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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인생은 입, 제2 인생은 손으로 먹고 살겠다’ 다짐…증권맨에서 도금업체 연구소장 변신한 이은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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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살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지만 학업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5년 간의 공무원 생활 동안 모은 돈으로 뒤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1990년 증권사에 입사한 그는 화려하게 비상했다. 영업의 달인으로 불릴 만큼 실력을 인정 받았고, 곳곳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다. 한때는 연봉이 3억~4억원에 이르기도 했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칼날도 피해갔다. 여러 증권사에서 부서장·지점장, 영업 총괄팀장을 두루 거쳤다.
  이은한(57)씨의 삶에 첫 휴식기가 찾아온 건 2007년이었다. 다니던 회사가 합병되면서 자리를 비워줘야 할 상황이었다. 그는 과감히 옷을 벗었다. 그리곤 쉴 틈도 없이 통영의 한 조선소 협력업체 CEO를 맡게 됐다. 친형이 소유한 회사였는데 형의 투병으로 회사가 경영난에 시달리던 시점이었다. 전문 분야는 아니었지만 20명이었던 직원이 80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회사는 빠르게 회복됐다. 하지만 2012년 그리스발 조선 위기가 불거지면서 다시 회사가 어려워졌고, 이씨는 업계 전문가인 후배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공백기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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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할 일이야 없겠느냐 하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정말로 일이 없었어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친구들을 만나고 취업정보 사이트에 수십통의 이력서를 보냈지만 면접 제의 한 번 없었죠.”
  눈높이를 낮춰 경비직에 지원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표현대로 ‘분리수거의 대상이라도 된 듯 참혹했던 날들’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하철을 타고 끝에서부터 끝까지 다니던 때였습니다. 우연히 직업훈련 모집 광고를 발견했죠.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기술을 배우면 분명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2~3곳에 원서를 내고 면접도 봤지만 면박만 당했죠.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건 교육기관이 아니라 분야라는 사실을. 그래서 고민했죠. 가장 경쟁이 덜 치열한, 젊은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1의 인생을 ‘입’으로 먹고 살았다면 제2의 인생은 ‘손’으로 먹고 살겠다고 다짐한 거죠.”
  그가 정한 답은 대표적인 3D 업종인 표면처리(도금)였다. 폴리텍대학 화성캠퍼스에 지원한 이씨는 예비합격을 거쳐 마침내 학생증을 손에 쥐었다. 기회를 얻은 그는 예전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담배부터 끊고 독하게 공부를 시작했고, 비슷한 연배인 교수들도 그의 열정을 응원했다. 곧 결과가 나타났다. 입학 6개월 만에 전국도금대회에 출전해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여름방학 때는 신림동 고시촌에 터를 잡고 표면처리산업기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7명밖에 안 되는 최종합격자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13년 11월 마침내 경남 창원 한 금속회사에 취업했다. 이 모든 게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2년 간 열심히 일했지만 2015년 9월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 겨우 회복한 이씨는 또 한 번 구직에 나섰다. 이번엔 폴리텍대학 재학시절 지도 교수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올 3월부터 경기도 안산 기양금속공업에 취업해 연구소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 안산의 도금단지 내에 있는 업체들은 대부분 방위산업 분야 부품을 생산하는데 소량 다품종이라 자동화가 어렵습니다. 기술 수준을 높이면서 회사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보라는 게 경영자의 주문입니다. 최대한 노력해서 나를 고용해 준 회사에 보답할 생각입니다. 현재 석사과정(경상대 재료공정융합공학)을 밟고 있는데 여건이 허락한다면 박사까지 도전할 겁니다. 나이가 많다는 김종인 대표(더불어민주당) 같은 분들도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세대가 아직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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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의 두 자녀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취직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노후를 가만히 앉아서 보내는 건 너무 슬픈 일이라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그의 마지막 조언은 새겨둘 만하다.
  “많은 베이비부머가 창업을 생각하지만 사실 더 깊이 생각하면 그런 선택은 자존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이 먹었으니 남 눈치 안 보고 사장님이 되고 싶은 거죠. 뜻대로 되기만 한다면 좋은데 대부분이 실패합니다. 그러다 노후자금까지 까먹으면 삶 전체가 흔들리는 거죠.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의지만 있으면 가르쳐줄 곳은 많습니다. 머리 쓰는 일, 원래 하던 일만 쳐다보지 말고 생각을 확 바꿔야 합니다. 최저임금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 중장년 퇴직자도 기술만 있으면 꽤 괜찮은 봉급 받으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갭을 메우기엔 충분합니다. 정부도 베이비부머의 재취업을 뿌리기업과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중장년 스스로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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