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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제 들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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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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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애초에 부당한 차별이 있었다. 그 차별을 바로잡고자 회합, 전단 배포, 청원이나 로비 등을 해 봤으나 그 효과는 극히 미미했다. 온건한 방식이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판단한 여성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불을 질렀고 유리창을 부쉈으며 폭탄을 던지기도 했다.

이는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즉 서프리지(suffrage)의 전개 과정이다. 영국에서 여성들이 부분적인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1918년,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1928년의 일이다. 여성 참정권이란 생각이 등장한 게 1865년의 일이고,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구별해 지칭되는 호전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에 의해 폭력적인 운동방식이 도입된 것이 1903년이었다. 서프러제트의 운동방식 및 이들이 여성주의 운동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평가의 찬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채택한 폭력적 방식에 의해 여성 참정권 운동이 급물살을 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의 꾸준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들리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세상이, 그러니까 남자들이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라는 여성주의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온라인에 게시했다는 이유로 게임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의 계약이 해지되고 이미 녹음한 작업에서 목소리가 제거된 일이 있었고 논란이 여전히 계속 중이다. 해당 티셔츠는 ‘여자들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는 문구가 영문으로 표기된 단순한 디자인의 것이다. 여성이 독립적 주체로서 동등한 남녀 관계를 설정하겠다는 바람직한 선언일 뿐인 바, 저 문구가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실제로도 왕자가 아니고 비유적 의미로도 왕자가 아닌 경우가 많은 대한민국의 절대 다수 남성으로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티셔츠라고도 하겠다. 누군가에게 왕자 노릇을 해 줘야 한다니. 용으로부터 구해 주기도 하고 성에 살게도 해 줘야 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도 장만해 줘야 한다. 이건 매우 힘들지 않겠는가.

따라서 게임회사 측의 조치를 지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메갈리아가 단순히 여성주의 사이트가 아니라 문제적 내지 범죄적 집단이란 것이고 그 판단 근거는 이들이 채택해 왔던 운동방식, 즉 폭력적이고 혐오적 표현의 사용이다. 시작은 남성들의 여성 혐오 발언을 그대로 돌려주는 ‘미러링’이었지만 대개의 사회적 운동이 그렇듯 메갈리아 내에도 통제되지 않은 목소리가 있었고 일부의 경우는 과도한 폭력성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폭력성은 여전히 언어적인 것일 뿐이다. 100년 전 서프러제트들이 행했던 폭력에는 이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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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틀림없이 물리적인 게 아니라면 언어적 폭력 내지 혐오 표현은 문제가 없다는 소리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이 역시 불쾌하고 바람직하지 않다. 약자가 사용하는 것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만 표면의 폭력성만 주목하지 말고 그 맥락을 봐야 한다.

한국의 경우 알다시피 여성들이 참정권 투쟁을 할 일은 없었다. 건국 이후로 남성들과 동등하게 투표를 할 수 있었으니 2015년에야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하면 훨씬 상황이 좋다고 하겠다. 그러나 2015년 한국의 성 평등지수는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145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115위에 불과하다. 인사혁신처의 2014년 자료에 따르더라도 여성 고위직 공무원 비율은 5%에도 못 미친다. 사적 영역에서는 여성 임원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제20대 국회의원의 경우 여성은 전체 당선자의 17%다. 인구의 반이 여자인데도 그렇다.

숫자만 봐서는 무슨 얘긴지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지상파 올림픽 중계를 보라. 수년을 준비해 진지하게 승부를 겨루는 여성 선수를 두고 피부가 야들야들하다느니 미인대회에 출전한 것 같다느니 한다. 차별적·혐오적 발언들은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적이며 여성에 대한 크고 작은 폭력은 실생활에, 온라인에 언제나 존재한다.

견디다 못한 일군의 젊은 여성이 모여 남성에 대한 폭력적 언사를 구사하기 시작하자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메갈리아에 대한 거센 비난은 역설적이게도 남성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적 표현이 동원되고야 한국 사회는 여성들의 억눌린 목소리가 매우 충격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닫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폭력성이 가속화된다면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면 일부 표현의 폭력성을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들이 왜 저러는지, 저런 언어를 써 가면서까지 하고 싶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외면하고 억누른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어디 많던가. 이제 겨우 들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