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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재벌은 어떻게 해체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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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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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2012년은 기억해야 한다. 그해 131년 역사의 코닥필름이 파산했다. 한달 뒤 페이스북은 사진공유 업체인 인스타그램을 1조원에 인수했다. 코닥의 직원은 14만5000명이었고, 인스타그램의 직원은 고작 16명이었다. 또하나 수수께끼 같은 마법이 있다. 미국에서 월마트(220만 명) 다음으로 직원이 많은 기업은 아마존이다. 아마존의 배송창고에는 23만 명이 일한다. 그런데 아마존이 2012년 7억7500만 달러를 쏟아부어 신생 로봇업체인 키바를 인수한 이후 종업원 수가 늘지 않았다. 대신 배송창고의 키바 운반로봇이 3만 개로 폭증했다. 아마존은 “로봇 덕분에 (지게차가 필요 없어) 같은 공간에 약 50% 더 많은 물건을 저장·분류·포장·운반하고 있다”며 “로봇직원들은 24시간 작업이 가능해 9억 달러 이상의 인건비를 절약했다”고 자랑한다.

세상이 아찔한 속도로 바뀌고 있다. 미국 MIT의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 교수는 『제2의 기계 시대』에서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의 산업혁명이 육체노동을 대신했다면 이제 디지털 기술이 정신노동을 대체하는 제2의 기계 시대가 왔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디지털 분야의 스타트업 기업붐에 대해 “5억4200만 년 전 갑자기 수많은 생명체가 출현했던 ‘캄브리아기 대폭발(Cambrian Explosion)’에 비유된다”고 했다. 이들 신생 기업은 치열한 경쟁 속에 기존의 공룡 대기업들을 물어뜯으며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다.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이다.

비단 정보기술(IT) 분야만 아니다. 미국의 은행들은 신생 핀테크들에게 온 사방에서 정신 없이 물어뜯기고 있다. 대출은 간편대출의 렌딩클럽·온덱 등이, 자산관리는 낮은 수수료로 로봇이 소액 자산을 관리해주는 웰스프런트·퍼스널캐피털 등에게 도전받고 있다. 미국은 자유방목형 나라다. 2007년 창업한 렌딩클럽의 경우 온라인으로 자유롭게 투자와 대출을 연결시켜 주다 6개월 영업정지를 당했다. 미 규제당국이 소비자 보호가 꼭 필요할 때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렌딩클럽이 당국과 소비자 피해를 막기 위한 합의를 한 뒤에는 아예 간편대출 자체가 합법화됐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미국 테슬라나 중국 BYD의 전기차뿐만 아니다. 엔진효율, 자율주행, 배터리, 사고 수리 등 분야마다 수십 개의 스타트업들이 덤벼들고 있다. 작고 혁신적인 벤처들이 거대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해체(Unbundling)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계 최대의 배송업체인 페덱스도 수많은 긱(Gig) 스타트업들에게 물어뜯기고 있다. 우버는 택시뿐 아니라 배송까지 눈독을 들이고, 도어 대시는 음식 배달로 6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일궜으며, 십(Shyp)은 현장을 방문해 포장부터 배송까지 대행하면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굴뚝산업 분야도 마찬가지다. 요즘 미국의 시몬스·설타·씰리 등의 침대 업계는 온라인 스타트업인 캐스퍼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다. 캐스퍼는 미국산 고급 매트리스를 강력 압축 기술로 작은 박스에 담아 배송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100% 환불해 준다. 임대료가 없으니 시중 가격의 3분의 1로 매트리스 시장을 싹쓸이하고 있다.

얼마 전 삼성그룹이 젊고 역동적인 스타트업을 벤치마킹해 기업 문화를 혁신하자는 컬처 선포식을 가졌다. 호칭을 ‘님’이라 부르고 반바지를 입자는 대목만 도드라져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기업 해체 흐름을 보면 누구나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다. 솔직히 인위적인 경제민주화로 이 땅의 재벌들이 해체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제2 기계 시대에 수많은 국내외 스타트업들의 도전에 의해 해체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130년 역사의 코카콜라는 모든 회의와 보고를 파워포인트 대신 A4용지 한 장으로 통일했다. 가장 안정적 직장이라던 마스터카드도 20~30대의 젊은 직원 비중을 2010년 10%에서 지난해 38%로 확 끌어올렸다.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다. 이미 대량생산 시대는 가고 다품종소량생산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떤 기업도 생존할 수 없는 시대다. 중생대에서 신생대로 접어들면서 재빨리 진화하는 작은 몸집의 포유류만 살아남았고 공룡들은 멸종됐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