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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드] 이화여대 시위, 무엇을 남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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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이화여대 졸업생과 재학생들 1만 여명(현장 추산)이 본관 앞에 모여 최경희 총장 사퇴를 촉구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9일로 13일 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일 오후에는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대규모 시위(이대총시위)가 예정돼 있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요구로 대학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난 전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독단적 학교 운영에 제동, ‘학벌 갑질’ 비판은 한계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이 싸움, 학생들은 왜 시작한 걸까요. 또 시위의 정당성을 떠나 “새로운 시위 문화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대 학생 시위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겠습니다.

‘학위 장사’ 논란 부른 미래라이프대 사업이 발단

이화여대 농성 사태의 출발점은 현 정부에서 추진 중인 평생교육 단과대학(평단) 사업입니다. 평단 사업은 4년제 대학에 고졸 취업자 등 성인을 대상으로 한 단과 대학을 따로 만들어서 평생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습니다. 정부는 올해 10개 대학을 선정해 30여 억원의 예산을 지원해주고, 점차 이 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었죠.

이대는 지난 7월 15일 이 사업의 대상자로 추가 선정됐고, 나머지 9개 대학은 대구대, 명지대, 부경대, 서울과기대, 인하대, 제주대, 동국대, 창원대, 한밭대입니다. 이대는 ‘미래라이프 대학(미라대)’이라는 이름으로 뉴미디어산업 전공(미디어콘텐츠 기획ㆍ제작), 웰니스산업 전공(건강ㆍ영양ㆍ패션) 등을 개설하려고 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뷰티, 웰니스같은 산업을 학문으로 인정하고, 직장인의 특수성을 감안해 온라인 강의 등으로 수강을 대체하더라도 4년제 학사 학위를 주는 건 학벌주의를 부추길 뿐”이라는 게 핵심적인 반대 이유였습니다. 또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입학 전형과 평생교육원 제도가 이미 있는데도 별도의 단과 대학을 만들어 정원 외로 신입생을 모집하는 건 고액의 등록금을 노린 ‘학위 장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 충분한 의견 수렴 없이 졸속으로 사업을 추진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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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측은 “사회 변화에 따른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해 내린 결정이며, 세계 최고의 여자대학으로서 여성 고등교육에 대한 책무 등을 고려했다”고 정당성을 역설했습니다. 특성화고 전형 외에도 미라대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선 “산업수요 연계 고교인 마이스터 고교는 졸업 후 무조건 취업을 해야 하는데, 이 우수 인력들을 위한 입학 전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미라대의 자세한 커리큘럼에 대해선 “사업계획서를 쓰는 중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만 해 오해의 소지를 남겼습니다.


공권력 투입으로 갈등 악화, 총장 사퇴 요구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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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왼쪽)이 지난 3일 학생들이 점거 농성 중인 학교 본관 앞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취소를 발표한 뒤 학생들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중앙포토]

농성이 시작된 7월 28일은 이대 본관에서 ‘미래라이프 대학을 위한 학칙 개정안’을 논의하기 위한 대학평의원회의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미라대 추진 계획을 철회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본관 점거 농성으로 막아섰습니다. 교수와 교직원들을 밖으로 내보내는 조건으로 최경희 총장과의 대화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장소 등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대화는 성사되지 않았고 이틀 후인 30일 오후 2시, 학교 측의 구조 요청을 받은 경찰이 출동합니다.

학생 진압이 아닌 학교 시설물 보호와 감금자 구출이 목적이었다고 했지만 물리적인 마찰은 불가피했습니다. 당시 본관에 있던 학생들은 200여명, 동원된 경찰은 1600명이라 과잉진압 논란도 일었습니다. 단순한 학내 갈등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집중 조명을 받게된 것은 이런 지점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경찰을 부른 게 아니다”는 홍보팀의 주장과 달리 최 총장이 서대문서 정보과장과 직접 통화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이후 교수와 졸업생들까지 본격적으로 가세했습니다. 1일 이화교수협의회, 2일에는 인문대 교수 40여명이 미라대 졸속 추진과 학내 공권력 투입을 문제 삼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졸업생들도 모금을 통해 대학 상업화를 반대한다는 신문 광고를 게재하는 등 반대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지난 3일 오전, 이화여대는 미라대 설립을 전격 철회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앞으로 학교의 주요 정책 결정 시 구성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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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학교 정상화 촉구` 시위에 참가한 이화여대 졸업생이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하지만 농성은 계속 됐습니다. 3일 오후 8시로 예정돼 있던 재학생ㆍ졸업생 합동 시위도 그대로 진행됐습니다. 여기서 최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나옵니다. 공권력 동원으로 인한 학생들의 신체적ㆍ정신적 피해, 학교의 명예 실추 등에 대해 최 총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겁니다. 최 총장이 지난 5일 시위 학생들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경찰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사태를 진화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최 총장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유에는 학교 방문객을 위한 커피숍과 기념품점인 ‘이화 파빌리온’ 신축, 인문학을 위협한다는 지적이 제기된 프라임(산업연계 교육활성화 선도대학) 사업 강행, 성적 장학금 및 중앙도서관 24시간 운영 폐지 등도 포함됩니다. 최 총장의 취임 이후 쌓여온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선 이런 일로 총장이 물러나면 앞으로 어느 누가 총장으로서 소신있게 학교 운영을 할 수 있겠느냐고 우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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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적 학교 운영에 학생들이 제동건 첫 사례, ‘학벌 갑질’ 오명도

특정 대학내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가 오랫동안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건 참 이례적입니다. 이대 시위가 단순한 학내 갈등을 넘어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방증일 겁니다. 이대 시위에는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벌주의 타파,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평생교육 제도 개선의 필요성,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교육 개혁과 대학 구조조정의 정당성, 학내 민주주의 실현 등 다양한 논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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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이화여대 정문에서 본관까지 줄지어 이동하는 졸업생과 재학생들.

이대 시위의 성과라고 평가받는 부분은 학생들이 ‘평화 시위’를 통해서 대학 본부 측의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겁니다. 총학생회가 주도하는 일반적인 학내 시위와 달리, 이대에는 ‘주동자’도 ‘조직’도 없습니다. 학번을 기준으로 한 위계도 없고 서로를 ‘벗’이라 호칭합니다.

학생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이화이언)와 카카오톡 단체 채팅창 등을 통해 수천명의 의견을 수렴하고 투표를 통해 의사 결정을 합니다. 농성장에서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매일 회의를 엽니다. 철저히 민주적이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달팽이 민주주의’, ‘느린 민주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나왔습니다. 동국대 등 다른 대학에서도 평단 사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건 ‘이쏘공(이대생이 쏘아올린 작은공)’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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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대표자도 없이 많은 학생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려다보니 일관되게 명확한 메시지를 내놓지 못하는 측면은 한계로 지적됩니다. 학생들은 경찰의 시위 주동자 찾기,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신상털기 공격에서 자유롭기 위해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꼈다고 했지만 “당당하면 뭐가 두렵냐”는 비판이 따라 다닙니다.

이대라는 학벌 프리미엄을 독점하려고 시위를 시작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여전합니다. 서울대 출신인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평생교육 단과대학, 서울대에서 만들어주길 촉구한다”며 “학교 이름 가지고 갑질하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노력 여하와 관계없이 대학 졸업장을 남발하는 게 학벌주의를 타파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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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시위 학생들이 공개한 본관 내부의 모습. 매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위 방식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

시위의 정당성을 둘러싼 찬반 논란을 떠나 주목할만한 부분은 시위 문화의 변화입니다. 이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과격한 언어를 자제하고 질서정연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난달 30일 경찰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학생들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동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약 30만 클릭을 기록하는 등 화제를 모았습니다. 지난 3일 1만여 명이 학교에 모였을 때도 휴대폰 불빛으로 서로를 밝히며 정문에서 본관까지 줄을 지어 이동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본관 점거 농성 중인 학생들은 돗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조용히 취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졸업생들이 찾아와 후배들에게 진로 상담이나 연애 상담을 해주기도 합니다. 끼니는 학생들이 모금한 돈으로 지급되는 컵밥 등으로 해결하고, 분리수거함을 만들어 청결을 유지합니다. 물론 학교 측은 9월 개강 준비에 차질이 있다며 계속해서 퇴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시위가 장기화되면 학교도, 학생들도 더 많은걸 잃게 될 거란 우려가 나옵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사진 제공 : 이화여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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