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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외로움, 근본적 감정·욕구 솔직히 드러내 ‘대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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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호 12면

중앙일보 문학담당 기자로 일했던 시인 기형도(1960∼89)는 1987년 6월 이런 내용의 기사를 썼다. “시집 『홀로서기』는 갈수록 화제를 일으키며 홀로 서 있다.” 월간 베스트셀러 동향을 전하는 기사였다. 이듬해 3월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간 기사도 썼다. “전편·속편 합쳐 100만 부 이상 팔린 서정윤씨의 시집 『홀로서기』를 비롯, 10대용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광란자』 『꼬마철학자』 『크눌프』 『비밀일기』 등의 책들을 학생들의 책가방 속에서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베스트셀러 中高生(중고생)이 만든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요컨대 시집 한 권이 수십만 부씩 팔리는,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진행 중인데 그 배경에는 청소년들의 열광적인 호응이 숨어 있더라는 얘기다. 제5공화국의 4·13 호헌 조치, 6·10 항쟁, 6·29 대통령 직선제 수용, 이듬해 88 올림픽까지 숨 가쁘게 이어지던 정치적 격변 한쪽의 80년대 문단 풍경이다.


김지하·박노해·황지우 등 잇따라 나와80년대는 대개 시의 시대로 꼽힌다. 저항시의 상징 격인 김지하의 82년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와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의 출현, 황지우·이성복·최승자 등 한국 현대시를 미학적으로 살찌운 빛나는 성좌와 같은 시인들이 잇따라 나왔다. 백화제방을 방불케 하는 문학적 감수성의 백병전 상황에서 ‘홀로서기’라는 보통명사급 대문자로 대표되는 베스트셀러 시인들은 유감없이 자기 영토를 다졌다.


이름이 좀 알려졌다 하면 수십만 부 단위로 팔리는 서정시의 이상 과열 현상이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정하의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이상 94년)가 나란히 출간된 9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다. 목사 시인 용혜원,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의 가사를 쓰는 등 지금은 인기 작사가로 활동하는 원태연, 명상적인 분위기의 류시화, 넓게는 재선 국회의원 도종환, 시인 안도현까지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화력이 막강했던 이는 역시 서정윤이다. 기형도의 기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홀로서기』는 시집으로는 전무후무하게 87·88년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출판사 고려원 편집장으로 일하다 청하출판사를 차려 독립한 지 6, 7년 만에 『홀로서기』로 대박을 터뜨린 시인 장석주는 당시 시집의 인기를 이렇게 전한다.


“이화여대 앞의 작은 서점인 이화서점, 다락방 두 군데에서만 6개월 동안 5000부가 팔렸다. 경남 마산 지역에서는 해적판까지 출현해 직원을 동원해 잡으러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을 정도다.”


장석주는 “정확한 통계를 잡을 수는 없지만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보낸 여대생 편지의 3분의 1에서 ‘홀로서기’ 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당대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던 라디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신청곡 엽서의 80∼90%에 ‘홀로서기’ 시 구절이 적혀 있다 보니 DJ가 이를 읽지 않을 수 없고, 자연스럽게 시집 판매가 늘어 베스트셀러가 되자 신문들이 이를 기사로 쓰곤 했다는 얘기다.


최근 10여 년 만에 신작 시집 『다시 사랑이 온다』(문이당)를 출간해 재기에 나선 시인 이정하(54)도 비슷한 열기를 전했다. 그의 94년 시집 『너는 눈부시지만…』은 지금까지 150만 부가량 팔렸다. 이정하는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한 달에 7만, 8만 부씩 팔렸다. 시집 안쪽에 붙이는 인지의 저자 도장을 일일이 찍고 있을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고용해야 했다”고 말했다. 읽지 않더라도, 문학성이 있든 없든, 시집 한 권쯤 옆구리에 끼고 다녀야 했던 시절이다.


이들 베스트셀러 시집은 요즘 감각으로 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유치한 대목이 적지 않다.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원태연의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용혜원의 『그대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등 제목만 들어도 달달한 사랑시에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뭘까.


서정시의 가장 기본적 정의에 충실장석주는 “‘홀로서기’의 경우 그 안에 인간의 본질적 정서인 실존적 외로움, 순수에 대한 갈증, 만남과 헤어짐, 사랑의 상실에 대한 애도 감정 등이 들어 있다. 민주화 열망, 정치적 뜨거움 등 당대의 공적 영역에서 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기만의 내면을 찾으려는 독자들의 욕구를 채워줘 인기를 얻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김지하 등의 민중시가 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전면적으로 끌어올린 일종의 선제적인 마중물 역할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문학평론가 최현식(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80~90년대 사랑 시집들은 ‘집단 복제’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분위기가 엇비슷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보편적인 인류 공통의 감정을 다뤄야 한다는, 서정시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에 충실한 작품들로 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새로울 건 없지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인간 감정·욕구를 솔직하게 반영했다는 얘기다.


20~30년 전 감성은 요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이정하는 “행복이든 희망이든 사랑이든 우리가 떠나보낸 것들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새 시집에 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젊은 독자들에게 미리 공개한 결과 가장 반응이 좋았다며 ‘이 모든 것을 합치면’을 추천했다.


3년 전 여중생 제자 성추행 사건으로 교사직을 그만둔 서정윤은 현재 대구에서 상당한 규모로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시는 여전히 쓰고 있다고 한다.


목사 시인 용혜원은 몇 해 전 감리교 목회 활동을 그만둔 후 기업체·지자체 강연 등을 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인기 강사로 손꼽힌다고 한다. 류시화는 『티베트 사자의 서』『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인생 수업』 등 불교·명상 관련 서적을 활발하게 번역하는 등 꾸준히 출판 관련 일을 해왔다. 경희대 체육학과 출신인 원태연은 인기 작사가로 자리 잡았다.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백지영의 ‘그 남자’ 노랫말을 썼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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