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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의 비명…수령 70년 거목 생선 가시처럼 말라죽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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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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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산림청 헬기에서 내려다본 지리산 명선봉(1586m).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가 수두룩하다. 한국에만 자생하는 구상나무다. 해발 1200m 이상의 고지대에 사는 상록침엽수지만 이상고온과 봄 가뭄 때문에 집단 고사하고 있다. [사진 성시윤 기자]

지난 18일 산림청 소속 러시아산 KA-32 헬기가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1915m)에서 기수를 서쪽으로 틀어 제석봉과 세석대피소를 지나 명선봉 위를 비행 중이었다.

지리산 집단고사 현장 가보니

“저기 아래 보세요. 완전히 죽어 가잖아요!” 헬기에 탑승한 녹색연합 서재철 전문위원이 창밖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은 지난 4월 ‘한반도 침엽수 집단고사 현황보고’란 이름의 자료를 냈다. 한반도 침엽수가 기후변화 영향으로 고사(枯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명선봉(1586m) 정상부는 대체로 연두·초록빛인데 허옇게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살을 다 발라먹은 뒤의 생선 뼈 같다고 할까. 이렇게 변한 나무는 구상나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반도, 그것도 남한에만 자생하는 고유 수종이다. 사시사철 잎이 푸르러야 정상이다. 그런데 말라 죽어 가고 있다. 푸른 잎이 죄다 떨어지고, 줄기 껍질마저 벗겨져 있다.

이런 모습은 천왕봉에서부터 반야봉·노고단·성삼재에 이르기까지 장장 35㎞에 이르는 능선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훑으며 이어져 나타났다. 이날 비행은 ‘지리산 구상나무 집단 고사’ 현장 조사의 일환이었다. 조사엔 산림청 최병암 산림보호국장, 임종환 국립산림과학원 기후변화연구센터장 등 산림청 관계자와 녹색연합 서 위원이 참여했다.

조사단은 고사 현장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반야봉(1732m) 정상에 착륙했다. 고사한 구상나무 중엔 키가 18m에 가까운 거목도 많았다. 나무 상층부를 제외하곤 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줄기 중간의 가지도 많이 떨어져 마치 전봇대 같았다. 임 센터장은 “저 정도 키라면 수령이 70∼80년은 족히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 키가 작은 구상나무도 상태는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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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노루목 주변의 구상나무. 상층부를 제외하곤 잎이 대부분 떨어지고 가지만 남아 전봇대처럼 됐다. [사진 성시윤 기자]

잎은 초록빛에 윤기가 나는 게 보통인데 일부는 붉게 말라 있었다. 임 센터장은 “구상나무가 처참하게 죽어 가고 있다. 지리산 구상나무 중 3분의 1은 죽은 것 같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 국장도 “원래는 9월에 현장조사를 할 예정이었는데 일정을 앞당겼다. 생각보다도 피해가 심각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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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지만 일부 잎은 벌겋게 말라 버렸다. [사진 성시윤 기자]

이튿날인 19일 조사단은 성삼재~노고단~반야봉(편도 7.5㎞) 구간을 걸으며 탐방로 주변의 구상나무 군락을 살펴봤다. 탐방로 주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가지에 달린 잎의 양이 현격히 줄고, 잎의 길이가 짧아지는 등 구상나무가 죽어 가는 모습이 분명했다. 산림과학원 박고은 박사는 “구상나무는 건강한 상태에선 잎이 7∼8년씩 가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2∼3년 정도 된 잎만 보이는 나무가 많다. 그보다 오래된 잎은 이미 떨어져 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박사가 나무 줄기에 나이테 채취기를 대고서 나무 중심부의 조직을 채취해 보았다. 조직을 만지던 박 박사는 “바깥 쪽의 조직엔 아직 수분이 남아 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나무”라고 말했다. 집단 고사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얘기다.

구상나무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멸종위기종이다. 소나무과 전나무속에 속하는 상록침엽수다. 한라산·지리산·덕유산 등 한반도 남부의 해발 1200m 이상 고지대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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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산림과학원이 모니터링 조사를 위해 어린 구상나무 주변에 분홍 또는 빨강색 표지를 꽂아 놓았다. [사진 성시윤 기자]

국립공원 1호 지리산, 그것도 해발 1200m 이상의 고지대에 사는 구상나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임 센터장은 “기후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구상나무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고사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겨울철 고온과 봄 가뭄이다. 이런 이상기후는 1998, 2002, 2009년, 그리고 비교적 최근엔 2014년에 나타났다. 2014년엔 봄철 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1.4도 높았다. 그해 5월 기온은 1973년 이후 가장 높았다. 그달 강수량은 평년의 51.6%에 그쳤다.

구상나무 등 상록수는 겨울철에도 광합성 등 생리적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그런데 가뭄으로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대사장애를 겪는다. 가뭄에 견디기 위해 나무는 잎 뒷면의 공기구멍인 기공(氣孔)을 닫는다. 그러면 체내에서 탄수화물을 만들지 못하고 소비만 해 나무가 쇠약해진다. 사람으로 치면 물을 못 먹고 영양도 공급받지 못해 굶어 죽는 것이다. 구상나무 고사는 능선상에서도 햇빛 노출이 많고 기온이 상대적으로 높은 남서사면에서 집중돼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고사목 주변에서 어린 나무가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 박사는 “죽는 나무 숫자만큼 어린 나무가 자라나면 개체 수가 유지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 멸종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후변화 스트레스로 인해 구상나무 군락에서 저출산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지리산 구상나무뿐 아니라 경북 울진군 소광리 금강송, 설악산 눈잣나무, 계방산 분비나무·가문비나무 등도 비슷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리산보다 구상나무 고사가 심각한 한라산에선 구상나무가 1988년 이후 34% 줄어들었다.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는 2003년 태풍 매미, 2012년 태풍 볼라벤의 영향도 있었다. 이에 비해 지리산에서 발생하는 고사는 주로 고온과 건조에 의한 것이다.

저지대에 사는 나무라면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북방으로 이동하는 방법으로 생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상나무는 고지대에 고립돼 있어 북쪽으로 이동이 불가능하다. 신갈나무 등 구상나무와 경쟁하는 활엽수종이 지구온난화에 따라 저지대에서 고도를 높여 올라오면 구상나무는 버틸 수 없다. 구상나무 군락지에서 경쟁수종을 줄이는 등 구상나무를 인위적으로 보호·복원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마침 산림청은 99년 이후 지리산 바래봉(전북 남원시 운봉면)에 구상나무 3000 그루를 심어 관리하고 있다. 농촌진흥청이 목장을 운영했던 곳이다. 목장이 폐쇄되면서 산림청이 여기에 구상나무를 심었다. 조사단과 함께 가보니 이 일대의 구상나무는 다행히 고사 피해 없이 비교적 잘 자라고 있었다.

신원섭 산림청장은 “군락지에서 어린 구상나무의 생육을 저해하는 요인을 줄이고, 어린 나무를 심는 방법을 통해 구상나무 서식지를 보존·복원하는 방안을 환경부·국립공원관리공단과 함께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S BOX] 한국 고유 수종…구한말 해외로 반출, 크리스마스트리로 애용

한국을 대표하는 고유 수종인 구상나무가 한반도 남부의 고지대에만 사는 이유는 뭘까. 빙하의 확장과 퇴각과 관련이 깊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에 따르면 빙하가 확장돼 남쪽으로 퍼지면서 한반도에선 한때 한대성 침엽수가 주로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빙하가 퇴각하고 한반도에서 기온이 상승하면서 저지대의 침엽수는 기온 상승을 견디지 못해 사라졌다. 하지만 지리산·한라산 등의 고산지대에 남아 있던 침엽수만 격리된 채 환경에 적응해 구상나무가 됐다는 것이다.(이유미 『우리 나무 백 가지』 인용)

구상나무의 영문 학명(Abies koreana E. H. Wilson)엔 ‘한국(koreana)’이 남아 있다. 구상나무처럼 우리 고유 수종이지만 세계 식물학계에 일본 또는 중국 나무로 소개되는 비운을 겪은 것이 여럿이다. 소나무는 영문 학명에 ‘일본 소나무’로, 울릉도 자생 향나무는 ‘중국 나무’로 기록됐다.

구상나무는 구한말 해외로 반출됐다. 유럽 학자가 한라산에서 채집해 해외로 반출한 이후 품종 개량을 거쳐 크리스마스트리로 쓰이기 시작했다. 서구에선 수형이 아름다워 조경용 또는 장식용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구상나무를 크리스마스트리 등으로 이용하기 전엔 서구에선 전나무 등 다른 상록침엽수를 장식용 나무로 이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상나무는 수분과 거름기가 많은 비옥한 땅에서 잘 자란다. 경쟁 수종과 분리된 상태에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해주면 저지대에서도 잘 큰다. 구상나무는 약재로서의 가치도 높다. 구상나무에서 추출한 오일은 염증질환 개선 효능이 있고 항생제 내성을 가진 병원균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지리산=성시윤 기자 sung.si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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