물이 깔끔하도록 곱게 채친 채소를 얇게 저민 무로 말아 여몄다. 단맛은 설탕은 전혀 넣지 않고 배즙으로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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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리회무침은 빙초산이나 설탕 대신 직접 마련한 막걸리식초와 조청으로 양념을 해 맛이 밋밋하다. 대신 가오리의 제 맛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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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떡(왼쪽)과 마늘종·옥수수전.

처음 먹어본 고구마순김치(※차림표에 그렇게 씌어있지만 실은 순이 아니고 잎자루 부분)도 별미였다. 얇은 껍질 벗기는 게 성가셔 부엌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식재료로 김치를 담근 것이다. 얼핏 보기에 반찬이 모자랄 듯했는데 남았다. 상을 치우며 남은 반찬을 걷어가는 걸 보니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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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탕은 첫술에 비릿하게 닭고기 냄새가 스쳤다. 박소진 요리사는 닭고기이니까 닭 냄새가 안 나면 이상한 거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신맛은 막걸리식초, 단맛은 직접 곤 조청으로 냈다.

이 집 음식에 인공조미료는 일절 쓰지 않는다. 대신 모든 장을 청주시 미원면에서 직접 담가온다. 설탕은 초절임 같을 걸 할 때만 쓰고 일반음식 단맛은 손수 곤 조청으로 낸다. 식초는 막걸리를 발효해 만들어 쓴다. 빙초산이나 인공조미료 맛에 길든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 싱겁고 밋밋하다고 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한 그릇 먹다 보면 뒤로 갈수록 입이 편해지고 음식이 당긴다. 개업 전 초청행사에서 첫 음식으로 나온 초계탕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두어 술 뜨는 동안 신맛, 단맛, 칼칼한 맛이 모두 약했다. 비릿한 닭 냄새도 났다. 옆자리 손님에게 박씨가 설명하는 걸 들었다. 이 집 음식의 방향과 내용, 고집과 철학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닭고기로 만들었으니 닭 비린내 나고, 돼지고기 음식에서 돼지 냄새 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재료의 맛 아닌가. 이렇게 말했다가 요리선생님들한테 야단맞았다. 나는 내 생각을 얘기했고, 생각대로 요리한다. 재료의 특색으로서 냄새가 있어야 한다. 음식 맛을 해치면 문제지만 그렇지 않은 범위에서 있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식초와 조청만으로 맛을 내니까 설탕과 빙초산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겐 싱겁고 밋밋하다. 가오리무침이 메뉴에 있는데 빙초산 전혀 안 쓰니 맛이 밋밋할 거다. 겨자는 많이 넣으니 냉채와 구별이 안 돼 줄였다. 하지만 잘못된 음식에 익숙해져 왜곡된 손님 입맛에 맞추는 음식보다 내 진심을 담아서 제철 재료로 제대로 만든 음식을 상에 낼 계획이다.”

메뉴 중엔 닭튀김도 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연이 있다. 박씨는 한때 연봉 1억 조건으로 BBQ 계열사 고문을 맡아 근무한 적이 있다. 그 회사에 500만~1500만원씩 받고 닭튀김 레시피 여러 건을 팔았을 정도로 ‘치킨 고수’다.

그는 페이스북을 열심히 한다. 지난 7월 2일 올린 글을 보니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만 모아서 파는 식당 한번 해보고 싶다.” 이번에 연 ‘수작반상’이 그런 음식점이겠다. 그가 말한 ‘좋아하는 음식’이란 ‘잘하는 음식’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개업 초라 안정이 덜 된 부분이 있다. 내가 간 첫날 공교롭게도 돈이 5만원짜리밖에 없었다. 잔돈이 없어서 받을 수 없단다. 카드는 된다고 해서 냈더니 5분을 이리 저리 만지다가 안 된다고 했다. 밥값 8000원을 외상으로 달고 나왔다. 대학 졸업하고 외상은 처음이다. 메뉴도 시장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있다.

20평 음식점에 좌석은 25석(4인석-3인석 각 3개, 2인석 2개). 영업시간 11시30분~오후 10시(쉬는 시간 오후 3시~5시/카페는 오전 10시~오후 10시). 매주 월요일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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