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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한국의 궁궐은 소박하기에 자랑스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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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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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나는 경복궁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들이 하는 같은 말을 5번이나 들었다. 관광객 중 한 명은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의 웅장한 건물들에 비하면 한국의 궁궐은 아주 작고 소박하다”고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왕권 제한은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
영락제·세종 차이가 궁궐 규모 차이
투명성·책임성은 위대한 유교 전통
유교 모델을 세계·중국에 제시해야

한국 친구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약간 부끄럽다고 내게 고백한다. 나는 고성(古城) 한양의 도시계획에 대해 한 번도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조선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황제는 무한 권력을 휘둘렀다. 반면 조선 국왕의 권력에는 명백한 제한이 가해졌다. 우선 경복궁, 그다음 창덕궁에 적용된 설계의 목적은 ‘위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지 궁궐을 바라보는 사람을 압도하거나 왕은 초인(超人)이라는 뜻을 내비치는 게 아니었다. 이름 자체가 접근을 금하는 베이징의 자금성과 달리 한국의 궁궐들은 북촌에 사는 학자 관료의 집보다 많이 크지 않았다. 학자 관료들의 집 또한 평민들이 사는 집보다 훨씬 크지 않았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만 봐도 서구에서 극단적인 정치 권력이 물리적 환경에 어떻게 표출됐는지 알 수 있다. 1900년께의 서울 사진을 보여 주면 학생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타운하우스나 넓은 대로가 늘어선 당시의 파리와 비교하면 한국이 발전하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 1860년대에 파리 개조사업을 진행한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얼마나 지역 공동체에 대해 무감각했는지 알게 된다면 근대 파리의 변화가 무조건 잘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서울 궁궐의 소박함은 한국 유교 전통에서 가장 훌륭한 점을 표상한다. 한국의 왕실과 고위 관리들은 행실이 보다 투명했고 백성에게 보다 책임성이 있었으며, 공중에게 대표성을 발휘하는 방식이 보다 인간적이었다.

서울과 베이징의 차이는 14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양국을 다스린 강력한 지도자들은 몽골제국 붕괴 이후의 무질서를 극복하고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중국의 경우 영락제(永樂帝·1360~1424)는 혹독하게 통치했다. 극단적인 조치로 통치자와 시민 사이에 절대적인 거리를 강요했다. 영락제가 확립한 비밀경찰제와 상층부가 비대한 관료조직은 황제에 의한 군주정이 끝날 때까지 중국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영락제의 통치는 유교 전통을 왜곡시켰다. 또 신(神) 같은 존재가 된 황제는 거대한 관료집단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됐다.

반면 한국의 세종 대왕(1397~1450)은 시민에 대한 책임성을 그가 생각한 거버넌스 비전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가 상상한 왕은 왕국의 겸허한 종복이었다. 세종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종이 평민의 복지를 정부의 최우선과제로 삼았으며 고도의 견제·균형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통치한 조선은 500년 넘게 생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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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궁궐이 작다는 중국 관광객들은 조선 건축의 보다 인간적인 규모가 한국 문화 전통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측면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다. 영락제와 세종은 근대 초기의 제도 문화를 확립한 인물이다. 중국 관광객들 중에서 영락제와 세종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중국 관광객들의 무지를 탓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인 한국 철학·정치·예술·문학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는 활동이 아주 미흡했다. 예를 들면 세종에 대해 많이 아는 내 중국 친구들은 극소수다. 바이두백과(百度百科)에서 세종에 대한 서술을 읽어 보면 전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지만 세종이 행한 개혁의 많은 부분이 빠져 있고 그의 공헌은 축소돼 있다.

18세기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에 대한 바이두백과 항목은 더 심각하다. 다산의 지성사적 공헌은 지극히 짧게 소개돼 있다. 왕양명(王陽明)·주희(朱熹)와 어깨를 견주는 다산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는 한국인들의 노력은 매우 미흡하다.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미래 문화적·정치적 위상을 확립하기 위한 싸움은 지극히 힘들 것이다. 결정적 요인은 ‘한국산 스마트폰을 몇 대나 팔았느냐’ 혹은 ‘중국에서 인기 있는 한국 남성 밴드는 몇이나 되느냐’가 아니다. 한국의 영향력을 좌우할 결정적 요인은 한국 전통에서 발견되는 투명성·책임성 전통을 어느 정도까지 보편적인 모델로 세계, 특히 중국에 제시할 수 있느냐다.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1980년대 한국의 투쟁에 대해 중국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틀림없이 한국의 오랜 투명성 전통과 왕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제약이다. 우리는 한국 유교가 16·17·18세기 선정(善政)에 공헌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교 전통은 한국뿐만 아니라 어쩌면 중국의 미래를 위한 모델이다. 한국은 아마도 그런 차원에서 중국에 영향을 줄 희망이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