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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모를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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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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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우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경찰은 박유천의 성폭행에 대해선 무혐의로 결론 내렸다. 대신 성매수와 사기 혐의를 적용했다. 박유천 측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방은 꽤 오래갈 듯싶다. 하지만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은 이미 멀어진 듯 보인다. ‘박유천 화장실’로 충분히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호기심이 발동한다 해도 지극히 사적인 취향이 범죄 여부보다 중요할까. 어디서 성관계를 맺었다는 게 반드시 체크해야 할 ‘팩트’였을까.

프로야구 김상현 선수는 차 안에서 문을 열어놓고 음란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입건됐다. 상대 여성의 수치심 등을 고려하면 처벌은 불가피하나, 그는 공직자가 아니며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쯧쯧… 못난 놈” 정도로 치부할 일이지 인간 말종이나 파렴치한으로 몰고 갈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관음증에 사로잡힌 종편은 온종일 떠들었고, 덩달아 한국야구위원회(KBO)도 임의탈퇴라는 최고 중징계를 내렸다. 심지어 한 인터넷 매체는 “김상현 차 주인은 장인”이란 걸 엄청난 사실인 양 단독이라고 보도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지만 이런 시시콜콜함을 왜 알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최근 스타의 성추문이 유독 두드러지는 게 과연 여성의 높아진 인권의식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확대 때문만일까.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된 미디어 환경 탓이란 걸 이젠 웬만한 이들이라면 다 눈치채고 있다. 뉴스란 뉴스라고 하기에 뉴스인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과거에도 타블로이드 가십과 황색 저널리즘은 일정 부분 존재해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류·비주류 가리지 않고 벌떼처럼 달려든 적은 없었다.

뉴스를 생산하지만 실제 뉴스 유통을 하지 못하기에, 네이버 등 포털에 의존하기에, 클릭을 늘려야 수익을 내는 구조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국내 언론사는 항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미국 언론은 왜 강정호의 성폭행 혐의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까. 기자 정신이 없어서? 게을러서? 그들이라고 클릭에 대한 유혹이 왜 없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언론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금도라는 걸 깨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강정호가 한국에 있었다면 당장 ‘도대체 무슨 일이?’라는 추측성 기사부터 ‘어디 감히 경기장을 밟는가’라는 성토까지 난무했을 게 뻔하다. ‘아니면 말고’ 식 뉴스가 판치는 정글에 취재원 보호나 무죄추정의 원칙이 유지될 리 만무하다. “뉴스가 폭력”(김성철 고려대 교수)이란 지적은 실로 뼈아프다.

누군가 나서야 한다. 한국 언론 스스로 자정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외부에서 개입한다 해도 막을 명분이 없을 지경이다. 선정성을 국민의 알 권리로 포장해선 안 된다.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 맞서 비리를 폭로하는 것만큼 중요한 언론의 사명이 또 하나 생겼다. 바로 사생활 캐기를 멈추는, 보도하지 않을 용기다. 국민에겐 모를 권리도 있다.

최민우 문화스포츠부문 차장