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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구역 24만 곳 흡연구역 34곳…회색지대로 몰리는 담배연기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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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여기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 흡연구역으로 가세요.”

비흡연자 “흡연구역서만 피워라”
흡연자 “금연구역서만 안 피우면 돼”
금연구역 늘어도 흡연구역 제자리
골목길, 건물 뒤편, 주차장 내몰려
서울시민 91%“간접흡연 고통 경험”

직장인 김덕훈(47)씨는 지난 8일 점심식사를 마치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0m 떨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다 음식점 종업원과 20여 분간 실랑이를 벌였다. 인근 음식점에서 뛰어나온 종업원이 다짜고짜 “냄새 나니까 당장 다른 데로 가서 담배를 피워 달라”고 소리 지른 게 발단이었다. 종업원의 날 선 불만에 김씨는 “금연구역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느냐”며 맞섰다.

김씨가 실랑이를 벌인 이곳은 평소 직장인 애연가들이 몰리는 ‘흡연 포인트’로 통한다. 광화문광장 주변이 대부분 금연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문제는 이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면 곧바로 근처 식당으로 담배 냄새가 흘러간다는 점이다. 골목길 폭이 채 5m도 되지 않아 근처를 지나는 시민들이 간접흡연을 호소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지난 6일 서울 은평구의 한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던 50대 남성이 ‘담배를 꺼 달라’고 요구한 여성 A씨의 뺨을 때린 사건 이후로 ‘길거리 흡연’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당시 이 남성은 금연구역인 지하철역 출입구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A씨는 7개월 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던 중 사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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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흡연 문제의 핵심은 혐연권(嫌煙權)과 흡연권의 충돌이다. 최근엔 정부의 금연정책이 확대되면서 혐연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급기야 금연구역도 아니고 흡연구역도 아닌 ‘회색구역’에서의 흡연 문제까지 도마에 올랐다. 실제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시민 2853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1%가 간접흡연으로 고통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고, 피해를 본 곳은 길거리(63.4%)와 건물 입구(17.3%) 등 회색구역이 대부분이었다.

지난 7월 기준 서울시가 지정한 금연구역은 총 24만7000여 곳이다. 특히 실외 금연구역의 경우 2011년 670여 곳이었지만 5년 만에 1만7000여 곳으로 늘었다. 반면 서울시가 지정한 흡연구역은 34곳에 불과하다. 금연구역만 늘고 흡연구역은 턱없이 부족해 흡연자들이 회색구역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제는 회색구역에 대한 흡연자와 비흡연자 간 인식 차이다. 흡연자들은 ‘금연구역이 아니니까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입장이지만 비흡연자들은 ‘흡연구역이 아닌 모든 곳은 금연구역’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회색구역 흡연 문제에 대해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법적으론 어디에서든 흡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금연구역으로 여기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흡연자들은 간접흡연 피해를 고려해 배려심을 키워야 하고, 비흡연자들은 담배 피우는 사람을 범죄자처럼 여기고 낙인찍는 시각을 버려야 한다. 회색구역에서의 흡연 문제는 상호 간의 배려와 관용 없이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진우·김나한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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