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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직격 인터뷰

강대국이 분쟁 해결 기능에 개입하면 WTO 체제 무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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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박종근 기자 중앙일보 비주얼에디터

지난 5월 이래 각국 통상 관계자들의 시선은 온통 한 한국 학자의 거취에 쏠렸다. 그를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몰아내려는 미국과 이에 반대하는 나머지 나라들 가운데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세계 무역질서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지난 4 년간 WTO 상소기구 재판관으로 일한 뒤 연임을 앞뒀던 장승화(53) 서울대 교수. 미국을 제외한 다른 WTO 회원국 전부와 통상 관련 학자 모두는 그의 연임을 주장했다. 전·현직 WTO 재판관들의 연임 촉구 성명서가 꼬리를 물었고 미국을 비판하는 글이 세계 유수의 언론에 속속 게재됐다. 그럼에도 반대여론은 미국의 완강함을 꺾지 못해 장 교수는 결국 오는 9월 퇴임하게 됐다. 도대체 WTO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간 침묵을 지켜온 그가 지난 20일 그간의 경과와 심경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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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대로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재판관 재임명이 무산된 장승화 서울대 교수는 20일 “미국이 단기적 이익 때문에 전과 같은 리더십과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어찌 된 일인가.
“WTO 상소기구 재판관 임기는 4년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임되는 게 관례다. 내 임기는 2012년 6월 시작해 올해 5월 말로 끝날 예정이라 진작 연임 의사를 밝혔다. 다른 나라는 모두 지지했는데 유독 미국만이 5월 중순 보도자료를 내며 연임에 반대했다. 다른 모든 국가가 ‘WTO의 독립성을 해치는 일’이라며 반발했지만 미국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한국 정부도 재임명을 포기함으로써 지난 21일 후임자 선임 절차를 개시하기로 결정됐다.”
이런 일이 흔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분쟁해결기구(DSB) 회의에서 발언하는 나라는 20여 개국 정도인데 이번에 미국을 성토한 나라는 50~60개국에 달했다. 한 번도 WTO에서 발언해 본 적이 없는 스리랑카 같은 국가도 ‘연임 반대는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유례없는 일이다.”
미국은 왜 반대했나.
“‘판결 시 상소기구에 주어진 권한을 남용했다’는 게 명목상 이유다. 이와 관련해 3~4개 사례를 거론했는데 이들 사건에 나와 함께 참여해 똑같이 판결문을 작성한 인도 출신 재판관은 지난해 말 재임명에 성공했다. 그때에는 미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왜 장 교수만 가지고 그러느냐.
“권한 남용은 표면적 이유라고 본다. WTO 주변에서는 판결 내용 또는 재판 절차와 관련된 WTO 상소기구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누적된 결과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불만을 잘 들어주지 않자 의사 표시의 방법으로 재임명 거부라는 카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과 미국 간에 세탁기 분쟁이 걸려 있다는 사실도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이 사건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무척 중요하다. 세탁기 분쟁 자체도 의미 있지만 미국의 반덤핑 체제 일부가 잘못됐다는 판결이 나면 이와 관련된 모든 제품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럴 경우 철강처럼 국내 정치적으로 목소리가 큰 분야도 직격탄을 맞게 된다. 모든 재판관은 출신국 관련 사건일지라도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럼에도 미국으로선 한국 출신 재판관이 이 사건에 관여한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꼈을 거라는 설도 있다.”
WTO 상소기구 재판관에게는 ‘출신국 관련 사건에서는 제외한다’는 제척 규정이 없나.
“없다. 7명의 재판관은 한국 외에 미국·중국·유럽연합(EU)·인도·멕시코·모리셔스 출신으로 모두 국적과 상관없이 모든 재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각국이 앞다퉈 자기 나라 재판관을 포함시키려 하는 거다.”
한국 관련 사건이 세 개 있다고 하던데.
“상소기구에 올라와 있는 세탁기 건 외에 1심 패널 단계에 포스코와 관련된 유정 강관 사건, 일본 도호쿠산 수산물 수입 문제, 그리고 우리 정부가 일부 일본 제품에 대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한 것이 걸려 있다. 국익에 맞춰서 판결을 하는 건 아니지만 수출 의존도가 몹시 높은 한국으로서는 우리나라 출신 재판관이 있다는 게 의미가 있다.”
각 사건에 재판관 전원이 투입되나.
“사건별로 3명이 재판부를 이룬다. 그러나 매 사건이 같은 협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인 데다 연관 사건이 계속 들어오기 마련이라 재판관 7명의 전원 합의로 마련된 내용을 바탕으로 3명이 최종 결정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실상 7명 모두가 관여한다고 봐야 한다. 4년 전 처음 부임했을 때는 경험 없는 신참 대접을 받았지만 그간 성실히 일해온 데다 판사 경력 및 국제적 경험도 있어 2년이 지난 뒤부터는 나의 의견을 다른 재판관들도 존중하게 됐다.”
하버드대에서 공부해 미국에서 친숙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4년 전 임명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기대 반, 우려 반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강의도 했던 터라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장학자 때에는 미국의 일방주의적·보호무역주의적 반덤핑 제도를 비판한 논문을 몇 개 썼었다. 이로 인해 미국 측에서 적잖게 걱정도 했다고 한다. 미국 입장에선 원칙대로 판단하고 강대국이라고 특별대우 하지 않는 재판관을 4년 더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미국에 대한 항의가 격렬했다고 하던데.
“일이 터지자 상소기구 재판관 7명 전원과 13명의 생존 전임 재판관 모두가 ‘판결 결과를 이유로 재임명에 반대하면 안 된다’는 성명서를 연달아 발표했다. 미국과 전 세계 통상 관련 학자들 역시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세계 유수의 언론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를 규탄하는 사설까지 게재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서 개인적으로는 소신 있는 판사로서 명예롭게 퇴진하는 셈이 됐다.”
미국 학자들은 어땠나.
“재임명을 반대한 건 미국 무역대표부(USTR)였지만 여기에 반발해 항의 성명을 쓰고 발표하는 데 가장 앞장선 건 미국인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상소기구 의장인 토머스 그레이엄 재판관이다. 자신의 조국이 반대했으니 얼마나 애매한 입장이었겠는가. 나와의 신뢰 관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레이엄 본인이 직접 미국이 잘못했다는 성명서 초안을 작성해 발표했다. 전임 재판관 13명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 역시 미국 출신 짐 바커스가 초안을 쓰고 다 연락해 서명을 받아 발표한 것이다. 또 워싱턴포스트와 허핑턴포스트에 항의성 칼럼을 써서 올린 것도 모두 미국인 학자다. 이런 게 미국의 본모습인 것 같다.”

사태의 심각성으로 FT는 이틀 연속 관련 기사와 사설을 실으며 미국의 독단적 행동을 비판했다. FT는 지난 5월 30일 “통상법 분야에서 존경받는 한국인 학자 장승화 교수의 임기가 미국의 반대로 끝나게 됐다”고 보도한 뒤 그 다음 날 사설 소제목으로 “WTO의 분쟁 해결 절차를 조정하려는 미국은 잘못됐다”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WTO에 대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 기구의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횡포에 가까운 미국의 일방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특정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나.
“WTO의 전신은 몇몇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결성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으로 이때부터 만장일치 전통이 지켜져 왔다. 이 전통 때문에 WTO도 만장일치를 뒤집을 수 없는 관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유독 한 나라가 반대한다고 다수 안이 거부된다는 말은 아니다. 혼자 반대하고도 재판관 연임을 막을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미국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도 하는데 우리는 왜 못 하느냐’며 중국도 특정 사안에 반대하며 나설까 걱정이다. 이럴 경우 인도·브라질·러시아 역시 ‘우린 왜 안 되느냐’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WTO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WTO 재판관의 연임 반대가 FT 사설로 취급될 정도로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이번 미국의 조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미 국무부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박사 학위를 땄던지라 진심으로 미국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왔다. 그러기에 이번처럼 단기적인 산업 이익을 위해 옛날과 같은 리더십과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번 사태로 WTO가 영향을 받을 걸로 보나.
“현재 WT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분쟁해결 기능이다. 이번 재임명 반대를 통해 미국과 같은 강대국은 얼마든지 분쟁 해결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로써 공정한 분쟁 해결 기능이 의심받게 되면 WTO는 죽게 된다. 양국 간에 체결되는 자유무역협정(FTA)도 WTO라는 다자체제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번 사태로 WTO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안타까울 때는 없었나.
“4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기에 개인적 회한은 없다. 다만 이번 일로 WTO와 같은 다자체제 내에서 한국 위상의 한계가 드러나 적잖은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만약 내가 한국이 아닌 중국이나 인도 출신이라면 미국도 반대를 못했을 거다. 또 우리 국익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로 ‘4년 전 이걸 어떻게 해서 얻어낸 건데 이리 쉽게 내줄 수 있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WTO 재판관 업무는 고됐나.
“WTO 본부는 한국과 7시간 시차의 스위스 제네바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제네바에 도착해 일찍 자도 새벽 1시에 깬다. 잠에서 깨면 밀린 일이 적잖아 그때부터 일하게 되고 일과 후 비즈니스 만찬까지 참석하면 밤 11시에 일이 끝난다. 그럴 경우 24시간 중 22시간 일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고시 공부할 때보다 그동안 일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WTO 사무국에서 계산해보니 많을 때는 1년 중 120일 정도 제네바에 체류했다고 하더라. 그러다 보니 지난 4년간 학교에 빚을 진 느낌이다. 앞으로 갚아야 할 일이다.”
재임명 좌절과 관련해 특별히 조치해 둔 건 없나.
“미국의 반대로 물러나는 터라 WTO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기여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후임자 선정에 동의해주는 대신 재판관 임기를 6~7년으로 늘려 단임제로 하든지, 재임명에 반대할 수 있는 객관적 사유를 정리해 권고안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수의 다른 회원국도 여기에 동조하기 때문에 이 안이 채택되지 않더라도 이번과 같은 일이 쉽게 재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끝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그간 한국은 남북 대치 상황 탓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대북 금융제재 등 거의 모든 주요 안보 이슈를 미국과 상의해 왔다. 이로 인해 중요한 일이 터지면 그때마다 다른 사안과 연계해서 눈치를 봐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단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국력도 신장된 만큼 사안별로 대처하는 게 옳지 않나. 정당성과 명분이 있으면 상대가 미국이든 중국이든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일선 외교관들도 같은 생각이란 느낌을 받았다.”
향후 계획은.
“일단은 강의에 전념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국제기구에서 일할 기회가 많지 않겠나.
“글쎄… (한동안 머뭇거린 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WTO 재판관으로서의 경험과 경력을 활용하는 게 좋을지 신중히 고려해 보겠다.”
장승화 교수는…

미국 반대로 WTO 재판관 재임명 무산된 장승화 교수

서울대 법대 및 대학원 졸업.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거쳐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 법학 박사 학위를 딴 뒤 하버드·예일·스탠퍼드대 로스쿨에서 방문교수로 강의했다. 이후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며 런던국제중재법정(LCIA)과 국제중재법원(ICC) 중재인으로 활약하다 2012년 한국인 최초로 WTO 상소기구 재판관에 뽑혔다. WTO 상소기구는 통상 분쟁과 관련한 최고 심판기구로 이 분야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ICJ)와 같은 권위를 지닌다. 임명 당시 장 교수는 일본 재판관의 임기 만료로 생긴 자리를 일본·태국 후보와의 경합 끝에 차지했다.

글=남정호 논설위원
사진=박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