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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특파원, 현장을 가다] 트럼프 “LGBT 보호할 것”…160년 공화당 스타일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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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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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현지시간) 미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와 러닝메이트인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 부부가 연단 위에 함께 섰다. 이날 평소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았던 트럼프의 막내 배런(10·맨 왼쪽)이 등장했다. [AP=뉴시스, 김현기 특파원]

2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의 후보 수락 연설은 모든 게 ‘파격’이었다.

76분 연설, 클린턴의 최장 기록 깨
CNN 여론조사 75% “긍정적 평가”
청중 “클린턴을 지옥으로” 외치자
“11월 그녀를 이기자” 점잖게 대응

먼저 가장 공화당 같지 않은, 나아가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연설”(허핑턴포스트)이었다. 1980년 대선후보로 나선 로널드 레이건의 ‘미국의 아침(Morning in America)’, 88년 조지 H W 부시의 ‘더 친절하고 더 공손한 나라(kinder and gentler nation)’, 2000년 조지 W 부시의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 같은 개념은 자취를 감췄다. 트럼프는 상대방을 무릎 꿇게 해서라도 미국의 이익을 챙기겠다는 공격적 자세를 앞세웠다. 이는 이날 트럼프가 수락연설에서 사용한 단어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폭력(violence)’이 가장 많은 11차례, ‘이민(규제)’이 8차례, ‘무역(불균형 시정)’이 7차례, 테러리즘(박멸)이 5차례 순이었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후보 공히 애용했던 ‘꿈(dream)’이라거나 ‘희망(hope)’ 같은 단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는 자신의 연설을 통해 이 나라(미국)를 긴장으로 가득 찬 곳으로 보이려 했다”고 진단했다. CNN에 출연한 한 코멘테이터는 “트럼프의 연설은 전투에 나서기 전 군 최고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우고 긴장하도록 긴 훈시를 하는 듯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현실 노선도 도입했다. 그는 수락연설에서 “지난달 올랜도에서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희생된 이들(49명)은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였다. 난 여러분의 대통령으로서 내 모든 힘을 다해 우리의 LGBT 시민을 폭력과 증오적인 억압에서 보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대 공화당 후보 수락 연설 중 LGBT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또 그는 찬조연설자로 동성애자를 등장시켰다. 역시 최초다. 대선 본선을 앞두고 다양한 계층의 유권자를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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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은 “그는 160년 전통의 공화당을 ‘트럼프 스타일’로 완전히 바꾸었다”고 평했다.

‘말’로 승부를 거는 트럼프답게 연설 시간도 파격적이었다. 이날 트럼프 연설 시간은 1시간16분으로 지난 1956년 이래 최근 60년 동안 가장 길었다. 밋 롬니(37분47초, 2012년), 존 매케인(49분4초)은 물론 민주당의 최장 기록인 96년 빌 클린턴(1시간4분44초)보다 10여 분 길었다.

트럼프는 이날 ‘경선후보’가 아닌 ‘대선후보’로서의 달라진 존재감도 과시하려 했다. ABC방송 등 미 언론들은 “힐러리 클린턴 이야기가 나오자 대회장 내의 흥분한 청중들이 ‘그녀를 감옥으로(Lock Her Up)’이란 구호를 연호했지만 트럼프는 손을 저으며 ‘11월에 그녀에게 이기자(Let’s defeat her)’고 점잖고 어른답게 대응한 게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또 승부처인 러스트벨트(쇠락한 산업지역)를 겨냥해선 “이곳 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뉴욕·미시간에 일자리를 되돌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반 기득권’ 유권자를 끌어오기 위해 “샌더스는 왜곡된 선거 시스템에 의해 승리의 기회가 없었다. 난 그런 시스템을 뜯어고칠 것이기 때문에 샌더스 지지자들은 우리와 같이 할 것”이라 구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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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긴 후보 수락연설이 지루한 듯 고개 숙인 배런. [AP=뉴시스, 김현기 특파원]

트럼프는 이날 자신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금색의, 대선 승리를 뜻하는 V자 모양의 무대 연단 등 세심한 곳까지 신경썼다.

준비된 연설문 중간중간에 애드립을 넣고, 어려운 수식어 대신 쉬운 단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이날 연설을 참관한 한국 이미지전략연구소 허은아 대표는 “어조는 강하고 단호했지만 과한 표정이나 제스처를 전혀 쓰지 않고 대통령다움을 보이기 위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연설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CNN의 긴급여론조사 결과 트럼프의 이날 연설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답한 이가 57%, “다소 긍정적”이 18%로 긍정적으로 본 이가 75%에 달했다. 또 “이날 연설이 당신의 투표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트럼프에게)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가 56%인 반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32%에 그쳤다. 미국인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분노,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만을 정확히 간파한 연설이었던 셈이다.

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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