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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이 영화에 여성을 허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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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남자여도 상관없거나 남자에게 복수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아는 진짜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내 어머니는 짓궂고, 아내는 내 앞에서 엉망진창으로 굴고, 여동생은 나랑 잘 놀아 주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제각각 재미있고 매력이 넘친다. 나는 그저 내가 보고 겪은 여성들을 영화에 그릴 뿐이다.”

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할리우드 판타지 액션영화 ‘고스트버스터즈’(8월 25일 개봉)를 연출한 폴 페이그 감독의 말이다. 그가 어떻게 여성 캐릭터들이 생생히 살아 있는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2011) ‘스파이’(2015) 같은 코미디영화를 선보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단박에 짐작케 한다.

페이그 감독이 연출한 ‘고스트버스터즈’는, 유령 잡는 특공대의 활약을 그린 동명 B무비 시리즈(1984~89, 이반 라이트먼 감독)를 여성 주인공 버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할리우드 남성 스타들이 총집합했던 ‘오션스’ 3부작(2001~2007,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여성 주인공 버전(게리 로스 감독, 샌드라 불럭·헬레나 본햄 카터·케이트 블란쳇 출연 예정)을 기획 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 영화계에도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이야기를 그린 ‘국가대표2’(8월 10일 개봉, 김종현 감독)와 같은 작품이 나오고 있다. 남자 스키점프 국가대표팀을 주인공 삼았던 ‘국가대표’(2009, 김용화 감독)의 여성 버전 속편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영화계에 폴 페이그 같은 감독이 많다고는 결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영화에는 여성 캐릭터를 극의 중심에 내세운 기획도 드물 뿐더러, 조연으로 범위를 확대해도 타당하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나기 힘들다. ‘마음을 잡아끄는 시나리오를 찾기 힘들다’는 여자 배우의 고충은 이제 익숙한 이야기가 됐다. 혹시 그 모든 것이 ‘여성영화는 안 된다’는, 정확한 근거를 알 수 없는 고정 관념의 산물은 아닐까.

그리하여 magazine M은 상상했다.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 버전을.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여성 관객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 관객들 모두 분명 이런 영화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Type 1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면?
지난해 100만 명 이상 관람한 한국영화 가운데 여자 배우 이름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영화는 고작 세 편에 불과했다. 그중 ‘암살’(최동훈 감독)과 ‘차이나타운’(한준희 감독)이 거둔 성과는 남달랐다. 기존 영화에서 남자 배우가 맡던 킬러나 암흑가 보스 등의 역할을 여성으로 바꿔도 승산이 있음을 보여 준 것. ‘남자였다면 뻔하게 느껴졌을 캐릭터가 여성이기에 더 매력적이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여자 배우를 기용할 만한 배역이 없다는 건 핑계다. 주인공의 성별만 바꿔도 새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여자 주인공 버전을 보고 싶은 화제작 다섯 편을 골랐다. 상상해 보시라, 충분히 흥미롭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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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녀들
원작: '검은 사제들' (2015, 장재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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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세상사에 달관해 시큰둥한 고참 수녀 '고수녀'

김태리 싱그러운 젊음을 뽐내는 당돌한 젊은 수녀 아그네스

박보검 두 수녀가 구마 의식으로 구해야 하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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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고현정, 김태리, 박보검 [중앙포토]

‘검은 수녀들’은 여성의 연대감이 깃든 오컬트 스릴러인 동시에 수녀복 입은 여성 수퍼 히어로 영화다. 두 수녀에게 미스터리한 뉘앙스를 부여하기 위해 쓸데없는 과거 장면은 과감히 생략하자.

한국 땅에서 수녀로 살아가는 두 여성이 가톨릭 규율을 넘나들며 때로는 치고받고 때로는 의지하는 모습을 그린다. 악령 들린 청년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두 수녀는 신에 대한 믿음과 합리적인 이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토론한다. 결국 구마 의식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과정인 셈. 강렬한 이야기 때문에 카리스마와 당돌함이 동급 최강인 고현정과 김태리의 캐스팅이 절실하다.

수녀지만 마녀 같은 고참 수녀 역의 고현정, 되바라진 듯해도 순수한 젊은 수녀 역의 김태리가 명징한 발음으로 들려줄 라틴어 대사도 기대된다. 순수한 이미지를 쌓은 박보검의 귀신 들린 연기도 흥미롭겠다. ‘트와일라잇’ 5부작(2008~2012)이 변질되기 전, 개성 넘치는 1편을 연출했던 캐서린 하드윅을 감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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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 마동석
원작: '천하장사 마돈나'(2006, 이해영·이해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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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영 여자 씨름부 지원 여고생 마동순

고수희 동순의 엄마이자 식당 주인

라미란 씨름부 감독 황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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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황미영, 고수희, 라미란 [중앙포토]

마동순은 여고생. 식당 집 딸이다. 동순에게는 엉뚱한 꿈이 있다. 마동석처럼 멋진 남자가 되는 것. 하지만 엄마는 딸이 졸업 후 식당을 물려받길 원한다. 어김없이 배달을 마치고 목욕탕에 간 동순은 우연히 체육 교사 황나미를 만난다. 동순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황나미는, 여고 씨름부를 만들 계획을 세우던 중 동순의 완벽한 몸에 반해 씨름부 합류를 권한다. 거절하던 동순은 우여곡절 끝에 이 제안을 승낙한다. 그때부터 동순은 학교에서는 샅바, 방과 후에는 배달통을 잡게 된다.

딸에게 꿈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 삶에 찌든 엄마. 마동석처럼 강인한 사람이 되고 싶은 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 열어 가는 과정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연출은 임순례 감독이 적격일 듯.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이하 ‘우생순’)의 감동을 떠올려 보라! 씨름부원으로는 ‘기술 씨름’의 여왕 캐릭터에 김슬기, 육상과 씨름 사이에서 갈등하는 캐릭터에 아이돌 가수 보라(씨스타), 동순의 단짝 캐릭터에 개그우먼 홍윤화를 캐스팅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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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위대하게2
원작: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장철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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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지 북한에선 혁명 전사, 남한에선 '서울역 꽃거지' 리미지

김예원 베트남 신부로 위장한 북한 최고 예술단 단장의 숨겨진 딸 리설

김유정 최연소 남파 간첩 원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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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배수지, 김예원, 김유정 [중앙포토]

조국 통일의 사명을 안고 남파된 북한 최정예 요원 리미지·리설·원류희. 그들의 임무는 어처구니없게도 서울역 노숙자, 베트남 신부, 한류 스타 극성팬으로 위장하는 것. 중국 옌볜 출신 할머니(나문희)가 운영하는 철거 직전 국밥 집을 아지트 삼아 ‘공화국’의 전설이 되려는 그들. 그러나 특별한 명령 없이 시간은 흘러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리설에게 ‘남한 최대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리설의 오디션 준비를 돕다 ‘서울역 꽃거지’란 영상에 찍혀 유튜브 스타가 되는 미지.

윗선에서는 신분이 들통날 위기에 처한 미지를 처치하라 명하지만, 미지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은 류희는 차마 그러지 못한다. 이때 국밥 집 할머니가 괴한에 납치되고, 미지는 사건의 배후로 서울 도심 재개발 공약을 내세운 어느 국회의원을 의심한다. 괴짜 여성들의 은밀한 연대를 애잔하게 담아낸 부조리극에는 이경미 감독이 제격. ‘비밀은 없다’(6월 23일 개봉)의 날 선 정치 풍자 감각이 이 영화에 또 다른 긴장감을 불어넣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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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널티 퀸
원작: '반칙왕'(2000, 김지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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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우
소심하지만 깐깐한 성격의 은행원 예금란
박서준
금란이 찾은 주짓수 도장의 젊은 사범 박정민
이성민
금란의 일거수일투족을 꼬집으며 괴롭히는 은행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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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지우, 박서준, 이성민 [중앙포토]

은행원 예금란의 하루는 팍팍하다. 직업병인 방광염은 몇 달째 낫지 않고, 지점장은 ‘예금 유치 실적이 저조하다’ ‘성격이 까다로워 결혼하기 힘들겠다’며 잔소리에 인신공격까지 해 댄다. 어느 날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퇴근하다 치한까지 만나 폭발한 금란. 자신도 모르는 괴력으로 치한을 퇴치하고, 그 길로 간판에 ‘호신술’이라 적힌 주짓수 도장에 들어선다. 그곳에서 금란은 해사한 외모와 딴판인 운동밖에 모르는 과격 사범 정민을 만난다. 혹독한 훈련으로 훌쩍 성장한 금란은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반격을 가하려 한다. 법 없이도 살 것 같던 금란은 주짓수 대결을 펼칠 때만큼은 ‘반칙의 여왕’으로 돌변한다.

평범한 직장인 미혼 여성이 일상적 폭력에 대응하는 과정을 블랙코미디로 녹여내는 게 관건이다. 새침한 깍쟁이에서 최근 털털한 옆집 언니 이미지로 변신에 성공한 최지우. 그가 긴 팔다리로 엎어치기 등 무술 기술을 선보이며 마음속 응어리를 폭발시키는 모습이 극의 포인트일 듯. 예지원이 ‘48차원’ 무협소설 작가 역으로 특별 출연해, 금란과 주짓수 대결을 펼쳐도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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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년 쿨한년 수상한년
원작: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2008, 김지운 감독, 이하 '놈놈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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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독립군 스나이퍼 안옥윤

김혜수 중국 상하이의 호화 객잔 주인 정마담

탕웨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중국 만주의 자객 왕치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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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전지현, 김혜수, 탕웨이 [중앙포토]

이번엔 여자들이 만주 벌판을 헤집고 다닌다. 원작에 등장하는 박도원(정우성)의 동료인 독립군 스나이퍼 안옥윤, 윤태구(송강호)와 채무 관계로 얽힌 객잔 주인 정 마담, 박창이(이병헌)의 미스터리한 연인 왕치아즈. 그들은 원작의 결말에서 세 ‘놈’들이 발견한 보물을 건네받으려는 인수자들이다. 하지만 놈들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그들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세 ‘년’들은 일본군에게 큰 손상을 입혀 현상 수배범이 된다. 일본군 만주 사령관(쿠니무라 준)은 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고, 세 여자는 하나로 뭉쳐 적에 맞서면서 나름 각자의 잇속을 계산한다.

‘놈놈놈’이 액션·어드벤처·코미디의 결합이라면, 이 영화는 감각적인 ‘걸 크러시’ 액션. 세 배우의 캐스팅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만약 조성희 감독의 만화적인 터치가 더해진다면 매우 독특한 영화가 나올 듯.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2010년 이후 새로워진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



올해 ‘아가씨’(6월 1일 개봉, 박찬욱 감독)가 찾아왔다. 추잡한 욕망으로 점철된 남성들의 세계에서 인형처럼 살던 여자.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벽을 넘어서는 전복적 쾌감을 주는 ‘아가씨’는, 적어도 ‘페미니즘적 해석이 가능한 영화’라는 점에서 반갑다. 한국 상업영화 중 레즈비언 이야기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2010년대 들어 기억할 만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여성에 대한 사려 깊은 태도를 보여 준 영화는 여럿이었다. 특히 주류에서 밀려나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노년 여성의 심리와 일상을 다루는 영화가 등장한 점을 주목할 만하다. ‘시’(2010, 이창동 감독)는 도덕과 예술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향한 감독의 질문을 담은 작품이지만, 그 주인공이 홀로 손자를 키우는 노년 여성 미자(윤정희)임은 의미심장하다. 보다 상업적인 감각으로 관객과 소통한 ‘수상한 그녀’(2014, 황동혁 감독)도 눈에 띈다. ‘노년 여성의 꿈이 꼭 젊은 여성의 몸을 빌려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이 남지만, 시도 자체는 신선했고 나름의 의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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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스틸 [중앙포토]

여성인 데다 또 다른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약자 계층에 머물게 된 이들을 들여다보는 움직임도 있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요소가 우선인 점은 아쉽지만, ‘하모니’(2010, 강대규 감독)는 여자 교도소 합창단을 통해 ‘여성 범죄자’라는 사각지대를 주목한 시도였다.

‘카트’(2014, 부지영 감독)는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나아가 연대의 가치를 말한다. 적어도 이 영화 이후 우리의 일상에서 ‘마트 직원’은 이전과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여성 캐릭터의 끈끈한 연대는 실화 소재 스포츠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도전을 그린 ‘국가대표2’는 ‘우생순’ ‘코리아’(2012, 문현성 감독)와 궤를 나란히 놓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배우 손예진의 필모그래피를 중요하게 언급해야 한다. 2010년대에 그는 ‘호러와 멜로의 결합’이라는 신선한 변주를 꾀한 로맨틱 코미디 ‘오싹한 연애’(2011, 황인호 감독)부터 ‘해적:바다로 간 산적’(2014, 이석훈 감독) ‘덕혜옹주’(8월 3일 개봉, 허진호 감독) 같은 시즌 대작까지 스펙트럼을 꾸준히 넓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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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스틸 [중앙포토]

이미 티켓 파워와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이기에 가능한 행보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자 배우 운신의 폭을 넓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손예진의 최근작 ‘비밀은 없다’가 남긴 의미는 남다르다. 이 영화 속 연홍(손예진)의 복수는 남편 종찬(김주혁)에게 가하는 개인적 차원의 응징을 넘어, 그와 국회의원 선거가 뜻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며 정면 돌파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엄마’란 이름으로 단죄하거나 해결을 시도했던 다른 영화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Type 2 존재감 폭발한 여성 캐릭터, 스핀오프 제작이 시급하다!
남자 천하인 한국영화 속에서도 기어이 자신만의 뚜렷한 인상을 남긴 여성 캐릭터들이 있다. 그건 그 인물의 신선한 생명력과 배우의 특별한 매력이 만나 터진 폭죽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캐릭터조차 남성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 속에 조력자로 머물거나,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그토록 매력적인 캐릭터들에게 그들만의 삶과 이야기를 되찾아 주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이 멋진 여성들이 중심에 선 이야기를 보고 싶다. 그것이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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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 설계자들
원작: '타짜'(2006,최동훈 감독), '타짜-신의 손'(2014, 강형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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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도박판의 꽃' 정 마담

이하늬 도박판의 설계자로 진화해 정 마담을 위협하는 우 사장

신세경 우 사장의 라이벌 허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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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혜수, 이하늬, 신세경 [중앙포토]

‘타짜’의 정 마담은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여성 캐릭터다. 이 언니가 타짜의 계략 한 번에 무너지고 끝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정 마담만큼 섹시하지만 스케일이 작은 우 사장이나 남자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바쁜 허미나에게는 한 수 가르침이 필요하다. 정 마담의 능란함, 우 사장의 교활함, 미나의 앙칼짐이 뒤엉키는 설계자 리그를 따로 개최해 보자. 서로 호구와 타짜를 뺏고 빼앗기는가 하면, 전략적 제휴와 배신을 거듭하다 마지막 승부를 벌이고, 결말에 이르러 정 마담이 모든 걸 쓸어버리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아무도 울지 않고, 남자를 돕기 위해 옷을 벗지도 않는다. 세 여자 모두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다 성공이든 파멸이든 하면 좋겠다. 이를 위해 최동훈 감독의 복귀가 시급하다. 그는 사기꾼도 잘 알고 여자도 잘 아니까. 이숙명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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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거상 윤꽃분
원작: '국제시장'(2014, 윤제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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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란 기구한 인생 끝에 부산 제일의 거상이 된 윤꽃분

박해일 꽃분에게 소홀하다 뒤늦게 후회하는 글쟁이 남편 이해명

유승호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은 아들 이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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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라미란, 박해일, 유승호 [중앙포토]

‘국제시장’에서 한국전쟁의 포화를 뚫고 피난한 덕수(황정민) 가족. 그들이 부산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그곳의 국제시장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고모 꽃분 덕이었다. 그의 인생 역시 덕수 못지않게 기구했을 터. 원작에 남편(홍석연)이 등장하지만 더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자. 일제강점기, 꽃분은 집안 어른의 중매로 반지르르한 외모의 문학청년 이해명과 혼인한다. 그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해명은 아들 길수가 태어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린다. 바다 건너 남편은 ‘돈 떨어졌다’는 내용의 편지만 보내올 뿐이다. 홀로 아들을 키우며 열심히 가게를 키워 가는 꽃분. 그는 고생 끝에 부산 제일의 거상이 되지만 해명과는 소식이 끊긴다.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 나타난 해명은 뒤늦게 꽃분을 찾아 눈물로 용서를 빈다. 정작 꽃분의 얼굴에는 별 감흥이 없다. 비운의 아내에서 배짱 두둑한 거상으로 거듭나는 꽃분을 보여 주는 데 라미란이 못 해낼 건 아무것도 없다. 영화에 세밀한 감정을 새기는 이안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면, 통속극의 색이 짙은 원작을 뛰어넘는 인생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장성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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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들
원작: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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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한때 가수로 활동했으나 조폭 출신 소속사 사장을 도와주다 파멸한 주은혜

강소라 능력도 야망도 있지만 여자라 무시당하는 신입 검사 안영이

진경 은혜의 언니, 연락 끊긴 동생을 찾아다니는 의지의 장녀 주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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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엘, 강소라, 진경 [중앙포토]

‘내부자들’에서 주은혜는 성매매 현장에 잠입하고, 고위층의 부정을 목격하며, 그들을 협박하다 죽었다. 어마어마하게 배포가 큰 여자다. 그게 오직 사랑 때문이라고? 설마. 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자. 은혜를 성매매 현장에 침투시킨 안상구(이병헌)도 누구 못지않게 나쁜 놈이다. 은혜는 상구를 돕는 척하며 인생 역전할 다른 계략을 꾸민다. 파트너로 선택한 이는, 원작의 우장훈(조승우)처럼 ‘빽’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여자’라는 핸디캡까지 지닌 검사 영이.

TV 드라마 ‘미생’(2014, tvN)에서 이미 넥타이 맨 남자들 여럿 상대해 본 강소라에게 더 큰 기회를 주고 싶다. 복수심을 가슴에 품고 은혜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 가는 은희 역엔 진경을 추천한다. 이엘과 외모가 닮은 데다, ‘감시자들’(2013, 조의석·김병서 감독)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 등에서 남자 배우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뽐낸 진경 특유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만끽하고 싶다. 이숙명 영화저널리스트

Type 3 남녀 주인공 성별만 바꿨을 뿐인데...
우리가 그간 얼마나 성 역할의 고정 관념에 갇혀 있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주인공의 성별만 바꾸고 다른 설정은 크게 바꾸지 않았는데도, 이야기의 결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다. 여성은 나이와 상관없이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모성애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약자의 보호자를 자처할 수도 있다. 이 당연한 이야기는 그간 한국영화에서 전혀 당연하게 취급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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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효
원작: '은교'(2012, 정지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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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심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70대 화가 천경혜

지수 해사하고 총명한 고3 소년 은효

천우희 스승의 재능을 질투하고 은효에게 집착하는 경혜의 제자 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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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고두심, 지수, 천우희 [중앙포토]

낯선 소년이 경혜의 뜰 안에 잠들어 있다. 지원은 깨우려 하지만, 경혜는 놔두라 한다. 알고 보니 옆집 소년. 그날 일을 계기로, 마침 새 작품을 발표해 바빠진 지원 대신 은효가 경혜 곁에서 잔심부름을 도맡는다. 경혜는 해맑은 은효가 예쁘다. 만약 자신에게 젊음이 주어진다면 은효와 어떤 관계가 됐을까 상상한다. 꽃을 다룬 경혜의 그림을 보고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 아님”을 이해한 총명함도 기특하다. 한편 지원은 스승의 도움으로 등단한 뒤, 제힘으로 새 작품을 내지 못해 힘겹다. 반은 강제로 사귀기 시작한 은효가 경혜를 동경하는 것도 불안하다. 어느 날 우연히 경혜가 그린 은효의 누드화를 보고 질투에 사로잡힌 지원. 결국 스승의 그림을 훔쳐 자기 것인 양 세상에 발표하고 경혜는 분노한다. 복잡하게 얽힌 세 사람이 파국으로 치닫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그리기엔 김태용 감독이 딱이다. ‘만추’(2011)에 섬세한 감정의 결을 입혀 나간 그의 솜씨를 떠올려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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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원작: '아저씨'(2010, 이정범 감독)
-추천배우

배두나 세상을 등진 채 외롭게 살아가는 전직 특수 요원 태주

송대한·송민국·송만세 태주의 유일한 친구들이자 할머니 손에 자란 옆집 삼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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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나, 삼둥이 [중앙포토]

전당포 주인 태주의 일상은 속죄로 시작한다. 과거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그러나 친화력을 앞세워 태주를 “아줌마!”라 부르며 따르는 옆집 삼둥이는 당해 낼 수 없다. 결국 그들은 태주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어느 날, 삼둥이의 유일한 피붙이인 할머니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면서 정치 깡패들이 삼둥이를 납치한다. 다시는 총을 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태주는 망설인다. 하지만 삼둥이가 부르던 ‘세 쌍둥이’ 노래와 사이좋게 나눠 먹은 갈비만두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다. 다정한 성격의 둘째 민국이가 새끼손톱에 붙여 준 스티커도 눈에 밟힌다. 구해야 할 아이가 하나도 둘도 아닌 셋이지만 태주는 결심한다. 거울 앞에 선 태주는 직접 ‘바리깡’으로 머리카락을 밀고 어깨에 문신을 새기며, 삼둥이를 납치한 이들을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연출은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맡는 게 좋겠다.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처럼 스타일리시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액션을 완성할 듯.

 할리우드 영화에도 여성을 허하라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안은 여자배우마다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할리우드의 상황도 낙관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전 세계 극장가를 침공하는 할리우드 영화 중에 이런 작품들이 끼어 있다면 참 좋겠다.

‘제인 본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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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시리즈(1962~)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여성 스파이 액션 시리즈가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당대 최고의 여자 배우가 주인공 제인 본드 역을 맡고, 각 편마다 긴박한 첩보 작전 도중 마주치는 미끈한 남자들과 화끈한 시간을 보낸다면? 카리스마·미모·연기력을 고루 갖춘 샤를리즈 테론(사진)에게 제1대 제인 본드의 영예를 안기고 싶다.

저수지의 치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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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배우들이 출연해도 범죄 세계의 잔혹한 생리, 위험하고 불경스러운 분위기, 우연과 모순이 거듭되는 실험적인 이야기로 가득 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연출한 ‘저수지의 개들’(1992)처럼 컬트로 추앙받는 독립영화의 걸작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독특한 매력을 뽐내는 주인공 범죄자들 역에 헬렌 미렌(사진)·우마 서먼·비올라 데이비스·루시 리우·마고 로비·크리스틴 스튜어트 등 다양한 연령과 인종의 여성 배우들이 총출동한다면 더욱 아름다운 그림이 될 터.

우먼 인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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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인 블랙’ 3부작(2002~2012, 배리 소넨펠드 감독)의 여성 버전. ‘여성 혐오 범죄를 일으킨 사람들이 실은 못된 외계인이 변신한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를 처단하기 위해 비밀 조직 ‘우먼 인 블랙’(WIB)의 여성 특수 요원 짝패가 나선다. 블랙 수트를 차려입고. 겉으로는 아옹다옹하지만 알고 보면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두 주인공 역엔, 유쾌한 코미디 연기가 장기인 옥타비아 스펜서(사진)와 브리 라슨이 안성맞춤일 듯.

더 폭스 오브 월스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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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격렬하고 관능적이며 황금의 냄새로 가득한 곳은, 아마도 미국 뉴욕의 월가가 아닐까. 그 세계의 뻔뻔한 욕망을 원초적으로 그린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같은 영화가 반드시 남자 주인공을 내세울 필요는 없다. 다코타 존슨(사진)이 물질만능주의적 탐욕에 흠뻑 젖은 금융인의 환희와 절망을 연기한다면, 원작 못지않은 화끈한 영화가 될 것이다.

장성란·이은선·나원정·김나현 기자, 이숙명·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김혜선 영화 칼럼니스트 hairp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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