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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술·노래방도 혼자…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혼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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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오늘은 무조건 내 마음대로 하는 날.’ 지난 5일을 회사원 추성민(27)씨는 그렇게 정했다. 더위가 살짝 가실 무렵인 오후 5시쯤 추씨는 서울 연희동에 있는 한 술집으로 향했다. 칵테일 한 잔을 시켜 놓고 가방에서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꺼냈다. 책을 읽는 동안 추씨를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여름휴가 중 하루는 이렇게 지나갔다.

관계에 지쳐 탈출구 찾는 사람들
“휴가만이라도 날 위한 시간 원해”
10명 중 1명꼴 1인 여행·영화관객
왕따나 은둔형 외톨이와는 달라
출근 전 10분 멍 때리는 40대 변호사
“그 시간마저 없으면 질식할 것 같아”
중장년층서도 혼밥·혼놀족 늘어

‘혼자 논다’는 건 비사회적 행태로 인식돼 왔다. 사회적 관계를 거부하고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은둔형 외톨이)’ 또는 ‘코쿤(cocoon·누에고치)족’은 비정상적 존재로 묘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혼자 놀기(혼놀)’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특이한 현상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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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국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5월 25~26일)에 따르면 응답자의 49.5%가 “예전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고 답했다. 혼자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아졌다. 영화관 체인 CGV에 따르면 2013년 8.1%였던 나 홀로 관객의 비율은 지난해 10.7%까지 늘었다. 여행사 하나투어는 2013년 7만8000여 명(전체 여행자 중 4.3%)이던 1인 여행 예약이 지난해 20만6000명(8.9%)으로 불어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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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가는 ‘혼놀족’들은 더 이상 사회 부적응자도, 왕따도 아니다. 그들은 얽히고설킨 인맥 사회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에너지를 충전한다고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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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인간관계망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혼놀 문화를 확산시켰다. 물리적인 공간에 혼자 있어도 SNS를 통한 가상에서의 인간 관계는 이어진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밥 먹는 모습의 사진을 올려 타인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물론 이조차 거부하는 단절형 혼놀도 있다. 지난달 일주일 동안 일본 오사카로 나 홀로 여행을 다녀온 정유진(34)씨는 출국 전에 일부러 휴대전화 로밍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정씨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상에서의 관계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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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놀 문화가 청년 세대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워킹맘’ 변호사 김모(44)씨도 종종 혼놀족이 된다. 김씨는 “출근하기 전 차 안에서 10분 정도 멍하니 있다가 운전대를 잡는다. 그 시간마저 없으면 질식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요즘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있다. 김씨는 “물 안에서는 내 생각만 할 수 있고, 나 혼자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40~50대 응답자 449명 중 45.8%는 ‘예전에 비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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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현대인들이 혼놀을 갈구하는 사이 ‘혼자 온 손님 환영’이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은 식당이 생겨났고, 사람들이 모이는 유흥가에서 1인 노래방이 인기를 얻었다. 서울 홍익대 앞에 3년 전 문을 연 1인 전용 노래방 ‘수’는 오전 시간대에도 대기 손님이 있을 정도다. 노래방 직원은 “요즘에는 40~50대 손님들이 늘어 옛날 노래방 책을 구해 놓았다”고 말했다. ‘책 읽는 술집’을 표방하며 서울 연희동에 문을 연 술집 ‘책바’는 손님 60%가 혼자 온 사람이다. 주인 정인성(30)씨는 “책 읽는 사람, 멍하니 벽만 쳐다보는 사람, 고민 상담을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손님이 가게에 온다. 그럴 때마다 ‘세대를 막론하고 다들 피곤하게 사는구나’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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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인제대 상계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혼놀 문화에 대해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려는 현대인들의 욕구가 표출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타인의 평가와 경쟁 등이 강요돼 온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고 말았다. 혼놀은 개인 스스로가 그 관계를 복구해 나가려는 몸부림이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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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놀 문화는 개인과 사회 간의 ‘균형 맞추기’라고도 해석된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한국이 특유의 집단주의 사회에서 다원주의 사회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탄생’이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놀기의 유행은 긍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과부하가 걸린 현대 사회의 피로감을 단순히 개개인의 혼놀이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혼자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형성되고 이에 따라 제도와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혼자의 시간이 건강한 사회적 관계에 긍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박민제·홍상지·윤재영 기자 letmein@joongang.co.kr
사진=김성룡·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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