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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南人流] 도전하는 거야, 재밌으니까 ‘코리안 모델, 마이너리티 리포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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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뉴욕에서 열린 디자이너 ‘아담 셀만’의 패션쇼 백스테이지의 모델 김성희. [사진 김성희 인스타그램]

4대 컬렉션에 선 그들…화려한 런웨이, 고단한 삶

다양성이 마치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처럼 되어버린 시대지만 세계 패션 무대만큼은 다르다.

패션 흐름을 좌우하는 주요 디자이너 컬렉션은 뉴욕·런던·밀라노·파리 4개 도시에서 열리고, 이 4대 컬렉션에 참여하는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대부분 유럽과 북미 출신이다.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건 역시 런웨이에 서는 모델들. 열에 여덟 아홉은 백인이고, 나머지 한 둘만 흑인이거나 동양인이다. 최근 한국 모델이 눈에 띄게 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한 줌 마이너리티일 뿐. 원래 가혹하기로 유명한 모델의 세계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한국인 모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샤넬 쇼에 등장한 3명의 한국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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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왕’ 패션쇼 백스테이지의 수주(왼쪽).

지난 3월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넬 2016 가을·겨울(FW) 패션쇼. 칼 라거펠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지휘하는 샤넬 쇼는 모델들에게는 꿈의 무대로 통한다. 샤넬 쇼에 섰다는 것만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업계 분위기 때문이다. 94명의 모델이 등장한 이날 쇼에 한국 모델이 3명이나 섰다. (※다른 아시아 모델로는 중국 3명, 일본 1명이 더 있었다.) 수주(31)·최소라(24)·신현지(20)다. 처음 라거펠트와 작업한 신현지는 “복잡한 동선을 머릿속에서 되뇌이느라 떨 겨를이 없었다”면서도 “감격스러워서 마음속으로 엄청 울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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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열린 ‘돌체 앤 가바나’ 2017 SS 패션쇼 백스테이지의 이봄찬(왼쪽에서 셋째).

이날 패션쇼는 라거펠트가 전체 관람객 700여 명에게 모두 프런트 로우(맨 앞자리)를 선사하겠다며 의자를 단층으로 배열하는 바람에 런웨이가 무려 600m에 달했다. 모델들의 워킹 시간은 평균 8분 30초씩이나 걸렸다. (※쇼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50m길이에 1분 내외다.) 이렇게 웅장한 라거펠트의 스케일은 모델들이 감당하기 쉽지 않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무대라는 매력에 모델들은 너나없이 이 무대에 서기를 갈망한다. 그런 무대를 수주는 2013년 오트쿠튀르 컬렉션 이후 연거푸 20여 회나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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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열린 ‘제레미 스캇’ 2016 FW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수주(오른쪽).

톱 디자이너 쇼에 등장하는 한국인 모델은 더 많다. 2012년 FW 뉴욕컬렉션을 통해 해외 무대에 데뷔한 김성희(30)는 지난 시즌 밀라노와 뉴욕을 오가며 토즈, 캐롤라이나 허레라, 데렉 램 등의 쇼에 섰다. 박지혜(28)는 지난해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던 ‘발망 X H&M’ 컬래버레이션 컬렉션(뉴욕) 무대에 섰다. 또 에르메스의 2016년 봄·여름(SS)과 FW 시즌 무대에도 올랐다. 남자 모델 가운데선 박형섭(25)과 이봄찬(21)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큰 시장이 재밌잖아요”

쇼 등장 횟수(2016 FW 기준)로 세계 17위(모델스닷컴)에 오른 최소라는 해외 진출을 택한 이유로 재미를 꼽았다. 국내에서 4~5년 활동 후 해외무대에 도전한 박형섭은 “큰 시장에서 놀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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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열린 ‘샤넬’ 2016 FW 패션쇼 백스테이지의 신현지(왼쪽).

지난해 뉴욕 컬렉션에 데뷔한 신현지도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모델 활동경험이 전혀 없던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해외에서 활동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친척이 있던) 호주의 에이전시에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프로필 사진도 없어서 증명 사진을 찍는 동네 사진관에서 전신 샷을 찍어 보냈을 정도로 어찌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모델 에이전시 YG케이플러스 신동선 이사는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더 큰 무대에 서겠다며 도전장을 내미는 모델이 늘면서 해외 진출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혜박·수주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토종 국내파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한국 모델들이 해외에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건 국내·외 모델 에이전시간에 구축된 네트워크의 힘도 컸다. 에스팀, YG케이플러스 같은 대형 모델 에이전시가 해외 에이전시와 활발히 교류하면서 한국 모델들이 해외에 얼굴을 알릴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해외의 캐스팅 디렉터를 아예 한국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김성희는 이런 식으로 방한한 캐스팅 디렉터의 눈에 띄어 해외에 진출한 경우다. 그는 “국내에서 2~3년 정도 모델로 일하면서 계속 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던 시점에 새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

여전한 9대 1의 법칙 … 치고 올라오는 중국

한국 모델의 해외 진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장윤주(36)와 송경아(36)가 2000년대 초반 뉴욕과 파리에서 짧게 활동했다. 한국계 모델 중에서 의미있는 성공을 거둔 첫 사례는 혜박(31)이다. 그는 밀라노에서 열린 2005년 FW 프라다 쇼에 동양인으로서는 처음 모델로 발탁됐다. 당시 유럽 언론은 ‘흑인 모델 나오미 캠벨 이후 백인이 아닌 모델이 프라다 쇼에 선 것은 혜박이 처음’이라고 보도하며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백인 모델들만 무대에 세우는 걸로 유명했던 프랑스 브랜드 발망과 이자벨 마랑의 2011년 FW 무대까지 섰다. 두 쇼 모두 동양인 모델이 런웨이에 오른 건 혜박이 처음이었다. 2~3년간 ‘최초의 아시안 모델’이란 타이틀을 달고 무대에 선 패션쇼가 20개가 넘었다.

그러면서 좀처럼 넘지 못할 것 같았던 장벽이 하나 둘 깨지기 시작했다. 한혜진(33)은 2007년 SS 구찌 쇼(밀라노)에 선 최초의 한국인 모델이 됐다. 또 2008년 FW 안나수이 쇼(뉴욕)에서는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피날레 모델(※쇼 마지막에 등장하는 모델)이 되는 등 4대 컬렉션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강승현은 2008년 ‘포드 수퍼모델 오브 더 월드’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모델 에이전시 에스팀의 이보라 이사는 “요즘 20대 모델들이 맹활약할 수 있는 건 앞서 해외에 진출한 1세대 모델들이 길을 잘 닦아 놓아준 덕분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런 의미있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대 컬렉션의 메이저 무대는 백인 모델 위주로 돌아간다. 2015년 FW 시즌 뉴욕 패션위크에서 런웨이에 선 모델 100명 중 77명(77.4%)이 백인이었다. 흑인 모델(8.7%)과 아시안 모델(8.5%)은 각각 8명 정도였다. 다문화 도시 뉴욕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 파리와 밀라노 등 유럽으로 가면 아시안 모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평균적으로 백인 모델과 유색 인종 모델 비율을 9대 1 정도로 보고 있다. 한 두개의 자리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모델들이 경쟁하는 구도.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모델 세계에서도 최근 중국 모델들이 시장의 힘을 등에 업고 영역을 넓혀가는 추세다.

런웨이는 명예, 돈벌이는 또 다른 능력

패션쇼는 늘 화려함의 극치를 뽐낸다. 하지만 일부 수퍼모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모델이 받는 대우는 이런 화려함에는 한참 못미친다. 익명을 원한 한 모델은 “같은 무대에 서더라도 신인은 아예 돈을 받지 못하거나 옷이나 구두 등으로 대신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뉴욕의 D, P, M브랜드에서 돈 대신 옷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모델은 “브랜드가 크고 화려할수록 보수에는 인색한 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보니 런웨이에서는 이름을 알리고 돈은 ‘머니 잡’으로 번다는 게 모델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머니 잡이란 패션·의류 브랜드의 광고 촬영을 말한다. 인기 모델들은 4대 도시 패션위크가 끝나면 바로 잡지 화보나 광고 촬영 스케줄을 잡는다. 한국 모델들은 최근 런웨이 뿐 아니라 이런 주류 광고업계에서도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김성희가 아시안 모델 최초로 프라다의 월드와이드 광고 캠페인을 찍었고, 최소라는 미국 브랜드 코치의 2016년 SS 글로벌 캠페인 모델로 발탁됐다. 박지혜는 캘빈클라인, 유니클로, 마이클 코어스 등의 월드와이드 광고에 등장했다.

결국 모델들의 수입은 4대 컬렉션이 아니라 머니 잡을 얼마나 따내느냐에 달려 있다. 광고 촬영이 많은 모델은 억대 연봉을 벌지만 신인이거나 패션쇼를 주무대로 하는 경우에는 ‘적자’인 경우도 있다. 모델들은 뉴욕이나 런던에 주로 거주하는데 평소 거주하는 아파트 렌트비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항공료, 에이전시 수수료 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된 기다림과 거절

9월 둘째주면 2017년 SS 시즌이 시작된다. 이달말께 모델들은 4대 컬렉션의 첫 도시인 뉴욕으로 떠난다. 제아무리 샤넬 쇼에 여러 번 선 톱 모델이라해도 이들을 기다리는 건 캐스팅 오디션이다. 쇼가 시작되기 열흘쯤 전부터 모델들이 캐스팅 디렉터의 심사를 거친다. 운 좋게 캐스팅이 되도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여러 번의 고비를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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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2016 FW 쇼 런웨이를 걷고 있는 박지혜.

기약없는 기다림은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신현지는 2016년 SS 미우미우 쇼에 설 때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졸인 경험이 있다. 쇼 전날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하염없이 의상 피팅을 기다린 적도 있다. 12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음날 오전 11시에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허탈하게 호텔로 돌아갔다. 피팅은 쇼가 시작하기 30분 전에 겨우 했다. 피팅 장소에서 패션쇼장까지 정신없이 뛰는데 그 와중에 같이 뛰던 동료는 의상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박지혜는 “캐스팅과 피팅은 물론 리허설까지 다 마친 뒤에도 무대에 못 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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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리퍼블릭’ 2016 FW 프리젠테이션 무대 에 오르기 전 동료들과 셀카를 찍은 박형섭(왼쪽).

박형섭은 보통 한 시즌에 100개 정도의 캐스팅 오디션에 참여해 그 중 약 20개 정도에 선다. 김성희는 “거절당하는 게 일상이지만 ‘난 네가 별로야’라는 말이 아직도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거절과 기다림이야 모든 모델의 숙명이지만 한국 모델만 느끼는 좌절감도 있다. 인종차별에 앞서 언어 장벽이 높다. 한 모델은 “영어 실력이 부족해 최소한의 의사소통만 하다보니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물론 메이크업 아티스트 같은 스태프나 광고주 등과 어울릴 수 있는 애프터 파티는 모델 세계에선 매우 중요한 행사지만 언어 장벽 탓에 한국 모델들의 참석율은 저조하다.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각 모델 인스타그램

※ 이번 10일을 시작으로 격주 수요일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섹션 '강남인류(江南人流)'가 옵니다.

평소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연히 시 창작 수업 내용을 시 형식으로 정리한『이성복 시론』을 펼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시'와 '시인'이라고 쓰여진 자리에 '기사'와 '기자'를 대신 써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시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을 상정해 이렇게 조언합니다.

"모든 허물은 나에게 있다 하지요. …독자에 대한 나의 생각과 태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러닝 소매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아이나 뭐 다르겠어요. "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피상적인 사고밖에 안 나와요. …진정성을 가지고 뒤집으면, 모든 게 뒤집어져요. …시가 안 되면 나에게 뒤집음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

시도 잘 모르면서 이렇게 장황하게 시론(詩論)에 대해 늘어놓는 건 10일 독자 여러분들에게 처음 선보일 중앙일보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섹션 江南人流(강남인류)를 만든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소속 기자들의 마음가짐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언론환경을 탓하거나, 거꾸로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신문이란 무릇 이러해야 한다는 고루한 접근을 하는 대신 오로지 독자가 원하는 것을 담기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제호 江南人流에서 江南(강남)은 지역적 의미를 넘어 차별화한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썼습니다. 결국 江南人流란 남다른 취향과 눈높이를 가진 사람들(人)을 위해 일류(一流)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담은 신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10일부터 기존의 江南通新과 번갈아가며 격주로 발행하는 江南人流, 앞으로 기대해 주십시오.

안혜리 부장·라이프스타일 데스크 ahn.hai-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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