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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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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서른다섯, 한창 젊고 아름다운 한 여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일곱 명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이야기다.
월요일은 엠, 화요일은 튜즈, 수요일은 더블, ..쥬디, ..에프, ..쌈디, 일요일은 썬, 여자는 남자들을 그렇게 부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완전한 1이 될까 두려워 여자는 7분의 1로 마음을 나누어 놓았다.  그 정도 지분이라면 사랑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변질되고 추해진다는 걸, 온전히 바친 사랑의 결과는 상처투성이라는 걸 어린 시절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자는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랑 따윈 없다고 믿는다.
그런 여자 미주에게 어느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서늘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 이불 속이 눅눅한 걸 보니 땀을 흘렸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새벽 5시 40분. 아직 한 시간 반쯤은 더 누워 있어도 될 시간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에프의 체취가 날아들었다. 돌아와 분명 샤워를 했는데 어디에 그의 흔적이 남은 걸까. 지난 밤 차에서 그의 어깨에 한참 머릴 기댔었다. 눈을 감은 채 머리칼 한 움큼을 당겨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머리칼엔 담배연기만 잔뜩 남아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냄새는 어디서 날아온 걸까,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냄새를 맡아보았다. 에프에게서 특별한 향기를 느껴본 적은 없다. 아주 고유한 어떤 향이 있긴 했지만 나는 그걸 막연히 체취라 생각했다. 색으로 말하면 아주 맑고 푸른 물색 같은 향이었다. 공연히 에프의 냄새가 그리워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일곱 명의 남자와 딱 7분의 1만큼씩만 내 마음을 나누겠다, 생각했지만 에프를 상대론 그게 쉽지 않았다. 사랑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와 별개로 나는 이미 에프라는 사람, 그 자체가 훅 마음속으로 들어 와버린 것이다.

엄마의 감정이 그런 거였나, 생각하면 에프에 대한 내 마음 역시 허상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슬펐다. 그리고 불안했다. 오로지 완성된 1의 몫으로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님에도 규정한 7분의 1을 넘나드는 내 마음 때문이었다.

전날 밤 그는 야구모자에 낡은 여름 바바리코트 차림으로 막걸리 집에 나타났다. 매번 조도가 낮고, 인테리어가 허술한,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가게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에프와 만나기 위해 그런 델 찾아다니는 일은 내겐 즐거움이기도 했다.

에프의 음성엔 깊은 공명이 있었다. 누군가 주의해서 살핀다면 에프의 음성임을 금방 알아챌 수도 있었다. 보통 에프와 밖에서 만날 땐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쪽은 나였다.

에프는 다른 날에 비해 유난히 말이 없었다. 가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웃어주긴 했지만 어딘가에 몹시 마음을 쓰고 있는 것처럼 잠깐씩 시선이 허공을 떠돌았다.

“국뽕영화 시사회 티켓 생겼는데 보러 갈래요?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내 차로 가면 되는데....”

“국뽕?”

“아, 요즘 유행하는 말인데... 말하자면 애국심 유발? 뭐 그런 의미예요. 언젠가 히트 쳤던 국제시장 같은 영화를 국뽕영화라고 해요.”

에프는 말없이 웃었다. 에프의 웃음을 보며 나는 금세 마음을 접었다.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사회라 기자들 많을 거구.... 장현수 국회의원, 묘령의 여인과 영화관에서 밀회를 즐기다, 뭐 이런 기사 물어다 줄 수는 없으니까.... 포기할게요.

“내가 아니고 미주를 위해서. ”

“나를 위해서요? ”

“미주를 위해서.”

“그럴 리야 없지만 그렇게 믿어드릴게요.”

“재미없지? 그래서 내가 늘 미안해.”

“아니요, 재밌어요.”

에프가 소리 내 웃었다. 저녁 내내 밝아 보이지 않던 표정이 꽃처럼 활짝 펴졌다.

“제가 오늘은 오피스텔에서 요리해드릴까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에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한참 생각을 하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다음에 그렇게 해. 내가 요즘 좀 지쳐있어....”

스스로 자신이 지쳤다고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지난 4월, 재선에 당선되었을 때 그는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모든 걸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겨우 얼마를 지났다고... 궁금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

나는 그가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5년 전, 내가 다니던 광고디자인 회사에 그가 크고 무거운 박스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이 자료 읽고 분석해서 홍보물 좀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디자인 2팀의 누군가가 그의 말을 기획실장에게 전했다. 실장은 누구에게나 불친절한 여자였다.

무슨 홍보물인지 모르지만 그거 하나 만들려고 이 많은 자료를 읽어줄 직원은 없어요.

나는, 단독으로 맡은 IT 보안업체 홈페이지 제작이 시한을 넘긴 때라, 모든 정신이 일에 팔려있었다. 고갤 들어 누굴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눈은 세 개의 모니터를 번갈아 돌고 있었고 열 손가락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종횡무진 넘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청각은 이상하게도 박스를 든 남자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더 이상 말이 없자 실장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박스에 든 게 정확히 뭐죠? 일단 그게 뭔지는 알아야 어떻게든 해보죠.

나도 그게 궁금했다. 그런데 바로 나올 줄 알았던 답이 무슨 일인지 묵묵히 시간을 끌었다. 왜 답이 없지? 온통 일에 정신을 쏟으면서도 나는 대단한 뭔가가 귀로 흘러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외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였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참고 답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난 주르륵 세워놓은 모니터 세 개에 얼른 포즈 키를 입력하고 번쩍 고갤 들었다.

제, 꿈이요.

순간, 그의 말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뭐에 홀린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미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튕겨져 다가갔다. 그리곤 두 손을 내밀어 무거운 그의 꿈을 받아 들었다.

“일은 무슨….”

그는 마지막 남은 술을 비웠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나를 쳐다보다간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게 할 수 있는 말과 아닌 것은 전적으로 그가 판단했다. 나는 행간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가 하지 않는 말은 내가 알 필요가 없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상황도 순조롭게 잘 헤쳐 갈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그가 뭇 남자였다면, 상상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규칙을 깨고 그의 여자가 되었을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숨은 여자로 살아가더라도, 그렇게라도 그를 가졌다는 것에 행복했을까.

에프의 오피스텔에 묵고 있던 비서관이 결혼을 했다. 에프가 그의 결혼을 전하며 나를 빤히 보았다. 아뇨, 난 아니 예요. 에프는 왜인지 더 묻지 않았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결혼해야하는 이유보다 열배쯤은 더 많았다.

비서관의 결혼으로 비게 된 오피스텔은 나와 에프의 몫이었다. 물론 석 달 후 계약 만료일이 되면 에프의 부인이 다시 세를 놓을 것이었다.

처음 그곳에서 저녁을 먹던 날이었을 것이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둘 만 있다는 생각에 한편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한 편 두렵기도 했다.

혹시, 내가 부담될 땐 미리 말해주셔야 해요. 부담? 그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캔들 같은 걸로 걸림돌 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세차게 머릴 저었다. 그리고 지겨워질 수도 있죠.... 지겨워질 거란 말은 진심은 아니었는데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가 싶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미주야, 너는…. 그는 항상 너는…, 이라 말한 뒤 잠시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말야..., 내 고향이거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어릴 적 엄마 품 같은 고향.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야.

오피스텔에서 술을 마시는 날은 어김없이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말했었다. 너는 내 고향이야.... 고향이 사라지면 사람은 모든 재산을 다 잃는 거야. 자신을 잃고 세상을 잃는 거지. 몸속에, 마음속에 깊이 박힌 핏줄 같은 거야, 고향이란.

에프가 그 말을 할 땐 늘 한껏 취해있을 때였다. 복층 오피스텔의 2층에 잠자리를 봐 놓고 나는 비틀거리는 에프를 부축해 천천히 낮은 계단을 올랐다. 다음날 일어나면 그의 기억 속에 없을 시간들일 테지만 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오로지 에프를 나 혼자 차지하는 시간.

에프 옆에 나도 누웠다. 나는 에프가 곤히 잠들 때 까지 옆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점점 잦아드는 숨소리를 듣는 시간이 좋았다. 잠이 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책을 읽었다. 겨우 석 달의 유효기간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슨 말이든지 해봐.... 우리, 이야기하면서 같이 자자.

그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의 취한 손이 내 가슴께를 토닥거렸다. 토닥이는 그의 손이 내 두근거림을 잠재우고 있었다.

만일에요, 정말 만일....

눈을 감은 채 그가 답했다.

만일...?

내가 먼저 마음이 변하면요...

내 가슴께를 토닥거리던 손이 멈칫하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멈추고 있던 그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그러곤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마에서 눈으로, 코에서 볼로, 귀로, 입술로, 턱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손가락이 흘러내렸다.

.... 손에 꽃잎을 쥐어드릴게요.

꽃잎.

목쯤에서 그의 손이 멈추었다.

아프리카엔가 그런 부족이 있대요. 마음이 변하면 나뭇잎을 손에 쥐어주는....

내겐.... 꽃잎을 주겠다고?

한참 말없이 있던 에프가 목이 잠겼는지 잔기침을 했다.

그 꽃잎으로 눈물 닦으라구?

다시 그의 손이 내려와 내 가슴께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 하지마....

....

니가... 그거 내 손에 쥐어주려고 망설이는 거 싫다. 나 아플까봐 니가 먼저 아파하는 거 싫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냥 문자 해. 나 이제 떠나요, 라고. 그것도 힘들겠지만 꽃잎을 쥐어주는 거보단 쉬울 거야. 난 니가 힘든 게 싫다.... 고향을 잃는 것도 싫지만... 그게 더 싫다....

토닥이던 그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멈추었다.

그가 꿈속에라도 자신을 품어줄 고향을 만났음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향.... 대학 1학년 시절 어떤 교수가 정의를 내려준 적이 있다. 고향이란, 고향이라는 말을 발음하는 순간 떠오르는 장소, 바로 거기가 고향이라고. 대부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 했다, 가장 행복했던 어떤 어린 시절.

나는 아무리 고향이라는 말을 반복해도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이 아니라 에프가 내 이마에 대고 고향, 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시간, 그 시간이 내겐 가장 행복하고 가장 고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알람이 울렸다. 새벽 여섯 시. 에프가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올 시간이었다.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없었다. 에프는 10분 후면 여의도 한강변을 걸을 것이었다.

곧장 뛰면 안 돼, 10분 정도 빠르게 걸어주다 뛰기 시작하는 거지. 그는 항상 어떤 행동하나하나에도 이유가 있었다. 관절을 혹사시키면 나중에 힘들어 져. 아기처럼 살살 달래며 사용하는 거야.

에프의 아침은 항상 일정하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뛰면 7시 10분. 조찬회의가 없는 날은 집으로 돌아가 샤워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대부분 곧장 국회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바로 조찬모임에 참석하는 날이 많았다.

오늘은 토요일.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날이다. 거의 4년 동안 지속된 일이다. 그리고 이제 5년 차. 사람들은 에프가 재선에 실패할 거라 예상했었다. 공천이 잘못됐다는 당 내부의 소란이 여론을 악화시키기도 했지만 에프는 그런 잡음을 단숨에 잠재우며 보란 듯 재선에 크게 성공했다.

네가 없었다면 넘을 수 없는 산이었어. 고맙다. 당선이 확정되자 에프는 제일먼저 내게 연락을 했다. 공적인 자신의 핸드폰으로 내게 전화 하는 일은 초선 당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폰엔 에프의 번호가 저장 돼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의 번호는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돼 있었다.

에프가 조깅을 마칠 시간까지만 더 누워 있어야지,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마무리 해 줘야할 일이 많다. 오전에 일을 끝내고 쌈디와 점심을 먹어야한다. 새벽부터 한강변을 뛰고 있을 에프를 떠올리면 더 이상 내 게으름을 용납해서는 안 되었다. 나는 이불을 당겨 머리를 덮었다. 에프의 체취가 이불 속에 갇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향긋함에 빠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잔걸까. 8시에 맞춰놓은 티비 알람이 켜지면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현직 국회의원이 한강에서 실족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방금 들어온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눈을 떴다. 아니 귀가 먼저 떠졌다. 실족사한 장현수 국회의원은 올해 43세 나이로 지난 4월 재선에 당선된 현직의원으로.... 머리카락에 와락 불이 붙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잠을 먼저 깨야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에프가 말했다. 그래야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방금 들어온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직도 꿈속이었다. 빨리 꿈에서 깨어나야 해. 나는 꿈을 박차고 일어나 미친 듯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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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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