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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2030 세대가 바라본 쿠데타 정국…"오보로 여길만큼 허술하고 엉성했던 쿠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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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천하’로 막 내린 터키 쿠데타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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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탁심 광장에서 쿠데타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지지자들과 이들을 지키고 있는 정부군> [사진 AP=뉴시스]

지난 15일 오후 10시 29분(현지시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군부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황을 틈타 이뤄진 쿠데타였다. 외신에 따르면 이들은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대교 2곳을 장악했고 파티프 대교를 봉쇄했다. 20여분 뒤인 10시 50분쯤 수도 앙카라 상공에 쿠데타 반군의 전투기와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고 곳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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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반군이 이끌고 온 탱크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들

쿠데타 반군은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의 이스탄불 지부와 국영방송인 TRT 본사를 장악하고 의회에 폭격을 가했지만 결국 에르도안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시도는 ‘6시간 천하’로 막을 내렸다. 군부의 이번 쿠데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정부 기간 시설만 장악했을 뿐 정작 에르도안 대통령을 제압하지 못한 데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 쿠데타 소식을 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은 영상통화 앱을 활용해 CNN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국민들에게 호소의 메시지를 보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 광장, 공항으로 나가 정부에 대한 지지와 단결을 보여달라”는 내용이었다. 또 에르도안 대통령은 “봉기를 시도한 세력은 소수 군부에 불과하다. 지금 앙카라로 복귀중이며 쿠데타는 곧 진압될 것”이라고 공언하며 추가적인 쿠데타 움직임을 원천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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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6시간 만에 막을 내린 쿠데타 이후, 터키에선 ‘피의 숙청’이 이뤄지고 있다. 18일 AP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에 연루된 29명의 장군과 법조인 등을 포함해 7500여명을 체포했다. 또 군부의 쿠데타 시도와 관련해 주지사 30명을 포함해 공무원 8700여명의 현직을 박탈했다. 숙청대상 대부분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권 운영에 반발해 사실상 ‘정적’으로 낙인찍힌 이들로 알려졌다. 대대적인 피의 숙청 이후 에르도안의 국정 장악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터키 2030 청년세대가 바라본 쿠데타 정국…"오보로 여길만큼 허술하고 엉성했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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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탁심 광장에 모인 수천명의 에르도안 대통령 지지자들

지난 15일의 쿠데타가 6시간만에 진압된 뒤 터키는 그 후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피의 숙청’을 위해 칼을 빼들었고 군인과 경찰, 법조인 등 7500여명이 무더기로 체포됐습니다. 권한을 잃고 사실상 ‘직무 정지’ 상태에 놓인 공무원 또한 8700여명에 달합니다.

터키는 쿠데타에 익숙한 나라입니다. 1960년 이후 터키는 군부가 주도한 네 차례의 쿠데타를 경험하며 정부가 전복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터키의 청년들은 쿠데타에 익숙한 세대가 아닙니다. 이번 쿠데타 정국 이전에 터키에서 일어난 마지막 쿠데타는 1997년이었고, 터키의 2030 청년세대 대부분은 당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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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담회를 위해 모인 터키 국적의 2030 청년들. 이들은 각각 회사원과 대학생, 대학원생 등으로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면 터키의 20~30대 청년들은 이번 쿠데타를, 그리고 에르도안 대통령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터키의 쿠데타 정국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한국에 거주하는 터키 국적의 청년 5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이들은 각각 20~30대 회사원과 대학생·대학원생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터키에서 쿠데타가 이뤄진 시점이 한국시간으로는 오전 4시 30분이다.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쿠데타 소식을 접했나.
톰리스(가명·여·23)=토요일이라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오전 11시쯤부터 ‘큰일났다’며 한국 친구들이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터키 사람들이 쿠데타에 익숙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다 옛날이야기다. 일단 너무 놀랐고, 한 편으로는 내 국가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 자체에 조금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메테(가명·21)=쿠데타가 한창 진행중일 때 사실 나는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잠깐 터키에 갔다가 토요일 아침에 한국에 도착했는데 쿠데타가 진행중이라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루만 더 터키에 있었으면 내가 휘말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쿠데타 자체가 허술하고 제대로 된 준비가 없이 이뤄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알리(가명·28)=한국 언론사의 속보를 보고 알게 됐다. 소식을 처음 듣고는 ‘이게 무슨 쿠데타야’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쿠데타를 했다고 하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붙잡히지 않은 채로 멀쩡히 영상통화로 국민들에게 ‘거리에 싸워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쿠데타 반군이 국가 통신망도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터키에 나가 있는 한국 언론사 소속 특파원들이 오보를 낸 건 아닌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무라트(가명·28)=새벽에 친구 전화를 받고 알게 됐다. 터키 언론사 사이트에 들어가봤는데 내용이 없어서 외신에 접속했다. 한 외신사이트에 들어가니 딱 세 문장으로 상황이 요약돼 있었다. 이스탄불의 대교가 장악당했고, 수도 앙카라에서는 총소리가 들리며, 총리는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정부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선언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이상하지 않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긴 한 것 같은데 아직 총리조차 잡지 못했다니.

SNS를 포함해 온라인에선 이번 쿠데타가 에르도안 대통령의 자작극이라는 내용이 퍼지고 있다.
톰리스=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이 꾸민 쿠데타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만약 정말 쿠데타가 벌어지는 위급상황이었다면 대통령이 수도인 앙카라로 오는게 아니라 주변의 우방국으로 피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외신과 인터뷰를 하고, 페이스북에 영상을 내보내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다는 것 자체가 이번 쿠데타가 반군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 아닌가.

메테(가명·24)=터키는 정부가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실제 터키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SNS에 더 잘 나타나 있다. SNS를 보면 젊은층의 70%이상이 에르도안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젊은층에선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른바 ‘철권통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알리=정말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반반인 것 같다. 다만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가정에 종교적 색채가 적을수록 에르도안을 반대하는 비율이 높은 것 같다. 미국 등 선진국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민주주의나 자유 등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평가한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독재적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슷한 유형의 리더로 보인다.

톰리스=이슬람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본다. 코란을 내세워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으니까. 짧은 치마를 입으면 성폭행 당할 준비가 돼 있는 여성이라고 이야기한다든가, 히잡을 안 쓰면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여성이라고 평가한다든가 하는 게 전부 종교적인 이야기를 내세워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는거 아닌가.

무라트=에르도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이나 독재적 성향과는 별개로 정말 카리스마있는 정치인인 것은 맞다. 연설을 할 때 보면 히틀러가 그랬듯 정말 좌중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지금 터키엔 에르도안 대통령만큼 카리스마적인 정치인이 없다. 그리고 에르도안 대통령의 또 다른 힘은 라이벌, 정적이 없다는 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기편을 계속 늘려가면서 권력을 공고히하고, 반대편을 확실히 제거하는 정치인이다.

이번 쿠데타가 터키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나.
메테=지금 터키는 정말 여러 가지로 살기 힘든 국가가 됐다. 일단 부자인 사람은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빚은 쌓이고 세금은 오르고 생활은 팍팍해지고 복지는 제대로 이뤄지는 게 없고. 관광으로 많은 돈을 버는게 터키인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관광 활성화 정책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쿠데타 이후 에르도안의 대통령의 힘이 더욱 강해진다면 한동안 터키는 깊은 나락에 빠질지도 모른다.

무라트=쿠데타가 자작극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분명한 것 한가지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데타 정국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숙청대상에 오른 수천명의 정부 관료와 법조인들은 사실 과거부터 ‘제거대상’으로 리스트가 만들어진 인물들이란 이야기가 많다. 이번 쿠데타 이후 내전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에르도안을 사이에 두고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실제 친구들과 통화해보면 지금 터키에는 에르도안 지지자들이 폭도들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며 건물을 불태우는 등의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

터키는 한국 국민들에게 ‘형제의 나라’로 불리고, 터키인 대부분이 한국에 우호적이라고 들었다. 터키와 한국은 정말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꼽자면?
톰리스=현재 상황을 놓고 보자면 가장 큰 차이는 ‘자유’일 것이다. 터키에 살다 한국에 와보니 말하고 행동하는 등의 모든 것들이 정말 자유롭다. 아무런 구속이나 억압이 없다. 반면 터키인 대부분은 말하는 입과 듣는 귀가 전부 막혀있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무라트=에르도안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이 지향하는 방향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끊임없이 국민들을 세뇌한다. 히잡을 쓰고도 공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종교를 내세워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포장한 뒤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드는 거다. 터키는 혁명이나 쿠데타로 개혁되서는 안된다. 교육을 통해 국민들이 스스로 깨닫고, 내부적으로 조금씩 바뀌면서 ‘느린 혁명’이 이뤄져야 한다.

램지=일단 한국은 국가 차원의 종교가 없는 곳이니까 터키와는 다른 점이 무척 많다. 터키에서는 뭐든지 종교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종교를 우선순위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하다. 반면 한국은 다들 각자의 삶에 대한 욕구와 욕심이 상당히 강하다. 다른 그 무엇보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그런 인식. 물론 한국에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꿈을 꾸고 목표를 정하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정진우·서준석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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