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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채인택의 직격 인터뷰

“꿈꿨던 의사상 살아 있기에 주저 없이 한센병원을 택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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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전남 순천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17번 국도를 달리다 여수공항 뒤로 가면 여수애양병원이 나타난다. 남도의 외진 곳에 위치했지만 정형외과와 피부과로 전국적으로 이름 있는 병원이다. 이 병원의 김인권(65) 명예원장이 최근 제4회 성천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JW중외그룹의 창업자인 고 성천 이기석 사장의 생명 존중 정신을 기려 음지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의료복지 증진에 기여하고 사회적 귀감이 된 의료인을 발굴해 주는 상이다. 김 명예원장은 이 병원에서 한센병 환자의 사지교정 수술과 소아마비 환자의 재건·재활 치료에 헌신하고 인공관절 수술을 도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정형외과 전문의인 그는 1980~83년 소록도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한 뒤 83년 이 병원에 부임해 평생 환자를 돌봤다. 한센병 환자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었던 청년 의사는 이제 백발의 신사가 돼 취재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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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소아마비 환자와 장애인을 치료해 온 여수애양병원 김인권 원장이 병원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병원이 선교사들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헌신, 의학 지식을 제3세계에 전수할 꿈을 꾸고 있다. [광주=프리랜서 오종찬]

성천상 수상자로 뽑힌 것을 축하드립니다.
“사실 제가 한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가 직장이고 이게 직업입니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이고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보다 앞서 이곳에서 일하셨던 의사·선교사들이 닦아놓은 터가 좋은 것이지 저 자신이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냥 일상적인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서 근무했던 선교사 분들이 어떤 터를 닦아놓았습니까.
“이 병원은 바탕이 건전합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의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개선하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세웠기 때문이죠. 1909년 미국 남장로교에서 조선에 파송한 의사 선교사 윌리 포사이스 박사가 길에 쓰러진 환자를 처음 치료했습니다. 이를 기려 다른 의사 선교사인 R M 윌슨 박사가 같은 해 한센병 환자 전문 치료 병원으로 세운 광주나병원이 기원입니다. 1926년 현재 위치로 옮겼고 67년 의사 선교사인 스탠리 토플 박사가 소아마비 후유증 환자를 비롯한 장애인의 재활과 수술을 위한 진료기관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때는 건강보험도 없었으니까 치료받기 어려운 사람을 저렴한 가격으로 최선의 치료를 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그런 방침을 그대로 이어받고, 그런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인공관절 치료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34년간 한길을 걸으신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것도 이게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죠. 사실 여기서 일하다 보면 요새 말하는 의사와 환자 간의 불신이나 뭐 이런 것은 비교적 적습니다. 우리가 청년 시절에 생각했던 의사상, 학교에서 배웠던 의사상, 마음속으로 꿈꿨던 의사상이 그래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의사로서 최소한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 계속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의사 시절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계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의대에 다니면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본 적도, 대한 적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치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죠. 그런데 당시 전공의 4년 중 6개월을 무의촌에서 진료해야 자격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연히 소록도를 가게 됐습니다. 77년 10월이었는데 그때 처음 한센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든지 인간적으로 대하려고 했더니 얼굴이 아니라 사람이 보입디다. 그래서 많이 친해졌고 병이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소록도에서 여러 의사를 만났는데 그분들은 내가 생각했던 의사와 많이 달랐어요. 조금 더 인간미가 넘치고 조금 더 환자들을 생각하는 분들이었습니다. 환자를 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소통하는 그런 의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분들과 마음이 통하면서 이곳으로 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소록도에서 특별히 할 일이 많았나요.
“한센병에 걸리면 나중에 손가락이 구부러져 제대로 쓰기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 손가락 구부러진 것을 펴주는 수술이 개발돼 시행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다미안 재단에서 보낸 의료진이 이를 처음 시술했습니다. 하와이에서 한센병 환자를 돕다가 자신도 그 병에 걸려 돌아가신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를 기리는 단체죠. 그 재단에서 63년 소록도에 보낸 의사와 간호사 3명이 수술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귀국하면서 10여 년간 수술의 맥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함께 일했던 물리치료사와 간호사들을 모아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소록도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고 신정식 당시 원장께서 ‘이왕 시작하려면 인도에 가서 조금 더 배워라’면서 81년 공중보건의로 군인 신분이던 저를 인도로 보내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선배의 도움으로 한센병 지식을 얻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이렇게 노력했으니 떠나면 정말로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다른 병원에 가더라도 한센병 환자 사지재건수술을 할 수 있는 끈을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민간 한센병 진료기관인 여수애양병원으로 가게 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당시 저는 신정식 원장님과 마음이 완전히 맞았어요. 당시 한국은 의료가 굉장히 취약했습니다. 병원도 별로 없었고요. 근데 제가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80년 소록도에 가니 사방에서 부르더군요. 그러면서 여수애양병원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한센병 환자와 일반 환자를 함께 보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실 한센병 환자는 치료가 아주 단조로운데 저는 한센병 환자도 보면서 정형외과 의사로서 다양한 진료도 하고 싶었어요. 여수애양병원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당시 대학병원이나 대형 일반병원의 선배들이 오라고 했는데 저는 이곳을 선택했습니다. 도저히 한센병 환자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여수애양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사지재건수술을 하다가 소아마비 환자와 장애인 치료로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센병 환자가 서서히 줄고 있기 때문이죠. 소록도에는 제가 83년 근무할 때 한센병 환자가 3500명 있었는데 지금 530명인가 계십니다. 새로운 환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것이 배경입니다. 전남 동부의 한센병 환자는 저희 병원이 담당하는데 이전 환자 600명만 유지될 뿐 새로운 환자가 발생한 지 벌써 5~6년이나 됩니다. 그래서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애양원이 원래 소아마비 환자를 많이 보는 걸로 유명했다고 하던데요.
“스탠리 토플이란 정형외과 의사가 여수애양병원에 59년 부임해 81년까지 근무하고 65년에서 78년까지 원장도 지냈습니다. 그분의 의술과 노력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소아마비 환자가 많이 내원했습니다. 그분은 치료는 물론 의족 제작과 보급, 그리고 환자 재활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저도 전공의 시절 소아마비로 유명했던 이덕영 교수님으로부터 소아마비에 대해 잘 배웠어요. 그래서 이 교수님과 토플 원장으로부터 배운 것을 종합해 나름의 노하우를 익혔습니다. 환자들도 아주 좋아했고요. 소아마비 환자를 보면서 한센병 환자를 볼 때만큼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인공관절수술 분야를 새롭게 개척했습니다.
“사실 우리 병원 인공관절수술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오래됐습니다. 73년부터 했으니 거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전공의를 하던 75~80년 이를 처음 접했습니다. 문제는 비용이었습니다. 서울대에서 수술비가 500만원이 들었습니다. 집 한 채 값이죠. 당시 어떤 유지의 가족분이 양쪽 무릎 수술을 하고 1000만원을 내고 갔습니다. 당시 이를 부담할 수 있는 환자는 극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78년 이 병원에 와서 보니 수술비로 50만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선 수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치료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싼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이렇게 쌀 수 있는지를 알아봤더니 당시 여기 선교사들이 홍콩에서 재료를 ‘직구(직접 구매)’하더군요. 인공관절은 물론 수술 도구도 모두 직접 구매하면서 비용을 아꼈습니다. 당시 이곳에 살던 의사 선교사들이 검소하게 생활한 것도 작용을 했을 겁니다.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좋은 인공관절 수술 기구를 쓰고 싶어 미국에 있는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면 도구는 물론 사용법을 가르칠 수 있는 의사까지 보내 기술을 전수해 줬습니다. 85년에는 닥터 윌링엄이라는 사람이 미국 애틀랜타에서 이곳까지 와서 인공관절수술 현장을 보여 주면서 주변에 상당한 화제가 됐습니다. 그 덕분에 싼값에 좋은 기구를 사용해 뛰어난 기술로 수술한다고 소문이 나 환자가 늘기 시작했어요. 치료받은 환자들이 주변에 말을 잘해 주니까 소문이 확 났습니다. 결국 수많은 의사의 헌신과 인도주의적인 도움이 합쳐져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이 전국에서 인공 슬관절과 고관절 수술을 제일 많이 하는 병원이 된 지 10년 이상 됩니다. 병원 뒤에 저희 역사관을 만들어 놨는데 여기에는 수술에 사용했던 도구와 인공관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학의 역사가 아니라 봉사와 헌신의 역사죠.”
의학기술상으로도 세계적 수준이라는 게 의료계의 평입니다.
“사실 그런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많은 수술 실적을 쌓았습니다. 외과의사로서 실력은 수술을 많이 한 사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수술하면서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하는 것이죠. 중요한 건 이제는 실적이나 자랑할 때가 지났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이 노하우를 의학교육이 필요한 다른 나라에 전수해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케냐, 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 등에 이 노하우를 전수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수술을 하기도 하고 그곳 의료진을 한국에 데려와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합니다. 수술도구와 재료를 공급하기도 하고요. 과거 우리가 파견 선교사나 이들을 지원한 미국 내 단체들에서 받았던 것을 필요한 다른 곳에 돌려주는 작업입니다. 이제는 그런 작업에 무게를 실어야 할 때입니다. 물질적으로 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받았던 핵심이 바로 사랑이었으니까요.”
지난 3월 은퇴를 하셨는데 은퇴 후 계획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체적인 결정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정형외과 의사인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제3세계의 지역과 병원을 아주 많이 봤습니다. 그중 한 곳에서 환자를 돌보고 의사를 가르치거나, 그런 일을 조직적으로 하는 단체를 운영하는 방법도 있겠지요.”
그런데 은퇴 뒤에도 명예원장으로 병원에 남아 환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의사를 뽑을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일단 환자를 보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병원 직원이 말을 거들었다. “원장님을 찾는 환자가 하도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는 환자는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게 저희 병원의 원칙이기도 하고요.”)
상금이 1억원인데 어디에 사용할 계획입니까.
“사실 제가 쓰고 싶은 데가 많이 있지만요, 사용처는 집사람하고 반드시 상의를 해야 돼요. 보람 있는 곳 중에서 돈이 필요한 곳에 쓰고 싶습니다. 꼭 돕고 싶은 가난한 학술단체가 하나 있고요. 우리 의과대학에도 좀 내고 싶어요. 우리 은사님 중 어려우신 분께도 드리고 싶어요. 나머지는 집사람에게 넘겨야겠죠. 평생 나를 그렇게 도왔으니까요.”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