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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선영의 노벨상 이야기

알프레드 노벨의 회한(悔恨)을 반복하는 과학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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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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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핵폭탄과 노벨상 -

현대 무기 중 살상력이 큰 것들은 상당수가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을 받은 사람들의 업적에서 그 아이디어가 나왔다. 먼저 북한 정권이 그토록 집착하는 핵폭탄을 보자.

과학사 차원에서 보면 전자, 원자핵, 중성자가 발견되었기에 핵폭탄 개발이 가능했다. 이 발견들은 각각 1906년, 1908년, 1935년에 노벨상 수상으로 연결되었다. 1934년 프랑스의 졸리오-퀴리 부부는 알루미늄판을 알파 입자로 쏘았을 때, 알루미늄 원자가 다른 종류의 방사능 동위원소로 바뀐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의학적 효용성으로 주목받던 방사능 동위원소를 인공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들은 마리 퀴리의 딸과 사위인데 이 업적으로 1년 후에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이 결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는 많은 종류의 원소들에 중성자를 쏘아 새로운 동위원소를 만들 수 있는지 보고자했다. 이 실험에서 그는 많은 원소들로부터 핵반응을 감지했는데, 특히 우라늄으로부터는 방사선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페르미는 이 방사성 물질이 변형된 우라늄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우라늄의 핵이 쪼개져서 다른 원소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페르미는 이 업적으로 193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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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파시스트 무솔리니 치하에 있던 이탈리아는 유대인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썼다. 유대인 아내를 둔 페르미는 위험을 느꼈다. 그는 노벨상을 받으러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고, 뉴욕으로 향했다. 미국에 정착한 그는1939년에 일단의 과학자들과 함께 나치 독일의 핵폭탄 개발 위험성을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결국 이는 ‘맨하탄 프로젝트’로 이어졌고, 페르미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49년 소련도 원자탄 테스트에 성공하자, 더 위협적인 폭탄을 만드는 경쟁이 촉발되는 것을 우려한 그는 수소폭탄의 개발에 대해서는 도덕적·기술적 이유로 반대했다. 페르미는 핵분열을 에너지 소스로 사용하는데 대해서도 안전 문제에 대해 많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시대 혹은 핵폭탄의 설계자(architect)로 불리는 페르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론과 실험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보기 드문 물리학자이자 탁월한 선생으로서 존경받던 그는 53세의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했다.

핵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데이터를 제공한 사람은 독일 화학자인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프리츠 스트라스만이다. 이들은 중성자를 우라늄에 충돌시켰을 때 우라늄의 핵이 2개의 다른 원자핵으로 쪼개지는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고, 이 때 엄청난 양의 열이 발생할 것으로 계산했다. 이는 핵폭탄의 핵심 원리이다. 핵분열 반응을 밝힌 공로로 한은 1944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마이트너가 빠진데 대해서는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그녀는 사실상 한과 동등한 수준에서 공동연구를 했었기 때문이다. 50여년이 지나 노벨위원회 문서가 공개되자 선정위원들의 편견과 무지로 마이트너가 탈락된 것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많은 동정을 샀다.

원래 한은 핵분열 이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내어 노벨 화학상에 22번, 물리학상에 16번 추천된 바 있는 과학자였기에 그의 단독 수상이 논란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은 학문적 우수성은 물론 뛰어난 인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롤모델이었고, 전후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시민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이들의 삶은 고달팠다. 오스트리아 유대인 여성으로서 독일에서 연구하던 마이트어는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1938년 코펜하겐을 거쳐 스웨덴으로 망명했고, 한은 히틀러의 反유대 정책에 반대하기에 숨을 죽이면서 살았다. 전쟁 후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의심을 받은 한은 연합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 풀려났다. 이때 한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후 한은 반핵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수차례 추천된 바 있다.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이 만든 다이너마이트로 거부가 되었지만, 이것이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되자 죄책감을 느끼고 노벨상을 제정했다. 그런데 많은 노벨상 업적들이 다이너마이트보다 훨씬 더 살상력이 큰 괴물들을 만들어 내는 데 사용되고 있으니 노벨은 저승에서도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