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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필리핀 정국|「마르코스 20년 독재」종말 초읽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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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필리핀의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20년간의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반군과 정부군이 곳곳에서 대치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마르코스」 정권의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독재의 아성은 눈사태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붕괴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스」자신은 25일하오 대통령취임을 강행하겠다고 밝혔으나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서부터 미국에 이르기까지 너나할것없이 등을 돌려 「마르코스」에게는 이제 외로운 독재자의 최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가 가장 믿었던 군부가 「엔릴레」 국방상과 「라모스」 군 참모총장 서리의 주도로 반 「마르코스」의 기치를 높이 들자 때를 기다렸던 1천 여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군부개혁파가 즉각 가담했고 2만8천명의 해군병력가운데 2만명도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국영TV방송을 지키고있던 정부군도 반군이 들이닥치자 사수를 포기한 채 사실상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리는 친구』를 외치며 길을 내주었다.
「마르코스」휘하의 각료와 재외공관, 그리고 여당국회의원들까지도 속속 「양심의 판단에 따른 행동」 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반군에 가담한 친여 세력은 22일 사표를 제출한 「골레스」 우정청장을 비롯, LA총영사 서리 「레오비질·아놀린」 등 영사관직원 10명, 재외공관 20여개, 필리핀국립대학(UP)교직원·학생2천여명, 필리핀항공사장 「로만·크루스」, 그리고 여당소속 국회의원 6명등이며 반 「마르코스」또는 「코라손」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나라는 미국·프랑스·일본·네덜란드 등 10여개국.
미국은 백악관 성명을 통해 「마르코스」 하야를 촉구했고 무력사용에 의한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차관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으며 프랑스정부는 「코라손」 지지를, 네덜란드정부는 「마르코스」 대통령취임식에 사절단을 보내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이메·신」추기경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세력은 반군의 거사가 발표되는 순간부터 범국민적인 참여를 호소하며 그들의 라디오 베리타스 (진리의 방송)를 통해 반군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군의 가장 큰 힘이 되고있는 것은 민중의 봉기였다.
「마르코스」 의 독재정치에 20년간이나 시달려온 필리핀국민들, 특히 마닐라시민들은 라디오 베리타스의 호소가 있자 「성전」에 참여하는 병사들처럼「엔릴레」·「라모스」의 막사로 몰려들었고, 국영방송국 앞에서는 정부군의 지원병력을 실은 탱크대열을 맨손뿐인 군중의 힘으로 막아냈다. 수만 군중의 힘 앞에는 군 참모총장이던 「베르」의 명령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마르코스」의 개로 불리는 「베르」는 반군들과의 대화를 통한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대통령의 명령만 있으면 언제라도 반군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약 그의 말대로 상황이 치닫는다면 필리핀은 전면내전을 통한 대규모 유혈사태를 면치 못할 것이다. 「마르코스」 가 아직까지는 군 총동원령을 내리거나 중화기사용을 억제토록 하고있으나 그가 무력충돌의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위한 하야를 택하거나 간에 그의 종말이 기정 사실화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우방들은 24일과 25일 필리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마르코스」대통령의 하야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마르코스」는 정권내부의 붕괴에 국제적인 고립마저 겹쳐 사면초가의 입장에 놓여있다.
미국은 특히 「마르코스」가 정권유지에 급급하여 무력을 사용하거나 폭력사태가 유발된다면 차후 필리핀에 대한 모든 지원과 군사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까지 선언함으로써 그의 무력사용감행이 정권유지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 「마르코스」 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미국 등 우방의 충고에 따르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다. 「마르코스」 또한 다른 독재국가의 통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약 자신이 공언했던 것처럼 자유공정선거를 통해 개표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미련 없이 정권을 넘겨주었더라면 그 자신이 선거유세에서 밝혔던 것처럼 1964년의 「마르코스」로 되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항일투쟁의 영웅, 필리핀이 낳은 불세출의 법학도, 서민의 애환을 같이하는 훌륭한 상원의원, 필리핀의 국가이익을 앞장서 옹호해온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그러나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학정을 일삼아온 독재자, 부정부패의 원흉, 정부군을 사병화한 카리스마, 정적들의 살인자, 경제파국을 몰고 온 장본인 등등 씻을 수 없는 오명만이 남게되었다.
이 때문에 야당대통령후보 「코라손」 여사가 선거공약을 통해 내세운 유일한 목표는 「마르코스」타도 뿐이었고 유권자들 또한 그것만으로 만족해했다.
『「마르코스」는 「마르코스」일뿐 새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고 지적한 「코라손」 여사의 말처럼 독재자「마르코스」는 그가 약속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채 사라져가고 있다. <홍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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