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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일본에도 여왕이 나올 때가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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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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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무라 미나에
소설가

“국민 세금을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 아버지는 일왕을 이렇게 불렀다. 히로히토 시절이었다. 일본 지식인들은 아버지처럼 왕을 향한 반감이 팽배해 있었다. 나 또한 왕이 하루라도 빨리 없어져야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며 자랐다.

아키히토 은퇴, 후계 논란 점화
일본 왕실, 남성만 왕 자격 인정
차차기 왕 물러나면 대 끊길 판
공주에게도 왕 자격 개방할 때

그러나 현 국왕 아키히토의 행보를 지켜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군중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고 지진 피해 현장을 몸소 찾았다. 그걸 보며 마음이 녹는 게 느껴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아키히토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소화해온 살인적 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세계 최악의 직업이 일본 왕”이라며 몸서리칠 것이다. 하지만 아키히토의 부인(왕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키히토의 고통은 발끝에도 못 미친다. 옛날 일본 여성들은 누구나 왕비 자리를 탐냈다. 그러나 그 시절은 1000년 전이다. 지금은 어떤 여성도 왕비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는다.

얼마 전 아키히토가 TV에 나와 “물러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오죽 했으면’이란 동정심과 함께 그의 은퇴가 왕실에 미칠 영향을 생각했다. 놀랍게도 ‘왕실이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렬한 왕실 폐지론자였던 나 역시 나이가 들면서 일본 국민 대다수처럼 왕실 유지파가 된 것이다.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일본의 극빈층이 아키히토의 존재로 인해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총리가 툭하면 바뀌는 일본의 정치구조 때문이다. 얼굴도 기억하기 힘든 단명 총리 대신 수십 년간 나라의 얼굴이 돼줄 왕의 존재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도대체 왜 일본에 왕실이 필요하냐”고 주장하는 미국·유럽인들 때문이다. 일본의 현실을 모른 채 자기중심적으로 떠드는 그들의 의식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라도 왕실이 지속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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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다른 데 있다. 아키히토가 물러나면 왕세자가 뒤를 잇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 숨지거나 왕위에서 물러나면 뒤를 이을 사람은 왕세자의 자식이 아니라 조카가 된다. 왕세자는 자식이 딸(공주)만 하나다. 남자에게만 왕의 자격을 주는 일본 왕실 규범상 왕세자는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는 것이다. 차차기 일본 왕이 될 왕세자의 조카는 9세 소년이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은 9세 소년이 성인으로 무사히 성장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 가운데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와 결혼할 이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일본인들은 왕비나 왕세자비가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지켜봤다. 아키히토의 부인인 현 왕비 미치코는 궁중생활이 힘들어 몇 달간 실어증을 앓기까지 했다. 그 뒤 목소리는 찾았지만 스트레스가 이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은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래도 아들 2명과 딸 1명을 낳았으니 왕비로서의 의무는 이행한 셈이다. 그러나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촉망받는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마사코 왕세자비는 좀처럼 아기를 낳지 못했다. 일본 최고 의료진으로부터 장기간 불임치료를 받은 끝에 겨우 1명을 낳았지만 딸이었다. 그 뒤로 마사코는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국가적 행사에만 간간이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마사코는 단순한 평민 출신 왕세자비가 아니다. 아름답고 활동적인 커리어 여성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왕가에 시집가 ‘아들 낳는 도구’로만 취급받는 삶을 자초한 이유는 무엇일까? 제정신을 가진 여성이라면 왕자 생산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왕세손과 결혼할 일이 절대로 없다. 일본 왕가는 지난 2600년간 남성이 왕위를 승계해왔다. 그러나 이는 후궁 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의 왕실법은 남성 승계를 고집하면서도 표면적으론 일부일처제를 유지했다. 그 결과 후계자를 생산하는 부담은 왕비에게 전가됐다.

다행히 왕세자비 마사코는 왕자 생산의 짐을 덜어줄 여성이 있었다. 왕세손(아키히토의 손자이자 왕세자의 조카)을 출산한 제2왕자의 부인이다. 그러나 이 왕세손과 결혼하는 여성은 남자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일본 왕실의 2600년 전통을 잇기 위해 순전히 운에 달린 왕자 생산 임무를 혼자서 지게 된다.

그런 만큼 일본이 왕실을 유지하고 싶다면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해야 한다. 일본 국민의 75%가 ‘여성 일왕’을 지지한다. 1947년 헌법 개정으로 양성평등이 보장되며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급증했지만 공직만큼은 예외였다. 그러나 지난달 여성정치인 고이케 유리코가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압승했다. 일본 유권자들은 평소의 얌전함을 버리고 “유리코!”를 환호했다. 이들이 유리코에게 쏟은 열정은 일본인들이 여왕 즉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왕실을 영원히 지속시킬 방법은 없다. 일본 국민 누구나 누리는 헌법상 기본권을 왕은 누리지 못한다. 직업이나 거주지를 선택할 수 없고 표현의 자유도 없다. 결국 일본 왕가는 사라져갈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날이 오기까지는 여왕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싶다. 당당히 걸어가는 여왕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도 됐다.

미즈무라 미나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