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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2016] 에티오피아 마라토너, 목숨 건 반정부 ‘X 세리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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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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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폭력을 반대하며 ‘X 세리머니’를 펼친 페이사 릴레사(에티오피아). [리우 로이터=뉴스1]

그의 가슴엔 선명하게 붉은 글씨로 ‘Ethiopia

남자 마라톤 은메달 딴 릴레사
손으로 X그려 정부 폭력에 항의
“귀국 땐 날 죽이거나 감옥 가둘 것”
캄보디아로 귀화한 일본 개그맨
2시간45분 꼴찌서 두번째로 완주

(에티오피아)’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42.195㎞를 쉼없이 달리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이 글자가 무척이나 거슬렸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조국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올림픽 메달은 그에게 폭력을 고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22일 리우 시내 코스에서 열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경기에서 엘리우드 킵초게(31·케냐)가 2시간8분44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눈길은 1분 뒤 들어온 페이사 릴레사(26·에티오피아)에게 쏠렸다. 릴레사는 결승선을 통과하며 두 팔을 머리 위로 교차하며 ‘X’를 그렸다. 어리둥절한 사람들에게 그는 반복해서 X를 만들어보였다. 경기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시상대에 올라서도 X자를 만든 그의 팔은 풀리지 않았다.

릴레사는 “에티오피아 정부는 우리 국민들을 죽이고 있다. 나는 정부의 폭력에 반대한다”면서 X자 세리머니의 의미를 설명했다. 릴레사는 에티오피아 국민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오로모족 출신이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정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정치·경제적 소외감을 표현하며 반정부 시위를 벌인 오로모족에 대한 대대적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4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릴레사는 “내가 에티오피아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나를 죽이거나 감옥에 가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에서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때문에 릴레사의 메달 박탈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다행히 폐막식과 함께 열린 시상식에서 릴레사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육상 200m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시상식에서 각각 검정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렸다. 흑인으로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제스처였다. 둘은 선수촌에서 쫓겨났지만 메달은 가까스로 지켰다. 2012 런던 올림픽 축구에서 동메달을 딴 박종우는 관중이 건넨 ‘독도는 우리 땅’ 플래카드를 들었다가 IOC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기적의 마라토너들 눈길=이날 마라톤에서는 일본 출신 개그맨 다키자키 구니아키(39·캄보디아)가 2시간45분44초(139위)의 기록으로 골인, 완주에 성공했다. 레이스를 포기한 선수 15명을 제외하면 끝에서 두번째 였지만 다키자키는 독특한 이력 덕분에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마라톤이 취미였던 그는 지난 2009년 일본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다가 “국적을 바꿔 올림픽에 출전해 보라”는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캄보디아로 귀화했다. 2012년 런던 대회는 국적 취득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참가할 수 없었지만 이번 대회에 출전해 값진 성과를 거뒀다.

미국의 갈렌 루프(30)는 두 번째 마라톤 완주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1만m가 주종목인 그는 지난 2월 마라톤 선수로 데뷔했다. 런던 대회에서는 1만m 은메달을 차지한 바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일주일 전 열린 1만m 경기에서 5위로 골인했다.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루프는 마라톤 개인 최고 기록(2시간10분5초)을 달성하며 동메달을 땄다. 루프는 “내 주종목은 1만m”라며 “이번 마라톤은 내 인생 최고의 경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주영 기자 jang.jo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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