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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1년간 적은 아이디어만 563쪽…살아남는 건 1%도 안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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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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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과학자 현택환 교수는 자유방임형 교육을 추구한다. “교수는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에게 제 아이디어를 선문답처럼 툭툭 던지죠. 나머지는 학생들 몫입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니나노 공부를 하겠다고요.” 주변에선 웃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 가는 길에 대한 비꼼이요, 우려였다. 그럴 만했다. 나노(Nano·10억 분의 1m)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때였다. 그럼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 “남들이 낸 길을 가면 절대 최고가 될 수 없다. 그 뒤만 보며 따라갈 순 없지 않은가.”

나노공학 권위자, 최고과학기술인상 받은 현택환 교수

그리고 20년 가까이 흘렀다. 그는 나노 분야 세계 정상에 올랐다. 최근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한, 과학자가 주는 과학자상이다. 현택환(52·기초과학연구원 나노입자연구단장)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얘기다. 그는 크기가 균일한 나노입자 대량 합성법을 개발해 주목을 받았다. 연초 톰슨로이터(국제학술정보 서비스)가 선정한 세계 상위 1% 연구자에 들었고, 그가 2004년 발표한 관련 논문은 지난 2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뉴핫페이퍼(New Hot Paper)’로 뽑혔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꼭대기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지난 26일 찾아갔다. 얼굴을 보는 순간 선입견이 깨졌다. 실험실에 틀어박힌, 딱딱한 낯빛이 아니었다. 인터뷰 내내 미소가 가득했다. 책상·컴퓨터 주변에 성경 구절도 여럿 붙여 놓았다. 라틴어 ‘코람 데오(coram Deo),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가 눈에 띄었다.

의외다. 무슨 의미인가.
‘원래 ‘하나님 앞에서’란 뜻이다. 제 삶의 기준이다. 버팀목이다. 좋을 때든, 나쁠 때든 항상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하나님 뜻대로 살진 못하겠지만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친다.”
올 5월 9일에 쓴 ‘시편’ 구절도 있는데.
‘지난 겨울방학 때 심혈을 기울여 논문 두 편을 완성했는데 과학저널 ‘사이언스’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 게재를 거부당했다. 스트레스가 컸다. 마음을 달래려고 옮겨 적었다. 지갑에도 넣고 다닌다.”
정상급 학자도 거절당하나.
“당연하다. 제가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미국화학회저널(JACS)에서도 세계적 대가의 논문을 돌려보낸다. 때론 불평이 나오기도 하지만….”
호암상·청암상 등 상복이 많다.
“제 혼자 힘으로 된 건 없다. 동료학자·학생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요즘 과학계에선 독불장군이 없다. 마담 퀴리나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천재는 더 이상 나올 수 없다.”
왜 그런가. 선뜻 와 닿지 않는다.
“21세기엔 융합작업이 대세다. 요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을 보라. 100% 공동 연구다. 갈수록 더할 것이다. 학문이 넓고 깊어진 까닭이다. 천재의 시대는 20세기에 끝났다고 본다. 대학원생을 뽑을 때도 인간성을 먼저 본다. 서울대 올 정도면 실력은 엇비슷할 테니까. 과학에서도 대인관계가 중요하다. 평소 실실 웃고 다니니 사람들이 저를 경계하지 않아 좋다. (웃음)”
나노 분야도 마찬가지인가.
“물론이다. 각계의 지속적 협업이 필요하다. 최근 의료산업·생명공학에 관심이 크다. 뇌졸중·치매 등을 예방·치료할 수 있는 나노입자를 서울대 신경과·외과 의료진과 함께 연구했다. 상용화까진 갈 길이 멀다.”
나노 수류탄 개발도 화제였다.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것이다. 항암제를 품은 나노입자가 암세포에 닿으면 터지게 했다. 정상세포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암세포는 약산성을 띠고 있는데 나노 수류탄이 여기에만 반응하도록 했다. 아직 실험실 단계다.”
나노는 도우미 기술이라고 했다.
“영어로 ‘인에이블링(enabling) 테크놀로지’다. 다양한 분야에 도움을 주는 기반기술이다. 도우미는 뒤에 숨어 있다. 완제품은 소자(素子)로, 소자는 재료로 이뤄진다. 나노는 재료를 가공하는 기술이다. 의료·정보통신·에너지·반도체 등 활용 범위가 무한하다. 미래 먹거리다.”

현 교수는 애국자를 자처했다. 대구시 달성군 산골에서 태어나 서울대 화학과, 미국 일리노이대 박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혜택을 받았기에 이를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소신이 굳건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과학경시대회에서 은상을 받으며 과학자의 꿈을 키워왔다. 대학 때 접한 기독교 신앙이 그의 학문을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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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택환 교수가 미국 유학 시절 적은 아이디어 노트. 요즘에는 컴퓨터 파일로 업데이트 하고 있다. 가운데는 현 교수 연구실에 붙여놓은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7가지. 아래는 산화철 나노입자 전자현미경 사진.

누구든 쉽게 애국자라 하지 않는다.
“국비 유학을 갔고, 연구비도 넉넉히 받는 편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걸 축복으로 생각한다. 고향이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오지였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제 노력만으로 오늘이 있었을까. 나라에 보답하는 뜻에서 아이도 셋 뒀다. (웃음)”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닌데.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연구실에도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이 많다. 중·고생 때 노트에 ‘최선을 다하라, 나머지는 신이 해준다(Do your best and God will do the rest)’고 써놓았다. 좌우명이다. 그래도 나라가 발전했으니 힘이 된다. 정말 똑똑하고 실력도 뛰어나지만 국가가 가난해 미국 연구실에서 먹고 자는 제3세계 학자도 있다. 저도 미국에 남았다면 이만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상 학자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베토벤 음악을 틀고 논문을 읽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네이처·사이언스 등 과학저널 7개를 매일매일 읽으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또 그 아이디어를 꼼꼼히 기록한다. 저만의 연구일기다. 농담이지만 적자생존,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지난 1년간 적은 아이디어만 563쪽(※그가 직접 컴퓨터를 열어 보여줬다)에 이른다. 인터뷰 직전 2박3일 홍콩 가족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내가 쇼핑하는 동안 논문 초록 40여 편을 읽었다. 그 아이디어를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더 새롭게 개발하도록 한다. 물론 그중 99%는 ‘꽝’으로 끝나겠지만.”
책장에 클래식 음반이 많은데.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협주곡)를 즐겨 듣는다. 베토벤만큼 창의적인 예술가도 없다. 예로 베토벤 콘체르토 4번은 오케스트라로 시작하는 다른 협주곡과 달리 피아노 연주로 문을 연다. 창조란 그런 것이다. 새로움을 찾는 거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과학이나 뿌리는 같다.”
대가들은 통하는 모양이다.
“모든 게 아이디어가 90%다. 문제를 발견하는 게 과학이다. 남들이 안 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건 그다음이다. 나머지 테크닉은 빌려올 수 있다. 저도 기기를 다루는 데는 젬병이다.”
그래서 나노 분야를 선택했나.
“박사 때 전공은 음파화학이다. 초음파로 물질을 분석하는 학문이다. 최우수 졸업논문상을 받았지만 그것으론 지도교수를 넘어설 수 없었다. 1인자가 아니면 ‘루저(패자)’라고 여겼다. 서울대 교수로 온 뒤 나노에 뛰어들었다. 남이 하지 않은 일에서 기쁨을 느낀다. 학생들에게도 늘 강조하는 대목이다. 부디 저를 넘어서라고, 새로운 분야를 찾으라고. 그게 남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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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이 충돌하지 않나.
“화학은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학문이다. 디자인과 같다. 예술과 상통한다. 그럼에도 한계가 뚜렷하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세상의 오묘함을 느낀다. 우리의 지식은 매우 한정됐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건 둘째 치고, 발톱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루하루 열심히 나누며 사는 것밖에 없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길이다. 유일한 취미인 테니스로 체력을 유지하며 일흔 넘어서도 연구실을 지키고 싶다.”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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