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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방 셰프도 쓰는 그 장갑… 일회용 장갑의 비밀을 알려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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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김먹방씨가 주로 하는 일은 TV로 음식 관련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 일이다. '냉장고를 부탁해(JTBC)' '3대천왕(SBS)' '수요미식회(TvN)' 등을 보며 눈으로 요리를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 의학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수술용 장갑을 끼고 요리를 하는 셰프들이 늘었다. '자고로 음식은 손 맛이라는 데 장갑이 웬 말이냐?'

보통 장갑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최근 먹방 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장갑은 '니트릴 라텍스(NBL)'라는 특수 소재로 만든 장갑이다. 손에 '짝' 달라 붙을 정도로 얇으면서도 잘 늘어나고 잘 찢어지지도 않는다. 과거의 일회용 장갑과 달리 장갑을 끼고 김치를 주물럭거려도 손에 김치 냄새가 밸 일도 없다. 업계에서 하는 말로 "그냥 내 피부 같다"는 착용감이 일품이다.

위생을 지키며 손 맛까지 챙길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 일회용 장갑이 주목을 받고 있다. 먹방에 등장하는 모든 장갑이 니트릴 소재는 아니다. 천연고무 소재의 장갑도 있다. "육안으로는 구분이 힘든데 직접 착용해보면 니트릴 장갑이 더 질기면서도 손에 밀착되는 느낌이 좋다. 소비자들은 흰색을 '천연고무', 푸른색을 '니트릴'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색은 의미가 없고 제품 뒤의 성분 표시를 봐야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들어서는 니트릴 장갑의 사용 빈도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일회용 장갑이 너무 사소하게 느껴진다면 이런 얘기는 어떨까?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인구 한 명당 1년간 사용하는 1회용 장갑이 100장이 넘는다. 국내는 아직 5장 수준이다. 하지만 사용량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전 세계에서 1년간 사용되는 일회용 장갑은 연 2500억 장에 달한다.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봐도 좋다는 뜻이다.

시장이 열렸는데 기업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미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화학업계의 소재 개발 전쟁이 치열하다. 처음 주도권을 잡은 것은 엄마들의 주방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투명한 비닐(PVC) 장갑이다. 잘 알다시피 잘 찢어지고 손에 냄새도 금방 밴다. 비빔면을 비빌 때는 유용하지만 정교한 요리를 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뒤를 이어 천연 고무(라텍스)로 만든 장갑이 등장했다. 주로 병원이나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요리·미용 등으로 분야를 넓혔다. 근데 이 소재도 '완벽'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무나무 재료에는 '단백질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알레르기 부작용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어서다. PVC 장갑보다는 개선됐지만 여전히 김장을 담그면 손에 김치 냄새도 남았다.

199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소재가 오늘의 주인공 '니트릴 라텍스'다. 기존 천연고무에 화학 성분을 추가해 단점을 보완한 제품이다. 당연히 단백질 알레르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천연고무 장갑보다 20% 이상 질기고, 두께가 얇고 가볍다. 정교함을 요구하는 화학 실험이나 미용 업계에서 사용하는 장갑이니,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장갑 낀 손으로 요리에 '손 맛'을 담는 것도 가능하다.

니트릴 소재의 등장으로 일회용 장갑 시장은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었다. 천연고무(33%)와 NBL(32%), PVC(30%)가 시장을 3등분 하고 있다. 요즘 가장 기세가 좋은 소재는 역시 '니트릴'이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20%씩 성장했고, 앞으로도 10%씩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기준 890억 장인 글로벌 수요가 2020년에는 2000억 장까지 늘어난다고 하니 '니트릴 장갑' 이 시장을 완전 평정할 날이 머지 않았다.

일회용 장갑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묻지 마시라. 니트릴 라텍스 소재를 다룰 수 있는 화학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다. 해외에선 영국 신토머, 일본 제온, 중국 난텍스 정도가, 국내에서는 LG화학과 금호석유화학이 이 소재를 만든다.

LG화학의 니트릴 장갑엔 '미운오리 새끼'가 '백조'로 변한 뒷 얘기가 숨어 있다. LG화학은1995년 오랜 연구 끝에 인쇄용지 접착제로 사용하는 '스티렌 부타디엔 라텍스(SBL)' 소재를 개발했다. 천연 고무를 개량해 멋진 접착제를 만들었는데, IT산업의 발달로 제지 시장이 쪼그라들면서 천덕꾸러기 소재로 전락했다. 연구실 한 구석에 방치됐던 라텍스 개발 기술이 다시 빛을 본 것은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다. 일회용 장갑 시장을 눈 여겨 본 연구원이 SBL 기술을 활용해 국내 최초로 '니트릴 라텍스'를 개발한 것이다.

모든 소재의 개발이 성공으로 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2008년 LG화학이 처음 선보인 '니트릴 장갑'은 솔직히 문제가 많았다. 장갑에서는 화학제품 특유의 냄새가 났고 일부 제품에서는 '핀홀'이라 불리는 작은 구멍이 발견됐다. 위험한 화학 제품을 다루거나 의료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제품이었던 것. 연구를 거듭한 끝에 2010년이 넘어서야 지금 수준의 '니트릴 라텍스'를 생산할 수 있었다. 기존의 단점을 보완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장갑(3g)' 타이틀까지 획득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현재 LG화학은 한해 14만t의 니트릴 장갑을 만들어 내고 있고, 세계 시장 점유율은 15%다.

박성민 기자 sampark2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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