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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열심히 살수록 인생이 망가지는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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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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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습작기에 읽은 소설 중 저자도 제목도 잊었지만 주인공 캐릭터만은 생생히 기억하는 작품이 있다. 그 인물은 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모든 일이 잘될 거라는 전망을 품고 있었다. 동업자나 연인을 만날 때도, 이직이나 이사할 때도 근거 없는 낙관적 비전을 피력한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의 화자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주인공이 소외되고 파괴당하는 모습을 찬찬히 그려나간다. 삶이 와해되는 순간에도 주인공이 꺼내 보이는 낙관적 소망을 묘사한다.

예전에는 그 인물이 도식적이라 여겼다. 머릿속에는 희망이 가득하고, 현실은 파괴만을 향해 가는 삶이 있을까 싶었다. 정신분석적 관점을 갖게 되자 그 인물이 새롭게 이해되었다. 그는 명증한 현실 검증력을 갖지 못한 사람, 내면에 망상적 생존법이 자리 잡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이곳에서도 그 소설 캐릭터 같은 남자들이 드물지 않게 목격된다. 열심히 사는데도 삶이 나빠지거나 한순간에 무너질 때 남자들은 그 일이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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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불법적인 일에 연루되기 쉽다. 그런 이들은 힘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의존하면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 과정에서 자아는 점차 약해지고 내면 욕구는 불만 상태로 방치된다. 마침내 의존 대상의 불법적인 요구에 대해서도 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르시시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사기 사건 피해자가 되기 쉽다. 그들은 타인의 객관적 실체를 보기보다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반영해주는 사람, 달콤한 말과 헌신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여긴다. 자연히 좋은 사람과 사기꾼을 구분하지 못한다. 당신에게만 주는 특별한 기회이자 혜택이라면서 사기꾼이 제시하는 조건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열심히 살수록 결과가 나빠지는 현상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후배 여성에게 당분간 열심히 살지 말 것을 권하는 때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한 여성은 반복해서 부유남의 연인이 되기 쉽다. 시기심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아홉 개를 가지고도 한 개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다.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온갖 방어기제를 동원해가며 삶을 텅 빈 상태로 유지한다. 그렇게 점진적으로 생이 나빠지거나, 중년기 입구에서 대가를 치르거나, 한순간에 붕괴되는 경험을 맞이한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