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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수컷이 깜박이면 암컷도 깜박… ‘구애의 빛’ 온몸으로 밝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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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양 반딧불이 여행

 여름밤이면 반딧불이를 흔히 볼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반딧불이는 인적 드문 시골에서만 겨우 볼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반딧불이 빛나는 밤을 보고 싶었다. 국내 대표 청정 지역으로 꼽히는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반딧불이가 빛나는 영양의 밤은 네온사인이 켜진 도시의 밤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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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 영양반딧불이특구. 빙글빙글 춤 추듯 날아다니는 늦반딧불이 궤적을 담았다.

경북 영양은 첩첩산중의 오지다. 이 벽촌으로 ‘밤’을 즐기려는 여행객이 모여든다. 영양의 밤이 도시의 밤처럼 휘황찬란해서가 아니다. 영양은 우리나라에서 밤이 가장 깜깜한 고장이다. 인공 조명의 영향이 적어서다. 그러나 그 어둠 덕분에 영양의 밤은 외려 환해진다. 구름 없는 날이면 수천 개 별이 영양의 밤을 환히 밝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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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집통에 담긴 늦반딧불이를 바라보고 있는 가족 여행객.

영양의 밤을 밝히는 것이 별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지상의 별’ 반딧불이다. 국립생물자원관 김태호(47) 박사는 “반딧불이는 인공조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생물”이라며 “빛 공해가 적은 영양은 반딧불이가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전북 무주, 제주 등 전국 곳곳에 반딧불이가 출현하는 곳이 더러 있지만, 영양을 반딧불이 여행지로 낙점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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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반딧불이생태학교. 반딧불이 표본을 볼 수 있다.

영양군에서도 수비면 수하리에 있는 영양군자연생태공원(390만㎡)이 반딧불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다. 이 생태공원 안에 영양군이 관리하는 영양반딧불이특구(193만㎡)가 있다. 영양군은 2005년 1급수가 흐르는 장수포천 주변을 영양반딧불이특구로 지정하고, 반딧불이 서식지로 보호하고 있다.

“장수포천은 멸종위기 1급 동물인 수달이 서식할 정도로 물이 깨끗합니다. 반딧불이가 장수포천에서 다슬기·달팽이 등을 쉽게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동식물 채집과 농약 살포를 일절 금지한 덕분이죠. 8월 하순이 되면 반딧불이 수천 마리가 날아다니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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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반딧불이특구 입구에 설치된 조형물.

영양반딧불이특구에서 만난 영양군청 김강규(55) 사무관의 말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교과서에서나 봤던 반딧불이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얼른 밤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오후 8시가 되자 드디어 어둠이 찾아들었다. 김경호(39) 연구원과 함께 영양반딧불이특구에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반딧불이를 찾아 나섰다. 랜턴 불빛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김 연구원이 “랜턴을 끄고 어둠에 익숙해지라”고 말했다.

“형광등 밝기가 600lx(럭스)인데 반해 반딧불이 불빛의 밝기는 3lx밖에 안돼요. 인공조명이 있으면 반딧불이 관찰이 힘듭니다. 달빛 아래서도 반딧불이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달이 훤한 보름은 피하고 그믐에 맞춰 반딧불이 탐사를 나서는 게 좋습니다.”

서둘러 랜턴을 끄자 사위가 빛 하나 없는 어둠에 잠겼다. 그때였다. 연둣빛 하나가 공중에 나타났다. 반딧불이였다. 작지만 영롱한 빛 하나가 나무를 옮겨 타다 유유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생애 첫 반딧불이와의 조우였다. 반딧불이가 도망 갈까봐 감탄사가 튀어나오려는 입을 황급히 막았다. 몇 걸음을 더 옮기니 한데 모여 반짝거리던 반딧불이 100여 마리가 보였다. 하늘의 별이 땅으로 내려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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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반딧불이 애벌레. 축축한 흙에 사는 달팽이를 먹고 산다.

김 연구원이 표충망을 휘둘러 반딧불이 한 마리를 잡아 보여줬다.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의 ‘늦반딧불이’였다. 늦반딧불이는 ‘운문산반딧불이’ ‘애반딧불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반딧불이 종이다. 운문산반딧불이와 애반딧불이는 5월 말에서 7월 말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고, 늦반딧불이는 8월부터 9월까지 출현한다.

반딧불이는 배 부분에 밝게 빛나는 발광기를 달고 있는데, 발광기에 있는 루시페린이라는 물질이 산소와 만나면서 빛을 낸다. 수컷은 발광기 두 개, 암컷은 한 개를 달고 있다. 김 연구원의 설명을 듣고 늦반딧불이의 배 부분을 보니 발광기 두 개가 빛나고 있었다. 수컷이었다.

“지금 늦반딧불이 짝짓기가 한창이에요. 수컷이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깜박거리면 풀잎이나 나무에 붙어 있는 암컷도 불빛을 밝히며 응답합니다. 인공조명이 있으면 반딧불이는 빛 신호를 주고받을 수 없어요. 우리가 어둠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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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반딧불이 암컷(오른쪽)과 수컷. 암컷은 날개가 퇴화돼서 날지 못한다.

반딧불이는 생의 대부분을 하천 바닥이나 풀숲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런 반딧불이가 일생에 한 번뿐인 외출을 감행한다. 짝을 찾기 위해 여름밤을 날아다닐 때다. 반딧불이가 짝을 찾을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보름 남짓이다. 수컷은 짝짓기가 끝나면 죽고, 암컷은 짝짓기 2~3일 뒤 알을 낳고 죽는다. 평생에 한 번뿐인 사랑을 위해 반딧불이는 그렇게 온몸을 밝히는 것이다.

“이제 하늘에서 눈을 떼고 땅을 보세요.”

하늘을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찾기 위해 힘껏 젖혔던 고개를 얼른 숙였다. 수풀 속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니 수십 개 빛이 수풀 여기저기에 달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빛을 만져봤다. 빛의 주인공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늦반딧불이 애벌레였다.

“반딧불이는 알도, 애벌레도, 번데기도 빛이 납니다. 어른벌레처럼 날아다니지 못해도 생명의 빛을 품고 있죠. 이 에벌레가 겨울을 이겨내면 내년 여름에는 환한 빛을 내며 날아오를 겁니다.”

늦반딧불이 애벌레 빛은 어른벌레보다 밝기가 덜했다. 애벌래 빛은 꺼질 듯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반딧불이의 빛이 이어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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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경북 영양 영양군자연생태공원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30분 걸린다. 생태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반딧불이를 찾아볼 수 있다. 공원 안에 영양반딧불이생태학교도 있다. 반딧불이·사슴벌레 등 곤충 표본을 볼 수 있다.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1년에 딱 하루 ‘반딧불이 탐사행사’가 개최된다. 올해는 27일 오전 10시∼오후 10시 진행된다. 생태해설사와 함께 반딧불이를 관찰하고 반딧불이 날리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무료. 054-680-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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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유리병 속 반딧불이 빛으로 책 읽어볼까요

글=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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