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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그래서’를 뛰어넘어 ‘그래도’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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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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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모든 콤플렉스는 어느 날 문득 자기만의 최대 장점으로 변신할 수 있는 눈부신 가능성이 있다. 저 하늘의 별처럼 많은 내 콤플렉스 중에 특히 치명적인 것은 ‘비논리적이다, 감정적이다’라는 남들의 비판에 주눅 드는 나 자신이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논리보다는 감정을 따를 때가 많았다. ‘그래서’의 논리적 세계보다는 ‘그래도’의 감정적 세계가 훨씬 매력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는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길이다. 남들이 좋다니까, 돈을 많이 버니까,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니까 선택하는 일들은 모두 ‘그래서’의 영역에 있다. ‘그래도’의 길은 항상 좁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이 진정 갈망하는 길을 택하고, 논리의 노선보다는 열정의 노선을 택하는 사람들은 ‘그래도’의 세계에 턱없이 무너지는 지극히 감성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그래도’가 자신을 바꾸고, 주변을 바꾸고, 마침내 세상을 바꾸지 않는가. 내 글쓰기의 동력은 바로 그 ‘그래도’의 길을 택하는 이들을 향한 무한한 동경에 있다.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현실이 갑갑할지라도
서로 부둥켜안으며 힘을 내 살아갈 아름다운 섬

김승희 시인은 바로 그 ‘그래도’의 감수성을 한 편의 아름다운 시로 복원해낸다. “가장 낮은 곳에/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에서 김승희 시인은 ‘그래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현실이 아무리 갑갑할지라도, 그럼에도 서로 부둥켜안으며 힘을 내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그 보이지 않는 섬 ‘그래도’를 선택하는 순간, 내 인생은 바뀌었다. 상처받았을 때도, 실패했을 때도, ‘그래도’는 내가 설 수 있는 유일한 땅이었으니. ‘그래서’의 유혹이 ‘그래도’의 강인함을 끝내 이기지 못했으니.

언젠가 60대 이상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100 명 정도 모인 장소에서 문학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으신 할머니·할아버지들은 강의를 들으러 오셨다기보다는 소풍을 나온 느낌을 진하게 풍기셨다. 휴대전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수업 시간에 울리는 휴대전화를 내 앞에서 받는 분들도 있었다. 이 노릇을 어찌하나. 난감한 상황에서 나는 꿋꿋하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가 준비해 간 아름다운 시들을 읽어드리고, 해석도 하고, 반복해서 낭송하며 ‘문학의 힘, 낭독의 힘, 글쓰기의 힘’에 대해 강의를 했다. 다른 시들을 읽을 때는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를 읽을 때만은 그 모든 ‘지역방송’이 꺼졌다. 강의 후기를 읽어보니, 내 강의가 끝난 후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를 반복해서 읽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분들의 이야기가 뒤늦은 감동을 주었다. 소리 내어 아름다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렇듯 모든 소통의 장애물을 허물어버리는 힘이 있다. 마이크를 든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떠드시는 분들 때문에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아름다운 시의 힘으로 그날의 곤경을 벗어났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문학은 아름다운 것이니까.

그래도, 그래+도(島). 소리 내어 천천히 곱씹으면 평범한 접속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섬으로 탈바꿈한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너무도 상투적인 단어, ‘그래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살기 좋은 섬, 가고 싶은 섬, 그래도가 된다. ‘그래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언젠가는 가야 할 바로 그곳이다. 우리말에는 아름다운 섬 이름이 유독 많다. 울릉도, 소록도, 가파도, 이어도, 그리고 그래도. 언젠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그래도 힘을 내고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반드시 다다라야 할 꿈의 섬, 그래도. 아니, 그래도는 단지 머나먼 미래의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그래도 사랑할 힘만은 남겨놓는 사람들만 있다면, 바로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일지니. ‘그래서’를 뛰어넘어 ‘그래도’로 가는 길, 그것이 내게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이다.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