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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반 통에 8500원…줄 서는 빵집, 비밀이 뭘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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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쫄깃쫄깃한 데니쉬 식빵은 그냥 먹어도 좋지만 치즈, 햄을 곁들이면 그 자체로 한 끼 식사가 된다. [사진 교토마블]

무엇이든 기본은 있다. 하지만 기본이라고 변치 말란 법은 없다. 때론 세상이 달라지는만큼 기본도 진화한다. 요즘 식빵이 딱 그렇다. 오랫동안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잼·버터를 발라 먹거나 뭘 넣어 먹는 '기본 빵'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스스로 맛을 내기 시작했다. 페이스트리처럼 고소한 풍미를 지닌 데니쉬 식빵을 필두로, 말 그대로 가지각색의 식빵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기본의, 아니 식빵의 재발견이다.

64겹 결이 살아있는 데니쉬 식빵
지난달 25일 서울 서빙고로 제과점 '교토마블' 앞. 오전 9시 이전부터 매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데니쉬 식빵을 사려는 것이다. 양 손 가득 식빵만 8개를 사 들고 매장을 나선 주부 이준희(43)씨는 "석달 전만 해도 사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1인 1빵으로 개수를 제한해 판매했다"며 "이제 개수 제한은 없어졌지만 점심 때를 지나면 다 팔려버려 이렇게 일찍 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교토마블은 녹차 등 8가지 다른 맛이 있기는 하지만 종류로만 따지면 오로지 데니쉬 식빵만 판다. 그런데다 문을 열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이를 바탕으로 지난달엔 압구정동에 2호점을 냈다. 여기도 본점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 문을 열자마자 식빵을 사려는 긴 줄이 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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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식빵이 뭐라고 이 소동일까. 기대반 호기심반으로 먹어본 소감을 말하자면 일반 식빵과는 첫인상부터 사뭇 다르다. 얇은 슬라이스로 잘라주지 않기 때문에 묵직한 덩어리 그대로다(같은 크기 보통 식빵의 3배 무게다). 그 표면엔 네 개의 다른 방향으로 마치 붓질을 한 것처럼 결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손으로 뜯는 순간, 빵 조각이 부드럽게 결을 따라 올라온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밀푀유(여러 겹의 페이스트리)의 식빵 버전이다. 겉 껍질은 페이스트리나 크로와상과 비슷한데 식빵 특유의 덩어리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훨씬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다.

맛 역시 보여지는 그대로다. 분명 익히 아는 설탕과 버터 맛인데도 묘한 차이가 있다. 더 촉촉하고 더 쫄깃하고, 또 단맛이 더하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봉지가 빌 때까지 멈출 수 없다고 해서 빵 매니어들 사이에서는 '마약 식빵'이라고 불린다.

일본 장인의 레시피를 그대로 가져 온 교토마블이 데니쉬 식빵 인기에 불을 지폈지만, 이곳 말고도 '완판 행진'을 이어가는 베이커리가 더 있다. '오뗄두스'의 '깁펠'도 점심 전후로 동이 날 정도다. '롤링핀' 역시 매장에 가보면 미니 데니쉬 식빵에 '베스트 원'이라는 인기 품목 레이블을 붙여 놨다. '아티장 베이커스'도 새롭게 제품을 출시하며 '대전'에 합류했다.

초코·치즈·블루베리… 속 채운 식빵의 진화

꼭 데니쉬 식빵이 아니더라도 빵맛으로 입소문 난 식빵집은 더 있다. 식빵 자체의 질감과 맛이 좋아 프렌차이즈 빵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화된 메뉴로 승부하는 곳들이다. 서울 성수동 '밀도'의 큐브 식빵이 대표적이다. 브리오슈 반죽에 카레·커스터드 크림 등 다양한 속을 넣어 만든 대표 상품인데, 한 손님이 보통 서너 개씩 사가다보니 여러 빵 가운데서 늘 가장 먼저 품절된다.

홍대 앞에 문 연 식빵 전문점 '식빵 몬스터' 의 초코 식빵은 달달함의 극치로 유명하다. 반죽에 그저 초코 향만 넣은 게 아니라 초코 시럽을 듬뿍 넣은 것이 특징이다. 반면 똑같은 초코 식빵이라도 서울 대방동 '언니의 식빵가게'의 초코롤 식빵은 무설탕 카카오가루로 반죽을 해 단맛이 부담스러운 이들이 자주 찾는다. 이외에도 삼청동 ‘밀크’는 플레인·크림치즈·블루베리·씨앗·올리브 식빵을, 신천동 '식빵 이야기'는 팥호두 식빵, 블루베리잼 식빵 등으로 줄 서서 사먹는 식빵집이 됐다.

이들이 식빵 하나만으로 승부를 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수연 교토마블 대표는 "동네 상점이라는 특성을 살려 백화점식 나열에 식상해하는 소비자들을 공략했다"고 설명했다. 식사 빵부터 디저트까지 취급하는 대형 베이커리에 맞서는 치밀한 전략이었다는 설명이다. 이게 가능한 건 식빵 자체가 많은 이들이 꾸준히 찾는 '기본 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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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저온숙성으로 식감을 살린 `밀크`의 크림치즈식빵, 찹쌀과 팥을 넣어 속을 채운 `롤링핀`의 압구정 식빵, 카카오 가루로 맛을 낸 `언니의 식빵`의 초코롤식빵 [사진 여성중앙]

식사빵과 디저트빵 사이 제3의 길

사실 데니쉬 식빵은 따끈따끈한 신상은 아니다. 이미 일본에선 첫 전문점이 생긴 게 1979년이다. 국내에서도 파리크라상·브레댄코 등 프랜차이즈 빵집에서도 4~5년 전부터 판매해오던 품목이다. 다양한 재료를 섞은 치즈식빵·녹차식빵 등도 나온 지는 꽤 오래됐다. 그런데 왜 식빵이 새삼 인기를 끄는 것일까.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대중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타르트·케이크처럼 단맛을 강조하는 디저트류에 이어 호밀빵·통밀빵처럼 웰빙류가 한 동안 인기를 끌었다면, 이제는 양 극단 모두에 지친 대중이 그 중간쯤을 찾게 됐다는 이야기다. 가성비 측면에서도 수요와 잘 맞는다. 가격 대비 양적인 면에서 식사 대용으로도 부담이 없고 그냥 디저트로 먹기에도 손색없이 맛이 있기 때문이다. 또 냉장 보관이 필수인 크림류에 비해 보관·유통이 편해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 만족스러워 한다. 일반 식빵은 구운 뒤 4시간쯤 지나면 풍미가 사라지지만 보다 진화한 식빵은 경우에 따라 상온에서 사나흘까지 맛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스몰 럭셔리'가 일반화하면서 1만원 대를 남는 식빵에 대한 가격 저항감이 그리 거세지 않은 것도 프리미엄 식빵의 인기에 한 몫을 했다.

하지만 오뗄두스의 정홍연 셰프는 무엇보다 '기본'을 이야기한다. 제대로된 맛을 소비자들이 알아본다는 설명이다. "이제 먹거리는 그냥 새롭다가 아니라, 맛이 수준 이상이어야 대중에게 먹혀요. 다들 정보도 경험도 워낙 많다보니 예전보다 입맛이 까다로워진 게 사실이고요. 그게 가장 평범한 식빵이라도 말이죠. "

가령 데니쉬 식빵이 강조하는 '64겹'은 그냥 나온 게 아니란다. 발효시킨 반죽을 밀어서 접었다 기다리고 또다시 미는 과정이 서너 차례 반복된다. 결을 만들기 위해 영하 80까지 급랭되는 드라이아이스를 넣어 반죽하기도 한다. 빵 하나가 나오는데 일반 식빵의 두 배 이상, 꼬박 12시간 넘게 걸리는 그야말로 '핸드 메이드'이라는 얘기다. 재료도 마찬가지. 이제 웬만한 식빵 맛집이라면 유기농 밀가루, 천연 버터 등으로 만든다는 문구는 그리 대단한 자랑거리도 아니다.

글=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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