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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귀국선 우키시마호 참사 단서 나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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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일본 교토(京都) 마이즈루(舞鶴) 만에서 4703t 짜리 일본 해군 수송선인 우키시마(浮島)호가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일본 아오모리(靑森)와 홋카이도(北海道)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등 수 천명을 태운 제1호 귀국선 우키시마호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사라졌다. 광복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조선인들의 부푼 꿈은 산산조각났다.

5000명 희생된 사고 당시 배에 폭발물 실었다는 기록 공개

그 해 9월1일 일본은 미군이 바다에 매설한 기뢰에 의해 침몰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 3725명, 일본해군 승무원 255명이 탑승했고 조선인 524명, 일본해군 25명 등 549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실종자와 생존자 수는 미상이었다.

반면 이 사건에 대해 그동안 한국 학계와 유족들은 승선인원은 약 8000명이고 사망자와 실종자가 약 5000명, 생존자가 약 3000명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미군 기뢰가 원인이 아니라 일본의 고의 폭파설을 주장해왔다.
이런 가운데 침몰 71주년을 앞두고 우키시마호에 폭발물이 실려있었다는 일본 정부의 기록물이 처음 공개됐다.

일본 방위청에서 입수한 일본 해군운송본부의 문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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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8월 22일 19시20분 일본 해군 운수본부장이 우키시마호 선장에게 내린 ’항행금지 및 폭발물처리’문서(사진)다. 문서 내용은 “1945년 8월 24일 18시 이후 ▶지금 출항중인 경우 이외는 항행 금지하라 ▶각 폭발물의 처리는 항행 중인 경우 무해한 해상에 투기하라, 항행하지 않은 경우 육지 안전한 곳에 넣어두라(격납)”고 돼 있다. 하지만 우키시마호는 폭발물을 처리하지 않고 같은 날 오후 10시 아오모리 현 오미나토(大湊) 항을 출항했고, 24일 교토 마이즈루 만에서 폭발·침몰했다.

‘발신전보철(發信電報綴)’이란 일본 방위청의 이 문서는 김문길(71) 우키시마호 폭침 한국인희생자추모협회 고문이 올 봄 일본인에게서 넘겨받아 8일 부산에서 열린 진상규명 세미나에서 공개했다. 김 고문은 “그동안 우키시마호에 폭발물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었는데, 이 문서는 폭발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지금까지 유족들이 한결같이 부르짖는 폭침설의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사실 이 문서는 우키시마호 유족 등이 92년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진행된 재판과정에서 증거자료로도 사용됐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도 이 문서는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배상소송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원고패소 판결로 결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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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을 군함으로 개조해 사용된 우키시마호와 같은 배의 모습.

김 고문은 “우키시마호 항해 중에 일본 해군 승무원들이 폭발물(박격포, 기타 포탄)을 해상에 버리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없고, 폭발 전에 배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있다는 증언 등으로 미뤄 일본이 의도적으로 배를 폭파시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영주(69)추모협회 상임이사도 “일본 해군의 10%만 사망한 점 등으로 볼 때 고의허 폭발시켰다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은 물론 한국 정부의 진상조사와 추모제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희생자추모협회가 2012년부터 매년 8월 24일 부산에서 희생자(8000명)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부산=황선윤 기자 suyohwa@joongang.co.kr
[사진 및 자료 제공 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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